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문화란 무엇인가>로 문화의 의미 되묻기
문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100이면 100 모두 각자의 답을 할 것이다. 물론, 문학비평가나 문화연구자가 설정한 정의나 사전적 의미는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철학을 바탕에 두고 연구해서 정의를 내렸는지, 그 연구자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또 다른 답이 돌아올 것이다. 또 문화는 전문적인 연구의 영역이면서 사회와 개인에게 주어진 부분도 있기에 전공자가 아니어도 의견을 보탤 수 있다. 실제로 공부에 참여하지 않은 집단의 생각이 중요하게 다뤄지기도 하는 측면도 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모두 포함시키려는 시도조차 또 어떤 예외와 차이를 만드는 행위에 해당하기도 한다.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성격은 어쩐지 인간의 문화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도대체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지에 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질문에 '테리 이글턴'이라는 1943년생 영국 문학 전공 문학비평가가 4가지의 분류로 설명을 달아주었다.
그에 따르면 문화는 (1) 예술적이고 지적인 작업들 전체 (2) 정신적이고 지적인 발전 과정 (3) 사람들이 살아가며 따르는 가치, 관습, 신념, 상징적 실천들 (4) 총체적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이 4가지 중 어느 하나로만 설명하려고 하면 모순과 부족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조상들이 해왔던 작고 사소한 습관들이 모두 예술로 칭해지지는 않지만 문화라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예시로 든다. 그가 '문화란 무엇인가'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그만큼 문화를 설명하는 일이 복잡하다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18세기부터 문화라는 개념을 서구권에서 연구하고 퍼뜨리고 활용하면서 지켜온 힘이 현대에 와서는 사라져 가고 있다는 역사적 인식을 슬며시 건네고 있다. 그가 좋은 학자라고 생각하고 훌륭한 비평을 남겼다고 여기는 헤르더, 버크 등에 따르면 문화는 '사회적 무의식'이라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문화는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모델, 자기 정체성의 구축 혹은 자기실현의 형식, 소규모 집단이 만들어낸 결과물 혹은 인민의 생활 형태, 현재에 대한 비판 혹은 미래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라고 언급을 하면서 은연중에 문화를 통해 무엇인가를 바꾸고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다. 적어도 현대의 문화산업이 문화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평가, 대학, 인문학은 문화산업의 종속되어 있다면 다행일 뿐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현실적 판단을 소개한다. 더 이상 문화 그 자체는 예전의 문화만큼 사회적 무의식을 가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며 권위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화산업은 사회적 삶과 일상에 가까이 붙어 있어서 무엇인가를 비판하는 것이 의미 없음을 스스로 답한다. 아무리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글을 썼다고 해도 문화가 가졌던 예전의 영광을 잃고 지금은 평범해져 버린 주변부에 해당하는 영역에 있다는 결론은 희망찬 마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테리 이글턴이 문화와 함께 가능성을 느꼈던 시기는 노예제, 폭정, 식민지 강탈, 원주민 문화의 파괴를 문화의 힘을 통해 비판할 수 있는 때였다. 예술이 향락이 아닌 공적 현상이자 사회적 개입이 되어 시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던 역사에 대한 향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떻게 하다가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견해를 가졌던 이들이 어떤 행태를 보이고 있는지 뚫어본다. 테리 이글턴이 아마도 바라지 않았던 지금의 현실은 산업의 구조와 기술의 변화가 부추긴 전 세계적 전환에 의해 펼쳐졌다. TV,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전파하는 기기가 등장했던 때에도 대중문화는 큰 변화를 겪었지만, 그보다 더 빠르고 다양한 시도가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인 선두주자는 플랫폼 비즈니스라고 할 수 있다.
플랫폼 자체는 하나의 또 다른 문화라고 불러도 될 만큼 여러 특징을 지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들이 모여 원형에서 모여 의사결정을 했을지 몰라도, 온라인 플랫폼에 모인 참여자들은 인공지능 기술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온라인 플랫폼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공간이기도 해서 오프라인에서 누릴 수 없었던 자유도와 관계의 친밀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너무 방대한 선택권에서 사용자들이 허덕이지 않도록 제공되는 알고리즘 서비스는 개인을 향해 지정된 화면과 콘텐츠를 제공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이 플랫폼에서 활동한 흔적과 온라인 세계가 생기기 이전부터 축적된 인류의 지식을 기반으로 결과물을 산출한다. 사람의 판단과 결정이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플랫폼이 있는 반면 상당 부분 인공지능에 의사결정을 맡기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서비스는 사실 인간의 입장에서는 극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라서 그 안에 혼란과 열광과 걱정은 동시에 나타난다.
테리 이글턴은 걱정과 절망을 숨기지 않았다. 문화가 대중과 만났지만 긍정보다는 부정적 결과가 많아졌고, 산업과도 만났을 때 문화가 가졌던 순기능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소리쳤다. 정말로 문화는 가치를 잃고 산업과 경제에 의해 수명을 다한 것일까? 그는 한탄의 목소리를 위해 근거로 삼았던 문화의 이중성을 본인이 직접 몸소 실천한 셈이다. 문화는 현실에 있는 이슈들만 다루기에는 미래나 이상에 있는 변화도 포함하고, 이상과 현실 중 어느 하나로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힌 바 있다. 플랫폼 비즈니스와 비대해진 문화산업이 위협하는 공동체 의식을 걱정하는 또 다른 연구자와 집단이 생겨나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와 개인의 신성시를 비판한다고 해서 비평가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거나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이름으로 묶여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고 총제적 이해능력과 복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기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인공지능과 플랫폼 비즈니스가 시키고 하라는 대로 순수히 따르지 않는 일종의 반역자들이 지구 곳곳에 존재한다.
그들은 온라인 정보매체에도 책임감, 공동체 의식과 같은 윤리적 개입을 바란다. 국가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사유한다. 플랫폼이 발현할 수 있는 공공적 순기능에 대해서 발견하고 알리고자 한다. 플랫폼이 가능성, 다양성, 해방성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일과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면면을 찾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20세기, 19세기, 그리고 18세기에도 전 세계에서 벌어졌던 시도였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한정된 시기의 역사까지 만 볼 것이라면 온라인 공간에서 문화적 활동을 추구하는 집단은 또 다른 명칭이 붙여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의 성격과 의도 그리고 목적에서 유사함을 보이고 있고 테리 이글턴이 중요시했던 '사회적 무의식'에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21세기의 활동은 언젠가 또 포기와 절망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중성을 띄게 되고 자기모순에 빠지고 누군가에게 비판받을 만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런데 늘 그랬듯이 문학평론가들이 진실이라고 칭하는 일말의 가치 또한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가치는 걱정과 불안에 대해 협력하고 조정하고 완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문화는 신이 아닌 존재가 신처럼 선택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탄생한 운명이다. 몇백 년이 넘도록 비판받으면서도 지속된 인류의 수많은 종교, 정치 문화는 인간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됐다. 지형적 특성과 기후변화로 인한 지역적 차이는 존재하더라도, 그 체계와 규칙은 인간이 만들었다. 하지만 늘 불만은 제기되고, 불편함과 걱정은 또 다른 문화를 기대하게 만든다. 테리 이글턴이 정확히 집어낸 '사회적 무의식'에 대한 문화의 순기능 역시 신처럼 되고 싶은 인간이 가능한 선택지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일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란 무엇인가>를 통해 풀이한 문화의 의미는 신이 되지 못해서 이중적인 인간, 완벽하지 못해서 이중적인 문화, 말하는 순간 모순이 되는 주장을 통해 어느 정도 그 윤곽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