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욕망이 금기였던 시대
면사포를 쓴 어린 신부(캐서린)는 제 결혼식에 집중하지 못하고 옆에 선 자신의 남편(알렉산더)이 신기한 듯 자꾸만 쳐다본다. 아마도 그녀는 오늘, 그를 처음 보았으리라. 화면 가득 산만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뒤로는 늙은 남자(보리스)와 흑인 여자(안나)가 좌/우 대칭을 이루며 서 있다.
19세기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므젠스크군의 맥베스 부인]을 원작으로 한 2016년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첫 장면이다. 겨우 30초인데다가 여자 주인공의 얼굴만 클로즈업으로 보이지만 이 결혼식이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식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진다.
어린 신부 캐서린은 돈 많은 지주, 레스터가문에 시집을 왔다. 나중에 대사에서도 나오듯이 팔려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해 의기소침해 하기는커녕 어떤 일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날밤을 맞이하기 전, 캐서린의 시중을 드는 흑인 하녀 안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새 신부에게 긴장 되냐고 묻지만 정작 새 신부는 덤덤하다. 그날 안나는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새신부가 귀여워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첫날밤을 맞을 준비가 끝나고 남편이 방으로 들어온다. 캐서린보다 나이가 갑절은 되 보이는 남편 알렉산더가 그녀에게 추우니 집에서만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자 그녀는 바람 쐬는 것이 좋다, 당돌하게 얘기하는데 알렉산더는 잠옷을 벗어라!는 명령으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린다. 수줍어하지 않는 새 신부에게 네 주제를 알아라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당황한 캐서린에게 다정한 눈길이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불을 끄고 자기 혼자 침대에 올라 잠에 드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살아온 나약한 그가 어떻게 아내와의 관계를 규정짓는지 보여준다.
거칠고 불규칙적인 실외의 바람소리와 대조를 이루는 고요한 실내의 시계 초침소리에 갇힌 캐서린은 홀로 그림처럼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저녁 식사자리에서도 사람들과 분리되어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외출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을 만지지 않는 남편이 잠자리에 오기까지 잠이 들어서도 안 된다. 남편이 출타를 해도 시아버지로부터 그가 어디에 갔는지 전해들을 뿐이고, 그녀에게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레스터 가문에서 그녀의 존재 이유는 대를 이를 또 다른 레스터를 임신하는 것이 유일하다.
아침이 되면 안나는 제 방문 열 듯 노크도 없이 캐서린의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이 장면은 철저한 감시와 제약 아래 놓인, 이 집안에서 캐서린의 위치를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다정하게 캐서린의 잠옷 단추를 잠그던 안나의 손길은 거친 빗질과, 코르셋 끈을 조이는 가학적인 손으로 변해가는데, 안나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괴로운 일이다.
안나는 영화 속에서 가장 잔인하게 무너지는 인물이다.
그녀는 권력자의 하수인이자 충실한 개로서 캐서린이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이를 집안의 최대 권력자, 보리스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첫날밤, 캐서린은 문 틈 아래로 누군가의 두 발이 문밖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을 눈치 채는데, 아마도 이것은 안나의 두 발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캐서린은 안나를 잠재적 적으로 인식했을 지도 모른다.) 캐서린이 집에서만 지내라는 권력자의 지시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 긴 산책을 하고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목욕을 돕는 안나의 손길에는 적대감이 묻어있다.
전날, 벌거벗겨진 채 자루에 담겨 남자 인부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자신을 보고도 설명을 들으려 거나 위로를 해줄 마음이 없어 보이는 캐서린에 대한 서운함,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에 대한 불안함의 표현이었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 캐서린의 등을 미는 안나의 모습은 마치 캐서린을 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 종일 잠에 취해 살던 캐서린은 새로 온 인부 세바스찬을 만나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겁도 없이 주인 마님의 방문을 두드리고, 마님이라는 호칭대신 이름을 부르는 그 남자는 캐서린의 눈빛에서 그녀의 욕망을 읽었기에 그토록 과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캐서린이 느낀 것이 사랑이건 쾌락이건 간에 세바스찬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없는 동안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런던에서 돌아온 보리스는 플뢰리 와인을 찾는다. 안나는 캐서린이 모두 마셔 버려서 없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없다. 그녀가 자신을 짖궂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 하는 안나에게 보리스는 동물처럼 행동하고 있다며 네 발로 기어나가라고 한다. 그때 안나는 인간으로서의 모욕감이 컸을까, 아니면 재밌다는 듯이 쳐다만 보고 있던 캐서린에 대한 원망이 컸을까?
마님과 머슴의 로맨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을 것이다. 다음날 보리스는 며느리의 내연남 세바스찬을 구타하고 창고에 가둬버린다. 이때 캐서린이 보이는 행동은 놀랍도록 과감한데, 자신은 부끄러울 게 없다며 당당하게 시아버지에게 열쇠를 요구하고, 세바스챤을 풀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아버지를 독살하기에 이른다. 식탁 너머 주방에서 보리스가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아침식사를 하는 캐서린의 모습에는 그 어떤 주저함이나 고민도 없다.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안나는 말을 잃는다. 죄책감이든 두려움이든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이다. 그런 안나에게 연민을 가지기는커녕 혹시 모르니 아침 준비는 다른 하녀에게 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캐서린. 그것은 목격자 안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캐서린을 바라보는 안나의 눈빛과 밀가루 반죽을 하는 손에서 캐서린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가 보이지만 말을 잃은 안나는 이제 캐서린을 고발할 수 없다.
“너와 살아서는 헤어질 생각이 없어. 나의 진심을 의심한다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남편이 돌아왔다. 자신의 침실에서 연인과 동침하던 그녀는 연인을 숨기고 남편을 맞는다. 남편은 그녀에게서 세바스찬을 떼어 놓으려 한다. 살기를 가지고 세바스찬을 공격하는 남편의 머리를 가격하는 캐서린은 자신의 충동적 폭력에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보리스의 시신을 몰래 땅에 묻고, 그가 타고 온 말에 총을 쏘고 숲에 버린 연인은 이제 공범자가 되었다. 말의 시신이 썩어가면서 그들의 관계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세바스찬은 그저 마님과 재미나 좀 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푹신한 침대에서 좋은 옷을 입고 안나가 서빙해주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았으리라.
보리스의 사생아 테디가 등장하면서 둘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다시 창고로 쫓겨난 세바스찬이 캐서린을 떠나려 하자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엄마처럼 따르던 테디도 망설임 없이 죽여 버린다. 생각으로 그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캐서린에게는 없다. 그녀의 공범자는 이제 그녀를 원망하기에 이른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그가 그들의 범죄를 만인 앞에서 고백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고 자신의 자리에 안나를 집어넣는다. 오, 가엾은 안나. 말을 잃은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
이제 캐서린 혼자 남았다. 모두들 떠나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뱃속의 아기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희대의 악녀로 기록될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많은 관객들은 그녀를 욕하기보다 응원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지켜봤을 것이다. 여성이 욕망을 가진다는 것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던 시대에 자신의 욕망을 따른 캐서린의 행동은 용기가 아니라 본능이다.
원작 소설과 영감을 주었다는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와는 다르게 영화 속 캐서린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영화의 각색이 개인적으로는 더 마음에 드는데 이러한 재해석은 원작이 나온지 160여년이 지난 오늘이기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캐서린의 욕망과 광기에 비해 영화는 극도로 차분하게 진행되는데, 마치 17세기 회화에 대사를 입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칫 잘못하면 산만하게 여러 가지를 뻗을 수 있는 이야기를 오로지 주인공에 집중하고 캐서린이라는 인물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하는 데는 각색과 연출 말고도 플로렌스 퓨의 강렬하고도 절제된 연기의 힘이 크다.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도 캐서린의 심리변화를 잘 전달한 그녀의 나이를 찾아보고 놀랬다. 이제 겨우 21살. 그녀의 통찰력 있는 캐릭터 분석과 놀라운 재능을 어서 빨리 다른 영화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