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웅 사건, 비난이냐 옹호냐? 그 관점이 불편하다

대중에게 주입되는 입장 정하기, 빠져 있는 건 연예 산업의 책임이다

by 신해찬

비난이냐 옹호냐, 왜 이 구도가 불편한가


최근 조진웅 사건을 둘러싼 파장은 “비난이냐, 옹호냐”라는 이분법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여론의 무게추는 이미 강한 비난 쪽으로 기울었지만, 그럼에도 “그래도 인생 전체를 보아야 한다”, “소년범죄를 평생 짊어지게 할 수 있느냐”는 옹호의 목소리도 분명 존재한다.

여기에 정치 진영까지 끼어든다. 사건 그 자체보다 “이게 어느 진영에 유리하냐”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른바 ‘검찰 캐비닛설’까지 등장하면서, 민주당·국민의힘 지지자들 모두 자기 진영에 유리한 방향으로 “저쪽에서 캐비닛을 열었다”고 해석한다. 정작 아무도 확실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한 채, 사건은 서서히 ‘좌–우 진영전’의 무대처럼 소비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정치권까지 번진 지금의 논의는 불편하다. 캐비닛설은 일단 옆으로 밀어두더라도, 여론 지형을 “옹호냐, 비난이냐” 두 칸으로만 쪼개는 방식 자체가 피로하다. 공인, 특히 연예인을 둘러싼 사안은 결국 대중의 판단이 전부에 가깝다. 누가 어떻게 포장해도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하나다. “사람들이 그를 계속 보고 싶어 하느냐, 아니냐.” 그리고 지금 분위기에서 “계속 보고 싶지 않다”는 쪽이 다수일 것이라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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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이 유독 더 큰 배신감으로 다가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동안 조진웅이라는 이름이 쌓아온 이미지와, 기사 제목과 보도 속에 등장한 ‘특수 강도 강간’이라는 단어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설령 30년 전 과거라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정의롭고 단단한, 묵직한 배우의 이미지와 이 범죄명 사이에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골이 생긴다. 많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난감함이 아니라,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한 허탈감과 배신감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배우였기에 더 혼란스럽고, 동시에 더 불편하다. 그를 향한 호감, 연기력에 대한 신뢰, 작품 필모그래피와 인터뷰들을 통해 쌓아온 감정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이번 보도는, 마치 내가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아둔 ‘조진웅’이라는 이미지의 창고 문을 열어보니, 한순간에 안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누군가가 밤사이 와서 그 창고 안을 모조리 ‘강탈’해 간 것 같은 공허함이다.

그렇다면 이 강탈의 주체는 누구인가. 언론 보도인가. 보도의 방식에 대해 따져볼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에서 ‘강탈’의 핵심은 디스패치가 폭로했느냐 여부가 아니다. 수십 년간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를 숨긴 채 '공인'으로 활동해 온 조진웅 본인의 선택, 그리고 그런 정의로운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상품처럼 소비해 온 연예 산업 전체가 그 공백을 만든 주체다. 대중의 정서는, 나를 포함해, 이 질문 앞에서 단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배신감’에 가깝다. 그런데도 언론은 “너는 옹호냐, 비난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식의 프레임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 점이 가장 거슬린다.

더 불편한 지점은 이 프레임이 곧바로 “개과천선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냐, 아니냐” 같은 도식으로 번져간다는 점이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기회를 줘야 한다”는 말은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이 논리가 ‘어떤 범죄든 시간이 지나고 업적이 쌓이면 결국 잊어줘야 한다’는 주장으로 미끄러지는 순간, 많은 사람에게 또 다른 혼란을 안긴다.

아무리 중한 범죄라도 세월이 충분히 흐르면 이후의 선행으로 과거를 ‘지워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가볍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 선 위에서 우리는, 연쇄살인범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강도·강간처럼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범죄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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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공인·비공인, 다른 것은 책임의 무게


결국 핵심은 이것일지 모른다. 어떤 범죄는 세월이 지나도 대중이 도저히 잊어주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이번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주홍글씨'이다. 그게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동시에 “그 주홍글씨를 새겨야 할 사안의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법원의 판결이 기준인가, 각자의 도덕적 직관이 기준인가. 적어도 공인의 경우, 그 글씨를 실제로 새기는 주체는 결국 대중이다. 대중이 ‘이 정도면 더 이상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 그것을 단순히 ‘비난 VS 옹호’의 이분법으로만 치환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니까 공인을 둘러싼 논쟁에서 진짜 본질은 ‘비난 VS 옹호’가 아니다. 비난받을 일은 공인이든 비공인이든 비난받아야 한다. 공인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은 ‘책임’이다. 비난이 과하냐, 옹호가 맞느냐, 개과천선이 가능하냐 같은 논쟁은 결국 도돌이표에 머무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미 드러난 잘못에 대해 누가,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공인과 비공인의 문제가 따라온다. 어느 선까지 주홍글씨를 새겨야 할지에 대한 판단을, 공인이냐 비공인이냐에 따라 달리 해야 하는가. 흔히 “공인은 도덕적 기준이 더 높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문장은 어딘가 모순적이다. 그렇다면 일반인, 비공인은 도덕적 기준이 낮아도 된다는 뜻인가. 우리가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하면 안 되는 일들’ — 기본 질서, 타인을 해치지 말 것, 법과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 것 — 은 연예인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도덕적 기준은 이 사회 시스템 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공인이 다른 점은, 같은 기준을 어겼을 때 감당해야 할 ‘파장’과 ‘책임의 크기’가 다르다는 데 있다. 연예인과 같은 공인은 미담이든 추문이든 어떤 이야기가 붙어도 순식간에 증폭되는 환경 한가운데 서 있다. 이 증폭 장치 때문에 결과의 파장이 더 크고, 그만큼 책임도 무겁게 돌아간다. 공인의 도덕적 기준이 더 높아서가 아니라, 같은 기준을 어겼을 때 훨씬 더 큰 책임을 지게 되는 위치에 '스스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인은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기보다, “같은 잘못을 했을 때 그 잘못을 판단하고 기억할 사람이 훨씬 더 많고, 따라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파장도 훨씬 커진다”가 더 정확하다.

이번 사태 이후 업계의 움직임은 즉각적이었다. 조진웅의 공식 은퇴 선언이 있든 없든, 현실적으로는 이미 퇴출 수순에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특수 강도 강간’이라는 죄명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업계는 언제나 “대중이 돌아섰느냐, 아직 돌아서지 않았느냐”를 냉정하게 계산한다. 도덕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철저히 시장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래도 연기는 잘했는데”, “그래도 소년 때 일인데”라는 말은 시장의 냉정함을 바꿀 만큼 설득력 있는 변명이 되기 어렵다. 비난 VS 옹호, ‘누가 맞느냐’ 이전에, ‘사람들이 이미 마음을 접었는가’가 연예 산업의 의사결정을 좌우하고 있고, 이번에는 그 저울추가 분명히 한쪽으로 크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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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판단, 그리고 남겨진 책임과 성찰


그래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사안을 두고 왜 계속 “옹호냐, 비난이냐”라는 입장 표명이 나오고 있을까. 나아가 왜 이것이 “진보(옹호) VS 보수(비난)”라는 정치 구도까지 확장되어야 할까. 이 프레임이야말로 가장 불편하다. 사건의 본질은 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의 평가인데, 이를 진영 대립의 말싸움 소재로 소비해 버리면 정작 연예 산업이 져야 할 책임, 범죄에 대한 사회적 수용 범위 같은 중요한 질문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특히 이 사안을 ‘한쪽 진영의 공격’으로 치환해 버리는 순간, 사안의 실체는 다시 흐려진다.

결국 이 문제는 진보 대 보수의 대립 구도가 아니다. 옹호냐 비난이냐, 그 이분법 안에만 판단을 가두는 것 역시 맞지 않다. 그냥 연예인이라는 껍데기를 잠시 치워두고 생각해보자. 내가 호감을 갖고 지내던 지인이, 수십 년 전 결코 용인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치자. 누군가는 그 지인을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등을 돌릴 것이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현재의 모습과 과거를 분리해서 보려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여전히 혼란을 겪으며 갈등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대다수는 이 사건 앞에서 그 ‘지인’을 알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판단은 각자가 내릴 수밖에 없다. 다만 그 판단을 굳이 “옹호냐, 비난이냐”라는 이분법적 입장 표명 경쟁 속으로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 각자의 기준으로, 지인을 대하듯 내리는 판단들이 모이면 거대한 ‘대중의 판단’이 된다. 그 판단의 결과를 감당해야 할 책임은 조진웅 본인이 피할수 없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그 이미지를 상품으로 소비해 온 연예 산업도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태를 둘러싼 마지막 질문은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서로에게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일이 아니라, 대중 각자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을 거울 삼아 연예 산업 역시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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