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세 딸들>
말기 암 판정을 받고 둘째 딸과 함께 지내던 뉴욕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들을 정리 중인 아버지. 그마저도 병세가 심해 정신도 오락가락인지라 소통도 잘 안 되는 와중, 그래도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이기에 평소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세 자매가 모두 모인다. 비교적 근거리에 살면서도 삶의 치열함을 핑계로 아버지를 잘 찾아뵙지 못했던 깐깐하고 거센 첫째 딸,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나 특유의 아웃사이더적 기질 때문에 다른 자매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둘째 딸, 그리고 저 멀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찾아온 어딘가 특이한 4차원 막내 딸까지.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던 세 자매 사이, 그 아파트의 고요함은 불편함이 된다.
물론 둘째 딸만 다른 자매들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세 딸들>은 혈연을 뛰어넘는 '가족'이란 개념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정교하면서도 느슨해 여유로운 세트피스 안에서 잘 보여준다. 가족이기에 서로 잘 지내야하지만, 동시에 가족으로서 지지고 볶던 세월들이 분명 존재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유사시엔 단단히 뭉쳐야하지만 평상시엔 서로 꼴도 보기 싫은. 사실 가족이라는 게 으레 다 그렇지 않은가.
'가족'이라는 흔하디 흔하되 소중한 단어를 새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족. 집 가(家)에 겨레 족(族)을 쓴다. 그 짧은 단어 어디에도 무조건적으로 혈연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사전적으로는 그저 같은 집 안에 사는 겨레, 또는 민족을 의미할 뿐. '식구'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끼니 식(食)에 입 구(口)를 쓰지 않는가. 그저 같이 밥 먹는 입일 뿐. 그 명료한 단어 어디에도 무조건적으로 서로 잘 맞고 합이 잘 떨어져야 한단 말은 없다.
둘째 딸이 유일하게 피로 묶여있지 않다는 설정은 사실 사소하고 또 짐짓 불필요해보인다. 그냥 세 명의 친자매인데 그저 그 사이 관계가 그간 안 좋았던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잖아. 대체 왜 굳이 그런 설정을 툭 튀어나오게 집어넣은 건데? 그런 의문이 든다면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글자와, '식구'라는 글자를 다시 한 번 면밀히 살펴보면 되는 것이다. 단순히 같은 집에 살았고, 또 같은 집에 모였으므로 가족이 되고 또 식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서로 결이 안 맞고 다를지라도 결국엔 가족이자 식구라는 것. 지금까지의 많은 가족 소재 영화들이 탐구해왔던 흔한 주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세 딸들>은 그 단순명료한 자태로 그 명백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캐리 쿤부터 나타샤 리온, 엘리자베스 올슨까지 세 배우의 캐스팅과 연기가 빼어나다. 거기엔 더 더할 것도 더 뺄 것도 없어 보인다. 세 배우는 각자가 지닌 특유의 이미지와 아우라도 단박에 해당 캐릭터를 설명해내고, 이후 훌륭한 연기를 덧대어 이 간결하고도 작은 작품에 생기를 더했다. 좁은 아파트 한 공간 안에서 적절히 동선을 짜내어 이야기를 잘 전달해낸 연출도 물론 훌륭하고.
미국의 작가 조지 번즈는 말했다, "행복이란 자신을 사랑하고 돌봐주는 대가족이 차를 타고 최소 두 시간은 가야 만날 수 있는 다른 도시에 사는 것"이라고. 나는 그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만나 붙으면 징글징글 서로 짜증내고 화내기 바쁜 사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난 순간 반가움을 주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감안하고서라도 끝까지 이어나가고 싶고, 또 이어나가게 되는 관계. 무릇 참된 가족이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재가 존재에게 그러하듯, 어쩌면 불화도 진심을 증명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