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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Feb 19. 2017

[영화 리뷰]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부서진 마음은 다시 붙일 수 없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 

케네스 로너건 감독. 2016.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미국의 지명이다. 혹시 김 아무개 아시오? 하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김 아무개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은(2010년 기준, 인구의 수가 5000명을 조금 넘는다.) 영화의 배경이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조용하고 잔잔한 마을의 모습처럼 영화도 덤덤하고 잔잔하다. 파도의 크기가 작다고 해서 바다에 고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안고 있는 아픔에 비해 영화가 조금 밋밋한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드는 영화였다.     



리(케이시 애플렉)는 보스턴에서 잡역부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전등을 갈아주고,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고, 심지어는 막힌 변기를 뚫어주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전화가 온다. 형 조(카일 챈들러)가 위급하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고 곧 바로 맨체스터로 떠나지만 도착했을 때 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리는 형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다.     

영화는 리가 추억하는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면서 진행된다. 현재의 리는 무뚝뚝하고 사교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심지어 술을 마시면 아무 이유 없이 싸움을 거는 사람이지만 과거의 그는 밝고 유쾌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보인다. 형과 조카 패트릭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가 낚시를 즐기고 조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행복해하던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여우같은 아내 랜디(미셸 윌리엄스)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었는데 현재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카 패트릭과 행복했던 한 때.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는 가족이다.

리가 조카 패트릭에게 조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패트릭의 학교로 갔을 때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들은 패트릭의 반응은 신기할 정도로 덤덤하다. 조가 심장질환으로 수차례 병원 신세를 지면서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데 친구들을 불러 피자를 시켜 먹어도 되냐고 삼촌에게 묻는 그를 보면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조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나오고, 그가 좋은 아버지였다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패트릭은 괜찮은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는 가족의 모습을 전체로서의 가족이 아닌 개인 대 개인, 독립적 관계로서 접근하고 있다. 엄마, 아빠, 자식들, 간혹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가족을 구성하는, ‘가족’이라는 최소 규모의 사회 구성 집단에 요구되는 조건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이 바뀌어 왔다. 영화 속에서도 우리가 (아직도) 흔히 떠올리는 가족의 모습을 갖춘 사람은 조의 친구 조쉬 밖에 없지 않은가.      


지난 아픔과 갈등의 시간이 모두 지나고 난 후의 모습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 영화가 지나치게 쿨 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갈등의 과정은 보이지 않고 결과만 있다. 과거의 문제들은 리의 회상을 통해 간단한 정보만 전달되는데 특히 패트릭의 엄마 앨리스(그레첸 몰)의 등장이 그렇다. 과거에 알콜 중독이었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독실한 크리스쳔을 만나 새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그녀의 과거는 술병을 옆에 두고 나체로 쓰러져 자고 있는 모습으로 리의 회상을 통해 잠깐 보여 질 뿐이다. 그녀는 전 남편 조의 죽음 이후 아들을 점심식사에 초대하지만 이 만남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아들 패트릭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엄마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아직 고등학생인 그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족으로서의 역할에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의 삶을 인정하고 부모의 삶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개인주의적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패트릭은 학교에서 하키부와 농구부에 속해 있으며 취미로 밴드를 하고 두 명의 여자 친구를 가지고 있는 인기남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도 그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아니지만 영화가 리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만큼 패트릭의 심리상태를 들여다보고 거기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사고 이후 맨체스터를 떠나는 리.

리의 행복했던 과거가 어떻게 부서지고 현재의 고립된 리가 됐는지에 대해서 영화 중반부에 설명이 된다. 그는 자신의 실수로 자식들을 잃는다. 이후 아내 랜디와 헤어지고 보스턴 반지하방에서 살면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잡역부 일을 시작하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는다. 여자들이 그에게 추파를 던져도 그는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람을 무안하게 하고 무뚝뚝함으로 고객들에게 컴프레인을 받기 일쑤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희로애락을 모두 차단하고 상처 난 가슴을 그대로 둔 채 살아가는 것, 이것은 그가 택한 속죄일까?      


영화 안에는 여러 죽음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죽음’ 보다, 그 이후 남겨진 자들의 ‘삶’에 집중하는 영화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랜디는 리와 헤어지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다시 아기를 가진다. 리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사고였다고 해도 자신의 잘못이었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는 리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그가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형 조가 리를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정해 놓은 것은 (달리 다른 선택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지만) 리가 다시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삶을 보다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가 형의 집으로 들어가서 조카와 함께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테지만 그에겐 과거의 환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맨체스터에서의 매 순간이 고통이다. 그에게도 패트릭에게도 최선일 수 있는 계획을 강구하면서, 리는 자신의 계획을 조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아직 미성년자이기는 하지만 조카의 의견을 존중하고, 패트릭 또한 삼촌의 선택을 존중한다.     

리의 부서진 마음은 붙여지지 않는다.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끌어안고 산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때로는 웃을 일들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난을 치면서 앞으로의 계획들을 주고받는 삼촌과 조카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작은 희망을 가질 것이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처럼 리에게도 봄이 오지 않을까?     


영화가 공개되고 영화는 언론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면서 각종 영화제 수상과 함께 아카데미 영화제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극복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리를 연기한 케이시 에플렉은 이미 골든 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과장되지 않은 그의 연기는 인물의 고통과 아픔을 전달하면서도 잔잔한 영화의 톤과 많이 닮아 있어 인상적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퍼지는 파문과도 같은 영화다. 강렬하지는 않지만 오래가는 여운을 주는 드라마를 보고 싶은 관객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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