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스튜디오 보다 더 커진
거대 감독의 고집과 객기

<테넷>

by CINEKOON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을 참 좋아했었다. <메멘토>나 <인셉션>처럼 영리했던 그의 영화들은 언제나 나의 허점을 찔러왔고, <다크 나이트>처럼 묵직했던 그의 영화들은 그를 마이클 만의 적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이과형 감독의 극치 같은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는 밥을 먹으면서도, 다른 나머지 한 손으로는 루빅스 큐브 세 개를 저글링하며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플롯 구성을 가진 실력자. (그래서 그는 어쩌면 영원토록 멜로 드라마를 찍지 못할 것이다. 애초 본인부터가 별 관심 없겠지만)



다만 그에 대한 나의 그런 호감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부터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거듭된 흥행과 비평적 성공으로 할리우드의 거대 영화 스튜디오보다 훨씬 더 큰 거대 감독이 되었다. 동시기 스티븐 스필버그조차 얻지 못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나는 그가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건 거의 스탠리 큐브릭의 재림이었다. 그가 말하면 모든 건 다 이루어졌다. 아마 그가 ‘빛이 있으라’라고 말했다면 스튜디오의 모든 조명들이 일순간 다 켜졌을 것이다.



그와 지속적으로 작업을 했던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는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빠졌고, 최고 조건의 러닝 개런티 계약을 놀란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맞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부터 놀란은 고삐 풀린 망아지 아니, 고삐 풀린 코뿔소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느 스튜디오 간부, 어느 스튜디오 제작자가 와도 그에게 일침을 놓기 어려워졌다. 심지어 꾸준히 함께 하고 있는 제작자는 그의 아내다. 더 말해 뭐해.



물론 장점도 있을 것이다. 거대 자본에 종속된 작가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거대 자본을 이끄는 작가로서 놀란의 작가주의적 행태는 눈 부시다. 애초 그런 그가 아니었다면 <인셉션>이나 <덩케르크> 같은 블록버스터라기엔 기념비적 실험영화에 더 가까운 그 영화들을 할리우드 메인 스트림에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건 분명 치하할 만하다. 그러나 <테넷>에 이르러서는 놀란의 그러한 단점이 극대화되는 모양새라고 난 생각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을 목적으로하는 대중 상업 영화에서 감독이 자신의 작가적 비전을 이토록 극단적인 방향을 통해 표현해내는 스탠스가 나는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내 말해온 건데, 애초 영화가 자신이 속한 장르에 있어서 최소한의 ‘재미’ 또는 ‘쾌락’을 주고 있다면 그 모든 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 영화가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재미있다면, 굳이 홍보사에서 ‘<테넷> N차 관람 캠페인’ 따위를 벌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또 볼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파고들고 또 파고들 것이다. 그러나 <테넷>에서 나는 그러한 재미를 발견해내지 못했다. 특히 후반부 클라이막스의 대형 전투 시퀀스는 놀란임을 감안하더라도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놀란은 언제나 자신이 마이클 만 감독이 연출한 <히트>의 팬임을 스스로가 공공연히 해왔다. <히트>가 왜 유명한데? <히트>는 감독 마이클 만의 집착에 가까운 총기 묘사와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화기 액션의 신세계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영화다. 그런데 <테넷>은, <히트>를 존경한다고 매일 매일 말하는 사람의 영화치고는 그 화기 액션이 형편없다. 놀란의 영화들 속 소총은 그 타격감이나 사격감이 물총에 가깝다. 도저히 볼맛이 안 난다.



<테넷>이 나쁜 영화인 것은 아니다. 놀란의 작가주의적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있고, 지적인 긴장감으로 시종일관 팽팽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테넷>보다 시간 여행, 또는 타임 패러독스의 개념을 훨씬 쉽게 더 잘 푼 영화들이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한다. <터미네이터>나 <백 투 더 퓨쳐> 등이 그렇다. 맞다. 나는 <테넷>을 보고 깨달아버렸다. 대중과 보폭을 맞춰 걸으면서도 영화의 기본적인 재미를 잊지 않았던 <터미네이터>나 <백 투 더 퓨쳐> 같은 영화들이 얼마나 대단한 영화였는지를. <테넷>은 분명 좋은 영화지만, 더 좋고 쉬운 영화들이 이미 널려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부러 치켜세워주지 않아도 될 만한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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