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의 세계가 갈망하는 순수
순수하고 예쁜 소녀는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 별다른 노력 없이,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녀는 원하는 것들을 가지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소녀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무결점의 소녀는 질투와 미움을 사게 되고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던 그 순간, 질투와 고통에 잡아 먹혀버린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집착은 끝이 없다고들 한다. 어느 시대에나 미에 대한 기형적인 집착이 있었다. 잘록한 허리를 위해 코르셋을 조이던 여자들은 호흡곤란과 장기가 변형되는 고통을 견뎌야 했고, 작은 발을 가지기 위해서 네 살부터 헝겊으로 발을 동여 맨 소녀들은 평생을 구부정한 자세로 종종거리며 걸어야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의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돈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몸매와 얼굴을 디자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는 자기 관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기 경쟁력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이것은 비단 연예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연구팀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발표했다. 아름다움이 곧 권력이라는 말도 괜한 말은 아니다. 미모는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 마술사의 주술처럼.
몽환적인 기계음들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어둡고 불편한 세계로 관객을 초대한다. 온몸에 피가 묻은 채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의 얼굴은 피 한 방울 묻지 않고 완벽하게 꾸며져 있다. 인형처럼 움직임이 없는 이 여자가 바로 제시다. 그녀 위로 터지는 플래시 소리는 마치, 최면을 거는 주술 같다. 제시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남자의 표정은 그녀를 욕망하는 것인지 그녀를 혐오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여자를 죽이고 예쁘게 꾸며서 사진을 찍는 변태 사이코패스인가? 아니다. 그는 제시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 준 아마츄어 사진작가 딘이다. 촬영이 끝나고 제시는 분장실에서 피 분장을 닦아 낸다.
이제 막 열여섯 살이 된 제시는 모델이 되기 위해 LA에 왔다. 미녀들이 넘쳐나는 이 곳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의 소녀가 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고향을 떠나온다. 고향에서는 절세미녀라는 말을 들었을지 몰라도 대도시에 가면 언제나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극단적인 피라미드. 꼭지점의 1%가 나머지 99%를 지배하는 그곳에서 제시의 운명은 자연스럽게 꼭지점을 향해간다.
영화는 패션계를 극도로 차갑고 인공적인 세상으로 그리고 있다. LA에 오자마자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게 된 제시는 신인 모델과 작업을 하지 않기로 알려진 유명 사진작가와 프로필 촬영을 하게 된다. 이때 관객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데, 하얀 배경 막 앞에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서 있는 모델부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 그 외 스텝들까지, 플래시는 계속해서 터지는데, 마네킹처럼 움직임이 없다. 내가 영화를 잘 따라가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 때 제시가 촬영장에 들어오고 그때서야 움직임이 없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가운 방안, 속옷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서 오디션을 기다리고 있다. 디자이너는 모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거절이 일상이 되어도 면전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제시가 디자이너 앞에 서자 그의 관심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한겨울 차가운 방안에 홀로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와 같은 제시의 모델로서의 성공은 이제 시간문제다. 너무 쉽다. 그녀는 그저 존재했을 뿐인데, 모델을 꿈꾸는 소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매일같이 새로운 아름다움이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세상에서는 스무 살만 되어도 퇴물 취급을 받는다. 오늘 찬양을 받다가 내일 버려지는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그 무엇도 할 준비가 되어있다.
미디어는 사람의 단점을 부각시키고, 객관화 되어 만나는 자신은 언제나, 어딘가가 부족하다.
탑 모델 지지는 자신의 성형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 누구도 제 외모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때 제시가 ‘나는 내 볼 살이 마음에 안 들어요. 혹은 입술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요.’와 같은 말 대신 ‘나는 내 외모가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한 것은 ‘넌 추하고, 난 아름다워.’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시는 사람의 욕망이 어떻게 기형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아직 모른다.
어느 날, 제시가 머물고 있는 모텔방을 침입한 암사자처럼, 제시는 위험한 존재가 되어간다.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협해서 위험한 것인지 그 위협이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위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암사자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동물이면서도 인가에서 발견되면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동물이듯이 제시 또한 사람들의 욕망(욕정이거나 질투거나)에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해 위험에 쳐한다.
집착은 광기를 낳고, 광기는 살인도 마다 않는다. 굶고 성형수술을 하고, 힘있는 자를 유혹하는 것은 애교 수준이다. 호수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반해서 익사했다는 신화 속 나르시스는 21세기에 와서 광기에 의해 물 없는 수영장에 떨어지고, 중세시대에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소녀들의 피를 마셨다는 백작부인처럼 제시를 욕망하고 제시의 아름다움을 욕망한 여인들에 의해 말 그대로 잡아먹힌다.
이 정도의 광기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이 결국엔 패션계에서 살아남는 다는 것으로 해석되어 섬뜩하다.
니콜라스 원딩 레픈 감독은 패션 광고 작업등을 진행하며 배우와 모델들이 자신의 미모로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고 고백하면서 아름다움이 가진 힘은 점점 커지고 절대 줄지 않는다고 했다. 인공적인 세상에서 연기가 일상인 디자이너는 타고난 미모만이 진짜 아름다움이고 가치라고 말하며 제시를 가리킨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제시는 자신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이제 실감이 나려고 한다. 인간미라고는 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자연미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루비가 시체의 얼굴을 치장하고 아무도 없는 고전적인 저택에서 사는 것은 어쩌면 이미 죽은 것, 진짜가 아닌것들로 채워진 패션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변형을 반복하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매일같이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