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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Dec 13. 2018

진짜 배움은 학교가 아니라 거리에 있다.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 1959.

400번의 구타  Les 400 coups

감독     프랑수와 트뤼포

출연      장 피에르 레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삶은 단절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분명 나 또한 십대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인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내게 지금의 십대는 마치 나와는 다른 세계의 속한 미지의 존재처럼 낯설기만 하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 말고 그들과 나 사이엔 어떤 교집합이 있을까? 학교에서 사회로, 부모에서 홀로, 내가 속하는 집단, 사회가 변화할 때마다 과거와 현재는 디졸브 되었다가 과거의 나는 서서히 잊히고 마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실의 매듭처럼 단절 아닌 단절을 불러온다. ‘세대 차이’라는 말은 ‘요즘 애들’과 ‘꼰대’ 사이의 매듭이 아닐까? 그때 우리가 느꼈던 혼란과 방황을 지금의 우리는 ‘그래도 우리 때는 말야...’하고 선을 그으며 불통과 반목을 가중시키고, 한때 ‘나’이기도 했던 ‘그들’을 통제와 억압으로 고립시키고 있다.

‘400번의 매질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라는 프랑스 속담에서 제목을 따온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의 데뷔작 <400번의 구타>는 앙투완 드와넬(장 피에르 레오)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의 유년시절이 투영된 앙투완은 소위 문제아로 학교가 요구하는 규범과 질서에서 한참 비켜나 있지만 그가 정말 어른들이 말하는 것만큼 구제불능인가에 대해, 그리고 그를 다루는 어른들의 불합리한, 시대를 불문하고 반복되는, 태도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앙투완은 엄마, 새아버지와 함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부모는 앙투완에게 무관심하고, 학교에서는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수업 시간 중 사진을 돌려보다 하필이면 앙투완이 걸린 것이다.) 문제아로 찍혀 벌을 서기 일쑤다. 낙이 있다면 친구 르네와 함께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인데,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내뱉은 그의 작은 거짓말들은 무관심한 어른들의 불신을 부르고 결국 감화원으로 까지 그를 몰고 간다.  

앙투완이 속한 세상은 크게 집, 학교, 거리,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집과 학교가 자유로운 거리와 대비되어 보여 지지만 거리에서 제 인생을 찾기엔 아직 앙투완은 너무 어리다. 맞벌이 부부인 앙투완의 부모는 각박한 생활 때문에 아들에게 무심한 것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애정 자체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평일에는 일 때문에, 주말에는 각자의 취미생활을 하느라 그들은 앙투완을 혼자 둔다.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할 틈도 없이 난로를 데우고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을 세팅하는 것이 방과 후 앙투완의 루틴이다. 식사가 끝나면 식기를 정리하고, 자기 전에 쓰레기를 버리고 와서 제 방 침대가 아니라 현관 바로 앞 간이침대 위 침낭 안에서 잠을 자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아들이 아니라 머슴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앙투완은 지금의 아빠가 친 아빠가 아니라는 것, 미혼모였던 엄마가 자신을 원치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내색하지 않고, 불평불만 없이 집에서의 제 역할을 충실히 행한다. 

앙투완은 반항적인 소년이 아니다. 모범생이 아닐 뿐, 놀기를 좋아하고, 곤란한 상황이 생겼을 때 거짓말로 회피하려하는, 철없는 십대일 뿐이지만 문제아로 이미 낙인이 찍힌 그의 학교생활은 순탄치가 않다. <400번의 구타>에서 그려진 학교의 모습(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학교가 정해 놓은 규범이라는 것이 집단이 아닌 개개인에 대입했을 때,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 것인지 감독은 말하고 있다.)은 불합리한 권위의 상징으로 그 속에서 선생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윽박과 체벌로 일관하는 프랑스어 선생, 학교 주변을 조깅하는 체육시간에 학생들이 도망가도 눈치 채지 못하는 체육 선생, 학생의 말대답에 말을 더듬는 영어 선생까지. 소년들의 눈에 비친 이들은 권위만 내세우는 위선적인 기성세대인 것이다. 학교는 부모에게, 부모는 학교에게 책임을 미루고, 감화원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내린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에게 충분한 기회를 줬어.’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학교에서보다 거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는 감독의 말처럼, 앙투완 역시 자유로운 거리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특히 극장에서의 시간은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영화라는 환상의 도피처를 제공해주는데, 앙투완의 가족이 유일하게 화목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도 함께 극장 나들이를 할 때다. 아름다운 파리 풍경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나가고 거기에 낭만적인 음악이 더해져 거리의 낭만은 극대화된다. 학교와 집이 앙투완에게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듯, 거리는 위험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거친 공간이 아니라 그에게 자유를 주는 공간이다. 앙투완은 절친한 친구 르네에게 집과 학교에서 벗어나 제 인생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지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독립된 인생을 살기에 그는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 

뱅글뱅글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 놀이 기구를 탄 앙투완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그의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제 형체를 잃고 점점 흐릿해진다. 마치 이 회전 놀이 기구처럼, ‘사춘기’라는 인생의 특정한 시기는 그 속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 서로의 모습을 왜곡해서 보게 만든다. 


일련의 과정들을 지나며 현실을 받아들이는 앙투완의 모습을 영화는 비교적 가볍게 그리고 있다. 지금 아빠가 친 아빠가 아니고, 시내에서 엄마가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는 것을 본 것에 대해서도 앙투완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거짓말을 자주 하느냐는 상담사의 질문에 앙투완은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진실을 말할 때도 있지만 진실을 말해봤자 믿지를 않으니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고 대답하는데, 어른들이 자신을 거짓말쟁이 취급하면 그럼 거짓말쟁이가 되지 뭐. 이런 식인 거다. 그의 이런 솔직한 태도들이 영화의 톤을 무겁지 않고 유쾌하게 끌고 가지만, 그가 감화원을 탈출해 아무도 없는 바다를 향해 달리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게 관객의 가슴을 내려친다. 그의 인생은 이제 시작인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벽에 다다른 것일까? 

앙투완을 연기한 장 피에르 레오의 연기는 이 영화가 그의 첫 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영화인 부모를 둔 덕분에 영화촬영 현장이 익숙했을 수도 있지만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어린 배우의 카리스마와 자연스러움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후 그는 60-70년대 대부분의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와 트뤼포의 영화에 출연하며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 잡았고, 특히 트뤼포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그가 연기한 여러 앙투완 드와넬은 프랑스 영화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일종의 상징적인 남자 캐릭터가 되었다.

주제의식, 스타일, 시대, 삼박자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400번의 구타>는 프랑스 평론계의 문제아 프랑수와 트뤼포를 단숨에 스타 감독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이 영화는 가장 위대한 데뷔작 중 하나일 것이며,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함께 프랑스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영화로 (대부분의 누벨바그 영화가 그러하듯) 로케이션 촬영과 카메라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이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이미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실제로 그의 엄마는 미혼모였으며, 그는 평생 친 아버지를 모르고 살았다. 감화원을 들락날락거렸고,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영화 써클을 조직해 운영하다가 그가 정신적 아버지라 부르는 앙드레 바쟁을 만나 (그는 이 영화를 앙드레 바쟁에게 헌사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영화 평론의 길에 뛰어 들게 된 것이다. 에너지 넘치고 공격적이었던 그의 글은 기성 영화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고, 그로 인해 적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로 프랑스 영화의 대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소년은 자라서 영화감독이 되고, 자신이 만든 작품들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프랑스 파리엔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과 도서관이 있다.) 어른들은 통제가 어렵다며 그를 문제아로 낙인찍었지만 굴복하지 않고 제 인생을 살아낸 것처럼, 앙투완 역시 아무도 없는 바다에서 마주한 것이 벽이 아닌 진정한 인생의 시작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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