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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Mar 25. 2018

[영화 리뷰] 쓰리 빌보드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감독    마틴 맥도나 

출연    프란시스 맥도맨드, 샘 록웰, 우디 해럴슨 

개봉일  2018.03.15. 


 

*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일곱 달 전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딸 안젤라의 범인은커녕 단서하나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경찰을 도발하기 위해 미주리주 에빙 외곽의 허름한 세 개의 광고판에 광고를 싣는다.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는데’, ‘아직 못 잡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윌러비 소장?’ 

경찰 소장(우디 해럴슨)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밀드레드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밀드레드라는 사람에 집중하고 굳이 그런 광고를 실어야 했나, 그녀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윌러비 소장은 마을에서 존경받는 경찰인데다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기에 밀드레드의 행동은 윌러비를 망신 주기 위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밀드레드는 마을 사람들의 공격을 받는다. 특히 인종 차별주의자에다가 알콜 중독 경찰관 딕슨(샘 록웰)은 그녀의 주변인들까지 괴롭히고 사건은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딸을 잃은 엄마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나간다. 


 


적은 누구인가? 

밀드레드가 광고를 낸 것은 “싸우자!”의 의미가 아니라, 부디 사람들이 자신의 딸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잊지 않고, 경찰들이 범죄자를 잡아들여 그에게 죗값을 치르도록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도 경찰과 밀드레드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 경찰 서장 윌러비는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서 수사에 임하고 있다 말하며 광고를 내려 줄 것을 요구하는데 밀드레드는 그가 말하는 최선을 믿지 않는다. 영화는 경찰의 수사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애초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람 좋은 윌러비 소장은 광고판에 자신의 이름이 박혀있다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지만 작은 시골마을 경찰들에게서는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어 보인다. 착잡한 마음으로 경찰서로 복귀한 윌러비는 그제 서야 안젤라 사건 파일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렇다면 다른 경찰들은 어떠한가?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딕슨은 안젤라 사건에는 관심도 없고 어떻게 하면 밀드레드가 광고를 내릴 지에만 급급하다.  


광고판 아래를 마치 묘비처럼 가꾸는 밀드레드


본질을 비껴가는 여론 

자신을 취재하러 온 지방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밀드레드는 “제발 우리 딸을 죽인 범인을 잡아 주세요!”하며 눈물 짓지 않고 당당하게 거친 언어로 경찰의 무능을 공격하는데 그녀의 이런 태도는 사람들의 연민과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감을 일으킨다.   

그녀의 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밀드레드의 행동에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그런다고 죽은 딸이 돌아오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고뭉치 경찰 딕슨마저 윌러비의 말이라고 하면 귀 기울여 들을 만큼 윌러비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거기다 다정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딸까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보이는 삶이지만 그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암 환자다. 

기침을 하다가 피를 토한 윌러비. 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대신 가족들과 행복한 피크닉을 즐기고 가족들이 잠든 사이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다. 윌러비의 죽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밀드레드를 원망하게 만든다. 마치 그녀의 광고판 때문에 윌러비가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메시지에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메신져의 표현방식에 거부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고 메신져의 의도를 곡해 하는데 이는 비단 영화 속 밀드레드의 경우뿐만이 아닐 것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늘 조금은 불량해 보이는 밀드레드의 표정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윌러비의 죽음을 알고 분노한 딕슨, 그의 슬픔은 엉뚱한 대상에게 분노로 폭발해버린다. 그는 곧장 밀드레드의 광고를 실어준 광고판 관리업자 레드를 찾아가 그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고는 창밖으로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딕슨의 과격한 폭력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 일로 딕슨은 해고된다. 


누군가의 방화로(딕슨의 짓으로 짐작되지만) 광고판이 불타버리고 딕슨의 폭행으로 레드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밀드레드는 늦은 밤, 경찰서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경찰서에 불을 지른다. 내 딸을 강간하고 죽인 범인을 찾으라고 건 시비가 방화로 이어진 것이다. 어딘가 살아있을 강간치사범을 두고 피해자 가족과 경찰 간의 싸움이라니!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경찰서에는 딕슨이 있었다. 자신에게 남긴 윌러비의 편지를 찾으러 경찰서를 찾은 딕슨은 귀에 꽂은 이어폰의 음악소리에 자신의 등 뒤로 화염병이 던져진 것을 몰랐던 것이다. 딕슨은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서 자신이 두들겨 팬 레드를 다시 만나고 그의 용서에 감동받는다. 자신보다 더 약한 대상들을 괴롭히고 살았던 딕슨. ‘난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너는 좋은 경찰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라고 말하는 윌러비의 편지와 레드의 용서는 그의 인생을 바꿔버린다. 


밀드레드의 전남편 찰리는 그녀에게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을 뿐이라고 말하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폭력남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이혼사유가 찰리의 폭력적인 성향 때문인지, 찰리가 열아홉 살의 어린 여자와 바람이 나서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자식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좋아 보이는 그가 유독 밀드레드에게만 폭력적이었던 이유를 감독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치과의사의 손가락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자신의 차에 음료수 캔을 던진 고등학생의 가랑이를 차버리고, 급기야는 경찰서에 불까지 지르는 밀드레드를 보면서 그녀의 과거, 살아온 인생이 ‘덤빌테면 덤벼봐라. 나는 각오가 되어있다.’ 하는 그녀의 현재에 영향을 주지 않았겠나 짐작할 뿐이다. 


어째서 찰리의 폭력은 밀드레드만 향하는 걸까?

나에게 단죄의 권리가 있는가? 

퇴원 후 혼자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딕슨은 뒷자리에 앉은 남자가 무용담을 얘기하듯 자랑스럽게 여자를 강간하고 불태워 죽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그가 안젤라 사건의 범인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의 DNA는 안젤라를 죽인 범인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딕슨은 그가 안젤라를 죽이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수법으로 여자를 죽인 범죄자임에는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밀드레드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안다고 당신이 (그를 죽이러)가겠다면 함께 가겠다고 한다. 영화 초반, 당신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갱단과 같은 무리라면 당신도 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밀드레드의 말과 대구를 이룬다. 

 

한때 적이었던 둘은 동지가 되어 함께 길을 나선다. 그들은 어쩌면 또 다른 강간치사범일지도 모르는 남자를 단죄할까? 그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일까? 둘의 눈빛에 단죄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서로를 보는 눈빛에는 연대의 위로가 묻어있다.  


경찰 놈들 맛 좀 봐라!


추신. 

무거운 주제의식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폭력과 시니컬한 유머에 잠식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운 영화였다. 이는 진작부터 각본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마틴 맥도나 감독의 훌륭한 시나리오와 이 영화로 두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맥도맨드의 섬세하고 폭발적인 연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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