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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Mar 29. 2018

[영화 리뷰]데어 윌 비 블러드

채울수록 공허한 욕망의 그림자

채울수록 공허한 욕망의 그림자.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2007년작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 폴 다노 


*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욕망의 적정선은 어디까지 일까? 하나를 가지면 둘을 원하고, 둘을 가지면 셋을 원하는, 가질수록 커지고, 채울수록 공허한 욕망의 그림자를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1898년. 한 남자가 땅을 파고 들어가 금을 채굴하는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십 분이 넘어가도록 대사 한마디 없이 카메라는 그의 노동을 인내심 있게 비춘다. 모래바람이 부는 메마른 땅. 조력자 하나 없이 홀로 일하는 남자는 작업을 하다가 다리를 크게 다치고 그는 거친 바닥을 기어서 금 인증을 받으러 간다. 그의 이름은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 관객은 앞으로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동안 이 집념의 인간에 대한 욕망의 연대기를 보게 된다.  

 

1901년. 골드 러쉬는 끝이 나고 석유의 쓰임이 다양해지면서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인 남자들은 일확천금을 노리며 석유 채굴을 위해 땅을 파기 시작한다. 기술도 자본도 부족한 이들에게 석유 채굴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다니엘은 동료를 잃고 그의 아들을 입양해 키운다.  

 

1911년. 석유 채굴 업자로 자리를 잡은 다니엘은 양아들 HW와 함께 미국 전역을 돌며 석유가 있을법한 땅들을 사들여 석유 채굴 사업을 하는데, 어느 날 폴 선데이(폴 다노)라는 청년이 찾아와 자신의 목장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말을 하며 돈을 요구한다. 반신반의하며 폴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가 말한 목장을 찾은 다니엘 부자는 폴의 말은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근의 땅을 모두 사들인 후 석유 시추 작업을 시작한다. 이 일은 다니엘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지만 부를 향한 다니엘의 욕망은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자신을 '패밀리 맨'이라고 소개하는 다니엘


데어 윌 비 블러드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구약성서 출애굽기 7장 19절의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영화의 제목이 있다.  

“피가 되리니.” 저주의 문장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피로 변한 물을 사람들은 마실 수도 농사를 지을 수도 없으니 재앙이 아닐 수 없다.  


폴 선데이의 목장을 찾아간 다니엘은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폐한 땅을 마주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가난은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땅 밑에 석유가 발견되고 무가치 했던 땅을 사려는 사람(다니엘)이 나타났다. 그가 제시하는 금액은 자신들이 살면서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지 못했을 만큼 큰돈이다. 하지만 이 큰돈은 다니엘이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손톱의 때만큼도 아니다. 다니엘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석유 채굴에 성공하면 학교도 짓고 도로도 내고 마을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고 공수표를 던진다. 마을주민들에게는 달콤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다니엘의 사업방식을 욕 할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에 석유가 매장 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한들 채굴할 수 있는 기술이 없다면 석유는 무용지물이 아니던가. 발품을 팔아 부지런히 일한 자신이 목숨을 내 걸고 축적한 기술을 가지고 채굴권을 따내 주민들에게 땅값을 지불하면 된 거 아닌가?  

그렇다면 그가 지불한 땅값은 충분한가? 주민들에게 다니엘의 제안은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이룩한 부를 알게 되었을 때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가지고 싶은 것, 가질 수 있는 것, 가질 수 있었는데 못 가진 것.  

사람들은 이 욕망들과 늘 싸운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어떨까? 그는 자신의 방식에 당당할까? 영화 속에서 그는 당당하다 못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비용을 덜 지불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가스 유출 사고로 석유 채굴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나게 되고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보면서 다니엘의 눈빛은 “모두 다 내거다! 나 말고는 아무도 못 가져!”라고 말하며 타오르는 불만큼이나 욕망으로 이글거린다.  

돈을 위해서라면...

욕망에는 철칙이 없다 


폴의 목장을 사기 위해 선데이 일가를 찾은 다니엘은 폴의 쌍둥이 형제 일라이 선데이(폴 다노)를 만난다.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은 그는 어리숙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당돌하게 다니엘과 땅값을 흥정하고, 교회에 투자할 것을 요구하기 까지 한다.  

일라이는 ‘제3계시교’라 불리는 일종의 사이비 기독교의 목사로 신도들은 그를 신의 선택을 받은 선지자로 여긴다. 사람들의 약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공략하는 그의 예배는 광적이다. 그에게 종교는 부와 명예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다니엘은 일찌감치 간파한다. 일라이의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은 헐값에 목장을 팔아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통해서 다니엘에게 돈을 구걸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사업의 확장을 위해 땅을 더 사들여야 했던 다니엘은 교회에 나와야만 땅을 팔겠다는 땅주인의 말에 일라이 앞에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고, 대공황으로 빈털터리가 된 일라이는 신을 부정해야만 돈을 주겠다는 다니엘의 지시에 자신은 가짜 선지자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돈을 구걸한다. 이들의 욕망에는 경계도 철칙도 없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무신론자 다니엘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래봤자 결국 실망밖에 남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신의 이복동생이라 말하는 헨리라는 남자가 나타났을 때 그는 헨리를 경계하면서도 혈육 밖에 믿을 게 없다며 그를 사업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하고 사고로 농아가 된 HW를 농아학교로 보내버린다. 헨리가 진짜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 그의 분노는 헨리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버릴 만큼 극에 달한다. 양심의 가책은 없다. 헨리의 변명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눈에 헨리는 자신의 성공을 가로채러온 도둑에 불과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다니엘은 거대한 저택에 혼자 살면서 외로움에 미쳐간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술에 취해 자신의 세운 제국의 왕이자 유일한 백성으로 살아간다. 여기에는 ‘다니엘의 것을 탐내는 자, 벌할지니.’라는 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두다 내꺼야!


늪처럼 천천히  


애초에 다니엘은 혼자였다. 사업 홍보를 다닐 때 자신을 ‘패밀리 맨’이라 지칭했지만 그는 결혼을 하지도 않았고 누구와도 자신의 것을 나누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대지를 피로 물들인 신의 저주처럼 스스로를 재앙으로 몰고 간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다니엘 플레인뷰의 일대기를 보여주는데 있어 그의 내면의 콤플렉스와 욕망을 관객들에게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현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롱샷과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거리를 두게 하면서도 늪처럼 천천히 그리고 강력하게 관객의 몰입을 빨아들이는데 나중에는 다니엘이라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생길 정도다. 그럼에도 결말에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패서 죽여 놓고 “다 끝냈네.”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 시종일관 묵직하고 어두운 음악이 나오던 영화는 충격적인 장면과 함께 경쾌한 음악으로 마무리 되는데 이는 지금까지 관객이 본 것은 하나의 코메디 극이라고 말하는 것 같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쉽게 무너지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경고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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