같은 시간, 다른 기다림
소중한 이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얼마일까. 부고를 겪는 이의 성향 혹은 관계의 깊이 등에 따라 그 기간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자신이 예상했던 시기보다 꽤나 일찍 수용해 버릴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상실의 그림자가 나머지 여생 동안 끈질기게 붙어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픔의 시간은 이처럼 인간에 따라 그 값을 제각기 달리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이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더군다나 현세에서의 만남을 더 이상 기약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혈육이라면, 그 시간은 결코 물리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초월적인 숫자로 변모해버릴 것이다. 가족의 부재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영원한 공백과도 같다.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한 인간이 가족의 죽음을 맞닥뜨릴 때 경험하는 복잡미묘한 감정선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작품 속에서 세상을 먼저 뜨는 인물은 잔인하게도 주인공 안나(줄리엣 비노쉬 분)의 아들이다. 일반적으로 가족의 부고에서 발생하는 아픔은, 망인의 배우자 혹은 남겨진 자식들의 몫이다. 나이 든 연장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게 자연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일종의 법칙과도 같은 죽음의 순리가 각인되어 있다. 그렇기에 이 법칙을 거스르는 연소자의 죽음은 더욱 거대한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
안나의 입장에서 아들 쥬세페의 죽음은 쉽사리 인정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녀는 불현듯 찾아온 잔인한 진실과 마주하길 거부한다. 세상의 모든 빛을 차단하고 심지어 거울 반사에 의해 발생하는 미세한 빛의 조각 마저도 완전히 봉쇄해버리는 그녀의 모습은 비극적 진실을 향한 저항이자 몸부림이다. 완전한 어둠 아래에서 그녀는 조용히 침전한다. 그녀는 적막한 고독 아래에서, 자신에게 가혹한 운명을 쥐어준 냉정한 현실에게 단절을 고했는지도 모른다.
상실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안나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고인이 되어버린 쥬세페의 여자친구 잔(루 드 라쥬 분)이다. 안나에게 있어 잔의 방문은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허나, 안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그녀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잔을 마주하는 안나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대면마저도 꺼려하던 그녀는 어느새 잔을 위해 달걀프라이를 굽고 있었다.
안나의 갑작스런 심정 변화에 여러 추측을 해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잔에 대한 호의가 자기합리화를 위한 일종의 도구로 사용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잔은 쥬세페의 비보를 전해듣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단순히 같은 공간에만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쥬세페가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무턱대고 기다리기만 하는 잔의 모습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그녀 역시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본인의 실수로 관계가 소원해졌던 사실에 사소한 죄책감을 갖고 있던 그녀로써는 그저 묵묵히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안나는 기다리는 잔의 존재를 통해 아들의 죽음을 잠시나마 부정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것은, 곧 그 '누군가'가 실존한다는 의미가 된다. '쥬세페'를 기다리는 잔의 존재는, 곧 '쥬세페'의 생존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안나는 허위로 무장된 이 억지논리를 믿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자식의 부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진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거대한 고통과 마주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을 벌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잔이란 인물을 통해서 말이다.
쥬세페는 언제 와요?
아슬아슬한 난간 위에 서있는 심정일 안나에게 위와 같은 잔의 순수한 의문은 거센 바람과도 같았을 게다. 이 잔인한 질문은 합리화의 절벽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녀를 한순간에 냉정한 현실로 복귀시킨다.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다. 이 질문에 그녀는 결코 대답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정당한 대답은 곧 비극적 현실을 직시하는 자살행위와도 같다. 그녀는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기어코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끝없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쥬세페는 돌아오지 못한다.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과 같은 억지스러운 믿음, 부활절에 아들이 돌아오리라는 비논리적인 희망은 그 당일이 돼서야 깨지게 된다. 예수가 살아 돌아왔다던 부활절이라지만 쥬세페는 안타깝게도 인간에 불과했다. 심지어 예수가 회생했다는 일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조차 없다. 안나 역시도 이 모든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과의 재회를 위해서라면 한평생 믿어오고 축적해왔던 논리의 탑을 몇 번이고 무너뜨릴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이기 이전에 엄마이기 때문이다.
결국 안나는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인정한다. 공교롭게도 잔 역시 여태껏 자신에게 밝혀지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은 이별한다.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 속에 있었지만, 둘의 기다림은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극의 후반부까지 켜켜이 쌓여오던 혼란스러움과 이질감은 두 여인의 포옹과 눈물을 통해 깔끔히 증발된다. 그들은 그냥 공감했다. 서로의 다른 기다림을 인정하고 비슷한 아픔을 공유한 것이다. 그렇게 제각기 달랐던 '기다리는 시간'이 종료된다.
이 작품을 온전히 안나의 시점에서만 본다면, 제목이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닌 <당신의 부재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보다 적절하다. 자식을 잃은 어미에게 그 시간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안나라는 인간이 필요했던 시간은 영화적 설정에 의해 수치화되었지만, 실상은 또 이와 다를 것이다. 가슴을 찢는 듯한 어미의 절절한 고통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문득 거대한 조각상의 발에 입 맞추던 늙은 여인의 모습을 담은 오프닝 씬이 스쳐간다. 아마 이 영화는 세상의 모든 어미들에게 바치는 거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