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일의 아름다움

by CINEKOON
지금 윤하 새 앨범 몇 장 남았나요?

내가 고등학생 때, 윤하가 사인회를 위해 전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시내에 있는 음반사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당시 사인회 이벤트의 참여조건은 사인회를 주최하는 해당 음반사에서 새 앨범을 구매해야 사인회 참여 티켓을 주는 것이었고, 난 그를 위해 버스도 타지 않은채 음반사로 달렸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전주 시내에 있는 음반사까지는 보통 버스로 2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지만, 난 그 날 운동화를 신고 그 거리를 10분만에 주파했었다. 그리고 결국 앨범을 샀고, 사인회에도 갔다. 재밌는 건, 이미 그 앨범이 내게 있었다는 것이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제일 친했던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상경해 두리번 거리며 에픽하이 콘서트장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전주엔 지하철이 없기 때문에, 전주촌놈 세 명이서 서울 지하철은 어떻게 이용하는 것인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었지.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찾았던 콘서트장 스탠딩석에서, 우리는 타블로와 아이컨택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에픽하이의 9집 앨범이 내 생일인 10월 23일에 발매 되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 생일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그들을 좋아했던 나의 마음을 그들이 알아주었다고, 그 마음이 보상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무언가가 좋아서 달려든 경우가 무척이나 많다. 봉준호 감독과의 대담에 참여하기 위해 모의고사 전날에 서울행 버스를 탄 적도 있었고, 스페인까지 가서 부러 <스타워즈>의 촬영지에도 들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했던 무모함들이 참 많다.


갓 스무살이 된 나는 영화과에 합격해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 그대로 호기롭게 떠난 오리엔테이션. 장기자랑과 각종 게임들, 그리고 이어지는 야밤의 술자리들. 여기에 선배들의 단골질문이 끼얹어진다. “넌 어떤 영화 좋아해?” 열댓명의 동기들과 동그랗게 빙 둘러앉아 그 질문을 받았다. 연병장 앉아 번호 마냥 한 명씩 영화 제목을 대고 옆사람을 본다. 그 때만해도 난 <다크 나이트>나 <쥬라기 공원>을 좋아한다 말할 생각이었다. 근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나랑 비슷한 수준인 줄 알았던 동기들이 하나둘씩 괴상한 감독들을 읊어대고 있잖아. “저는 펠리니요.” / “전 김기영의 <하녀>를 가장 좋아합니다.” / “최고는 미조구치 겐지죠.” 나는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들어도 봤고, 영화도 찾아 봤으나 도무지 좋아지지 않던 그들의 영화. 그런데 그것들을 좋아한다고 대접 받는다. 내 옆에 앉은 한 학번 선배의 차례. “전 일전에 말씀드린대로 김지운의 <달콤한 인생>을 제일 좋아합니다.” 아-, 나도 본 영화. 하지만 여전히 좋아하진 않는 영화. 그치만 그렇기에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옵션 같아 보였다. 비로소 내 차례. “저도… <달콤한 인생>…”


나는 아직도 나의 취향을 숨겼던 그 날의 그 대답이 조금은 후회스럽다. 막 돌이키고 싶은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 정도로 용기가 없었나- 하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의 아름다움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무뎌졌을지언정 연예뉴스란에 ‘윤하’라는 두 글자가 뜨면 한 번쯤은 눌러보게 되고, 에픽하이 세 멤버들의 싸인이 인쇄된 10년 전 그 때의 콘서트 엽서를 가지고 있으며, 새 괴수 영화가 나오면 극장으로 향하고, 그러므로 스필버그는 언제까지나 나의 바이블이다. 때문에 난 많고 많은 것들 중에 왜 그런 걸 좋아하냐- 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러니까 감독이랍시고 괴수영화 만든뒤 언론시사회에서 사실 자기는 별로 괴수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 따위로 그걸 사랑하는 사람들을 욕보이는 짓 좀 안 했으면 좋겠으며, 남이사 아이돌을 좋아하든 말든 그걸로 훈계질 안 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해본적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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