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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Feb 26. 2017

[영화 리뷰] 그을린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사랑’.

<그을린 사랑> Incendies. 

2010. 드니 빌뇌브 감독.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6년전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나는 빠리에 있었는데 영화 포스터에 이끌려 극장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영화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포스터의 빨간 배경과 처연한 여성의 옆모습, Incendies라는 제목이 시적으로 느껴져서 표를 끊었고, 영화는 포스터 이상으로 강렬했다. 그리고 극장을 나올 때의 나는 2시간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평화롭고 이국적인 풍경에서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어디일까? 하고 생각할 때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면서 폐허가 된 건물 안을 비추기 시작하고 라디오 헤드의 <유 앤 후즈 아미 You and whose army>가 무겁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직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들의 커다란 눈과 중간 중간 보이는 성인 남성의 군화는 여러 추측을 하게끔 만든다. 그 중 카메라를 노려보는 어느 소년의 눈빛이 송곳처럼 강렬하게 꽂힌다. 마치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첫 번째 시퀀스는 소년 병사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점프해서 캐나다 퀘벡으로 배경을 옮긴다.

쌍둥이 남매, 쟌느와 시몽은 엄마의 직상 상사이자 공증인인 쟝에게서 엄마 나왈의 유언을 전해 듣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생부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또 다른 형제를 찾아 자신이 남긴 편지를 전해 달라는, 게다가 편지가 전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묘에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엄마의 유언에 남매는 혼란스럽다.      

영화는 생부와 형제를 찾기 위한 남매의 여정을 따라 현재와 과거를 오고가며 진행되고, 남매는 이 여정을 통해 생전에 항상 어딘가 비어있는 듯 했던 엄마의 충격적인 과거 발견하게 된다.    

 

<그을린 사랑>은 책에 챕터가 있듯 시퀀스별로 소제목을 달고 있다. 나왈의 인생 변화를 따라가는 소제목에는 지명이 많이 있는데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지명은 캐나다와 팔레스타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허구로 지어진 이름이다. 정확한 지명은 나오지 않지만 나왈이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 까지 있었던 곳은 팔레스타인에서 멀지 않은 중동의 어느 나라와 도시들이었을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나왈은 팔레스타인 난민, 와합과 사랑에 빠져 그와 함께 도주를 감행하지만 오빠들에게 발각이 되고 와합은 그 자리에서 오빠들의 총에 맞아 죽는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그들은 나왈에게도 총을 겨누는데, (‘명예살인’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심심치 않게 이행되고 있는 문화적 악행으로 알고 있지만, 천주교를 믿는 아랍인들도 이를 따른다는 것이 내게는 의외였다.) 할머니가 이를 막는다.

집 밖에서 묵주기도를 하는 할머니, 바위위에 올라 앉아 고요한 평원을 바라보는 오빠들의 모습 뒤로 집 안에서 나왈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절규하는 나왈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음으로서 그녀의 아픔이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의 모습과 나왈의 절규, 그리고 평화로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투기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눈 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나왈

나왈의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 품을 떠나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혹시나 먼 훗날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아기의 발뒤꿈치에 점 세 개를 잉크로 새겨준(바로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던 소년이다. 관객들은 아마도 이때부터 비극을 예견할 것이다.) 할머니는 나왈에게 이 곳을 떠나 대학에 들어가라고 한다. 교육이 손녀를 강하게 만들고 구원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다보면 배움으로도 인간의 광기와 타락은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왈은 할머니의 말대로 고향을 떠나 다레쉬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학교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 허구적 지명과 배경 때문에 정확한 정치적 상황이 설명되지는 않지만 (레바논으로 예상은 되나 허구적 도시이름은 애초에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폭력이 그 나라의 국민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과정과 행태는 여느 나라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탱크가 도시에 난입하고 젊은 지성들이 모여 있는 대학을 점령한다. 충돌하는 두 세력의 폭력은 나아지기는커녕 그 강도가 점점 세 지기만 하고 그 피해는 오롯이 무고한 시민들이 받는다.     


나왈은 그녀의 고향 남부가 이미 쑥대밭이 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집을 몰래 빠져나와 아들을 찾기 위해 남부로 향하지만 그녀의 아들이 있었을 고아원은 이미 폐허로 변해있다. 망연자실 다레쉬로 돌아가는 길에서 그녀가 탄 버스는 무장한 기독교 민병대에게 공격당한다. 민병대는 버스 승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나왈은 숨겼던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며 살아남지만, 민병대는 어린아이에게도 총질을 서슴지 않고 한 사람의 생존자도 용납 못한다는 듯이 버스를 불태워버린다.

성모님 성화를 총에 붙이고 묵주를 목에 건 채, 종교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순간을 목격한 나왈에게 이 경험은 와합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또 한 번의 절망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불타는 버스 옆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 펜을 버리고 총을 들기로 결심하고 그 대가는 참혹하다.     

감옥에 수감된 나왈.

기독교 국민당의 지도자를 죽인 벌로 그녀는 15년간 감옥에 수감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다. (물론 거기에는 강간도 포함된다.) 계속되는 강간으로 임신을 한 그녀는 감옥에서 아이를 낳고(이 아이들이 바로 쟌느와 시몽이다.), 첫째 아들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생이별을 하게 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전쟁도 막을 내리고, 한 평도 채 안 되는 감옥에서 15년을 견딘 나왈도 세상으로 나온다. 무슬림 반군의 지원 아래 쌍둥이 남매와 재회하고 캐나다로 이민 간 나왈. 수 십 년이 흐른 어느 날, 딸 쟌느와 함께 수영장을 갔다가 그녀는 알 수 없는 충격으로 정신적 쇼크 상태에 이르고 몇 달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영화는 나왈의 죽음에서 시작해 다시 나왈의 죽음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인생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전쟁의 처참함을 대변한다.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은 인류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이 가두고 겁탈한 사람들이 사실은 그들의 누이이자 어머니이자 딸이라는 것을. 그들이 총을 겨누는 상대는 적이 아니라 실은 가족임을.


폭력의 끝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없어지고 극복할 수 없는 상처만 남을 뿐이다.      

인류가 생겨난 이래 전쟁이 없었던 순간이 있었을까?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책 <3기니>에서 전쟁은 언제나 남성들이 일으켰으며 그들이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여성들이 전혀 느껴본 적도 없고, 누려본 적도 없는 “어떤 영광, 어떤 필연성, 어떤 민족”을 싸움 속에서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도 폭력은 남성에게서 나온다. 와합을 죽이고 나왈에게 총을 겨눈 사람은 나왈의 오빠였고, 무고한 시민에게 자신들과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고 총을 난사한 사람들도 남자였고, 그녀를 가둔 사람들, 그녀를 강간한 사람들 또한 남자였다.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 죽이고 범하면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도 그들의 이념이나 종교 갈등을 자세히 얘기하지 않는다.(지명이 허구인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폭력’ 그 자체와 폭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잔인한 장면 없이 인간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그을린 사랑>의 국제적인 성공 이후 헐리우드에 진출하고, 국내에서도 <그을린 사랑>이후의 영화가 한 편도 빠짐없이 개봉하고 있다. 그는 폭력적인 장면 없이 (이것은 상대적인 기준일 수 있겠지만 비슷한 장르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서, 그리고 영화 속에서 행해진 폭력의 실제적 행위를 봤을 때 그러하다. 가령 이 영화에서도 강간당하는 장면은 강간 행위가 아닌 나왈이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흘리며 바지춤을 올리는 장면으로 상황설명이 된다.) 폭력의 잔인함과 긴장감을 전달하는데 탁월한 감독이다. 관객이 상황에 몰입할 수 있게끔 충분한 시간을 주고 배우의 연기든, 카메라의 움직임이든, 음악이든 오버하지 않는다. <그을린 사랑>는 후반부의 충격적 반전이 아니더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 하게하는 힘이 대단한데 이는 탄탄한 대본과 나왈의 인생을 증언해 주는 정직한 카메라의 움직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카메라는 나왈의 얼굴을 유난히 가까이 찍는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우아하게 폭력을 이겨내는지를 보여주고 이것은 이 영화의 힘이기도 하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그을린 사랑>은 쌍둥이 남매가 엄마의 과거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관객도 나왈의 과거를 알아가면서 비밀을 알기 전 느낄 수 있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 긴장감은 곧 충격으로 폭발한다. 마침내 생부와 또 다른 형제의 정체를 알게 된 남매. 1+1이 2가 아닌 1이 될 수도 있냐고 묻는 시몽의 질문에 충격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쟌느의 모습이 바로 관객의 모습이 아닐까?     

'함께 있은 것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단다.' 엄마의 유언을 읽는 남매.

나왈은 말한다. 쌍둥이의 또 다른 형제는 사랑 속에서 태어났고, 쌍둥이 남매는 공포 속에서 태어났지만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고. 그녀가 와합과의 사랑으로 낳은 아이는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우리의 ‘미래’다. 폐허가 되어버린 미래는 오가는 총.칼 속에서 괴물이 되어 제 어미를 범한다. 와합과의 도주에 성공했다면, 나왈과 그녀의 아들은 아마도 유럽 어딘가에서 조국의 전쟁을 가슴아파하며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혹은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고향을 떠나 숨어서라도 함께 했더라면 그가 괴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아들이 있는 고아원이 공격당하기 전에 도착해서 아들을 찾았더라면... 무의미한 가정의 반복 속에 그녀가 가졌을 후회들은 그녀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신분세탁을 하지 않은데서 알 수가 있다. 혹시라도 아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최소한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녀는 아들을 찾는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아들을 보는 순간 그녀의 모든 감각은 멈추고 생은 꺼져든다.


진정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함께 있는 것 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나왈의 유언은 생명의 존엄과 모성애를 환기시킨다.

나왈의 유언은 지켜졌고 그녀의 묘에는 묘비가 세워진다. 그리고 오월에 태어난 니하드는 자신의 어머니 묘 앞에 선다. 한때 악마라고 불렸던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또한 결국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던가.     

1+1=1이 되는 등식을,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스릴러 영화가 범인을 잡아내듯 퍼즐을 맞추는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마지막 퍼즐이 채워졌을 때 관객은 퍼즐이 맞춰지는 과정을 곱씹으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충격으로 한동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정신적 공황상태는 다시 찾아온다. 그것은 지금도 지구 어딘가 에서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허구보다 더 잔혹한 현실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공포 때문에 더 그러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폭력의 잔혹함을 목격한 관객은 나왈이 유언에 남긴 사랑의 메시지가 금방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다. 전쟁이 남긴 고통과 아이러니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자식을 향한, 인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그을린 사랑>은 드니 빌뇌브가 영화로 각색하고 연출하였다. 이미 헐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고 인정받는 감독이 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그을린 사랑>은 언제나 그의 가장 중요한 영화로 회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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