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시네필전주 기획상영전 "가족의 탄생: 다양한 가족 공동체의 초상"
집에서는 사회적인 페르소나를 벗어 던진 채 자신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가족 구성원들과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을 공유하며 타인의 다양한 면모들을 알아간다. 공동생활에서 마찰은 불가피하지만, 갈등을 통해 타인과 자기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자연스레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각자의 행복을 기원한다. 가족에게서 오는 정서적 지지는 불완전한 개인이 인생의 굴곡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현 한국 사회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동거, 패치워크 가족 등 혈연과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는 대안 가족은 이러한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감독 장 마크 발레에게 가족은 중요한 화두다. 그의 출세작 <크.레.이.지.>(2005)는 다섯 형제 가족의 불협화음 속 한 소년의 성장기이며, <카페 드 플로르>(2011)는 60년대 파리의 다운증후군 아들에 대한 모성애와 현대 퀘벡에서의 배우자의 실연을 연결 짓는다. <데몰리션>(2015)의 직전 연출작 <와일드>(2014)에서는 자기 삶의 전부였던 엄마를 잃은 한 여성이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극한의 하이킹을 떠난다.
<데몰리션>은 <와일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인 아내의 죽음이라는 가족의 상실을 테마로 하지만 정반대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은 엄마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암으로 인한 엄마의 사망 이후 무너지고 만다. 이에 반해 <데몰리션>의 데이비스는 교통사고로 인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으며, 장례식 다음 날에도 평소와 같은 시각에 기상하고 출근하며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외면과는 달리, 사실 데이비스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와일드>의 셰릴이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 것처럼, <데몰리션>의 주인공 또한 자신의 인생에서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아내와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감정적 고아의 일탈: 세계를 해체하기
병원에서 졸고 있던 데이비스는 아내 줄리아가 죽었다는 장인의 말을 듣고 깨어난다. 그는 그녀가 떠나버린 빈 병상을 공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병실을 나선 데이비스는 구두에 묻은 피를 천연스럽게 닦아내고, 병원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으려 한다. 자판기가 초콜릿을 내주지 않자, 이제 막 사별한 사람답지 않게 병원 직원에게 자판기 오작동에 대해 항의한다. 직원은 무심한 태도로 자판기 회사에 직접 연락하라고 한다. 아내의 장례식 후 친지들이 모인 자리, 데이비스는 슬픔으로 얼룩진 다른 사람의 얼굴과 상반되는 벙찐 표정으로 일관한다. 화장실에서 슬픈 표정을 억지로 지어내 보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 자판기 회사에 불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엉뚱하게도 편지에 아내와의 사별을 비롯한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나간다.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한 뉴욕의 투자 분석가 데이비스.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같았지만, 그에게는 친밀함을 공유할 상대가 없었다. 데이비스는 결혼 후 장인의 투자회사에서 일하며 아내의 상류층 세계에 편입했고,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장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사회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은 결혼 생활에서 그는 완전히 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무심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데이비스의 결혼은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친부모와의 관계는 어떨까? 위로차 데이비스를 찾은 친부모는 집에 와서 며칠 쉬고 갈 것을 제안하지만, 그는 헛웃음으로 응대한다. 마음의 위안을 찾기에 그는 친부모로부터 너무도 멀어졌다. 그는 누구와도 정서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감정적 고아이며, 뿌리 잃은 영혼이다.
아내와 왜 결혼했냐는 질문에 “모르겠어요. 쉬워서요?”라고 답하는 데이비스에게 결혼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 없이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정돈된 일상에 길들어진 채 성찰적인 질문들을 회피했고,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억압했다. 처음에는 중요성을 간과했을 성찰의 부재로 인해, 데이비스는 자신의 감정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가 자판기 회사에 보내는 불만 편지에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적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삶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후 데이비스는 무심한 눈으로 마주했던 세계를 낯설게 감각하기 시작하고, 충동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라는 장인의 충고에 따라,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분해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이를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긴다. 물이 새는 냉장고, 삐걱대는 회사 화장실, 오류 신호를 보내는 사무실 컴퓨터 등을 낱낱이 분해하는 데에 몰두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듯 회사 상식에 어긋나는 무례한 행동을 한다. 이러한 일련의 파괴적인 일탈과 해체 행위는 자신의 문제를 파악한 후 삶을 재구성하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다.
우리는 당장의 감정적 혼란을 무시하거나 유예하기 위해 다른 문제에 집착하기도 한다. 데이비스가 사소한 것들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이유는 아내의 죽음을 망각하고, 상실로 인한 공허함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영화에는 데이비스의 정신적인 이미지로서 아내의 이미지가 종종 짧게 등장하는데, 그는 이때마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애쓴다. 철거 현장에서 집을 부수는 데이비스의 행위와 아내와 관련된 이미지가 교차하는 몽타주는, 그가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해체하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상실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가 부재한 세계를 망치질로 채운다. 급기야 이해할 수 없는 결혼 생활을 파탄 낸다는 명목으로 아내와 함께 살던 집을 때려 부순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은 관객의 감정적 동일시의 대상이지만, 데이비스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 비정한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관점으로 이끌어가는 연대기적 서사, 그가 쓴 편지의 내레이션으로 구성되는 몽타주와 그의 정신적 이미지를 통해 극은 데이비스에게 밀착해 진행되지만, 관객은 그에게 친밀함을 느끼지 못한다. 데이비스가 자기 삶을 분석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영화는 관객이 거리를 두고 그를 관찰하며 분석하게끔 한다.
원가족외 정서적 유대 관계를 통한 감정 회복
원가족에게서조차 감정적인 위로를 받지 못했던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 직원 캐럴을 만나 정서적 교류를 시작한다. 캐럴은 늦은 밤에 데이비스에게 전화를 걸어, 편지를 보고 울었다고 이야기할 사람은 있냐고 묻는다. 그는 지금까지 사회적인 페르소나 뒤에 숨기고 있었던 자신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캐런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캐럴 또한 데이비스의 솔직한 모습에 연민과 친밀감을 느낀다. 둘은 일련의 숨바꼭질 끝에 서로를 만나게 되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진솔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장인은 비정상적인 데이비스의 행동에 잠시 일을 쉴 것을 권고하고, 그는 그녀의 집에 머물며 아들 크리스와도 교류하기 시작한다.
데이비스의 장인이 대표하는 세계가 질서 속에서 경직된 위계적인 사회라면, 캐런의 세계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고 비균질하다.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회사 사장과 연애를 지속하고, 마리화나를 끊지 못하며, 학교에서 정학 당한 사춘기 아들 크리스와의 불화를 해결하지 못한다. 캐럴이 처음으로 데이비스의 집을 찾아간 날, 그녀는 차 문에 끼어버린 옷을 빼다가 갑자기 작동한 스프링클러에 온몸이 젖은 채 등장한다. 그녀는 완벽에서 거리가 먼, 흠이 많고 취약한 사람이다. 데이비스는 번지르르할 뿐인 자기 집이 싫다고 말하고, 캐런은 다소 난잡한 그녀의 집에 그를 초대한다. 데이비스는 혼돈과 다양성을 포용하는 캐런의 세계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격식을 차리는 장인의 세계에서 데이비스가 비지니스맨 옷차림으로 타인들과 동일화되었다면, 캐런의 세계에서는 자신만의 개성을 찾아간다.
영화는 데이비스의 행동을 ‘비정상적’이라고 여겼던 장인의 시선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를 수용하는 캐런의 시선으로 전환한다. 데이비스의 충동적인 행동과 파괴적인 욕구는 어쩌면 그만의 고유한 개성일 수도 있다. 데이비드와 정서적 유대 관계를 구축하는 캐런의 아들 크리스는 그의 파괴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하나의 취향으로 인정하며, 그에게 건물 폭파 장면을 선물한다.
데이비스는 캐런과 시간을 보내며 잃어버렸던 감정을 서서히 회복한다. 캐런과 함께 바다를 마주한 순간, 그는 줄리아가 바다를 참 좋아했었다며 처음으로 아내 이야기를 먼저 입에 올린다. 이후 등장하는 데이비스의 기억 속 줄리아의 이미지는 영화 초반의 파편적인 이미지보다 길게 지속된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 샤워를 마친 데이비스가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아내의 환영이 보이고, 데이비스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끓어 오르는 눈물을 참는다. 공허했던 데이비스의 눈빛에 인간적인 감정이 감돌기 시작한다.
데이비스가 캐런에게서 얻은 정서적 지지를 그녀의 아들 크리스에게 제공할 때, 그는 감정적으로 가장 충만해진다. 이제까지 자신의 문제에만 열중해왔던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로, 데이비스는 크리스가 정학을 당한 이유를 물으며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 사춘기 시절에 가질 수 있는 폭력적인 충동을 인정하며, 총을 갖고 노는 크리스를 단념하기보다는 함께 총을 쏘러 간다. 그는 약간은 독특한 ‘돌봄’ 행위를 통해, 어른과의 유대 관계에 대한 크리스의 결핍을 채워준다. 크리스는 또한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는 일반적인 어른과 달리 솔직하고 자유로운 데이비스에게 천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데이비스와 캐런, 크리스가 하나의 가족과도 같은 관계를 형성한다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편견 없이 수용하고 정서적 연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생각과 취향을 공유하며 상호적 돌봄 관계를 형성하고, 이는 그들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수용하는 토대가 된다. 캐런은 데이비스와의 교류를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아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크리스와 틀어져 버린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크리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예쁘게 꾸민 채 파티에 간다. 크리스는 그를 비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린치를 당하지만,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좋다”고 말한다. 데이비스 또한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동력을 얻는다.
유년 시절로의 회귀와 애도
데이비스는 캐런, 크리스와의 관계를 통해 잃어버렸던 유년 시절을 돌이키기 시작한다. 캐런에게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어렸을 적 자신이 남들보다 빨리 달리는 것을 가장 절실히 원했었다는 것도 회상한다. 모두가 앞을 향해 걸어가는 뉴욕의 시가지에서 데이비스가 뒤로 걷는 장면은, 그가 자아를 찾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데이비스의 인간적인 감정의 원천은 부모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았던 어린 시절에 있다. 아내가 데이비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세지는 “바쁜 척 하지 말고 나를 고쳐주세요”라고 적힌, 고장 난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이다. 이는 소원해진 부부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하는 줄리아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 줄리아는 데이비스에게 냉장고를 수리를 부탁하며 ‘당신 아버지에게 받은 연장으로 고쳐달라’고 한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버지가 준 연장,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열쇠, 그것은 사랑이다.
데이비스는 정서적 연대 관계를 통해 형성된 감정적 기반을 토대로 마침내 아내를 진심으로 애도하게 된다. 그는 집을 파괴하다가 발견한 초음파 사진을 통해 아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내가 타인에게서 사랑을 찾을 만큼 자신이 소홀했다는 것, 교통사고 직전 아내의 운전 부주의가 자신의 무심함에 대한 원망의 시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인정하며,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던 죄책감을 받아들인다. 그는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아내의 묘를 찾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리고 파괴된 집을 복구한다.
데이비스가 크리스에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며 감정적으로 더욱 충만해졌듯, 받은 사랑으로 타인에게 보답할 때 사랑은 증폭된다. 장인은 줄리아의 보험금으로 그녀의 이름을 딴 장학 재단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지만, 데이비스는 수리 비용이 너무 비싸 버려질 운명에 처한 (데이비스의 부부 관계를 상징하는 듯한) 회전목마 수리를 부탁한다. 데이비스는 폐쇄적인 기득권, 엘리트주의 사회를 공고히 하기보다, 사회적 환원의 범위를 확대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편적 친밀감의 추억을 선사하며 아내를 애도한다.
영화 <데몰리션>은 한 장르에 천착하지 않는 비균질한 성장 드라마다. 영화는 두 남녀의 만남을 로맨스처럼 담아내며, 사춘기 소년과 함께하는 순간들은 가족 영화를 연상케 하고, 캐런과의 숨바꼭질, 그리고 데이비스를 미행하는 정체모를 차량에 대해서는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는 복합적인 영화 안에서 감독 장 마크 발레는 기존에 명명된 질서 너머에 있는 것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에는 분류할 수 없는 고유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희한한 데이비스의 복장, 타인의 눈에는 종종 연인으로 오해 받지만 로맨스로 귀결되지 않는 캐런과 데이비스의 관계가 그렇다. 데이비스와 캐런, 그리고 크리스의 관계 또한 쉽게 정의되거나 분류될 수 없는,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유한 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2022 시네마테크 시네필전주 기획상영전 <가족의 탄생 : 다양한 가족의 공동체의 초상> 비평집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