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
꽤나 단순한 성질머리를 지녔다. 한 번 걱정에 휩싸이면 밤새 끝없는 고민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괜찮아' '뭐 어때'를 외치며 벌렁 드러눕는다. 내 기분을 좌우하는 건 지극히 심플한 요소다. '먹는 것'과 '날씨 변화'. 여유란 배에서 나오는 건지, 공복의 나 보다 배부른 내가 훨씬 더 좋은 사람이다. 입에 맛있는 게 들어와야 특유이 낙천적인 아이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낙엽 떨어지고 추운 겨울엔 기분이 영 별로다. 반면, 싱그러움을 즐길 수 있는 봄과 여름날에는 특별하지 않아도 내내 기쁨의 연속이다. 매일 산책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 하는 나에게 엄마는 '산책 시켜줘야 하는 강아지를 키우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계절을 충분히 즐기는 것과 내 몸에 좋은 것을 채워 넣는 행위는 단순해 보이지만 사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복잡한 생활 요소다. 그런 면에서 "배고파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은 나와 쿵짝이 너무 잘 맞는 친구다. 답도 없이 방황하는 20대를 보낸다는 것까지 꼭 닮았다.
<리틀 포레스트>는 사계절을 4단짜리 도시락통에 차곡차곡 담아낸 것 같은 영화다. 뭐 하나 버릴 거 없이 소중하게 꼭꼭 씹어 음미하고, 마지막엔 기분 좋은 웃음까지 세트로 먹어야 하는 것.
서울에서 온갖 알바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던 혜원은 이별과 불합격의 아픔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 집에 엄마는 여전히 없었고, 단짝 친구 두 명이 있었다.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 혜원은 두 사람의 도움으로 직접 농작물을 재배하고, 그 신선한 재료로 계절에 딱 맞는 요리를 해 먹으며 사계절을 보낸다.
영화에서 정성스레 소개하는 귀한 제철 재료와 음식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 지수를 높인다. 추운 겨울 꽁꽁 언 몸을 녹여주는 김치 수제비와 배추전, 봄의 정기를 가득 담은 아카시아 튀김, 매미소리가 절로 들리는 여름의 콩국수, 가을처럼 무르익은 밤 조림까지. 여기에 계절별로 섬세하게 변하는 아름다운 화면 덕분에 마음까지 녹는다. 각 계절 특유의 색감과 온도, 습도까지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다.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마음에 위로를 얻는 까닭은 억지스러움 없이, 잔잔하게 온기를 주는 영화라는 점이다.다른 매체의 이야기들처럼 무조건 청춘을 예찬하지 않는다. 그저 세 친구가 나름의 방식대로 계절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자연스럽게' 하루를 소중히 여기게 된다. '청춘은 빛나는 거야' '20대를 즐기자' '무조건 힘내야 돼' 식의 세뇌당한 용기가 아니라, 농촌에서 맛있는 밥 한 끼 잘 먹는 것만으로도 각자의 현재가 아름다운 것임을 알려준다. 사실 20대의 청춘이란, 어른들의 눈으로 보기엔 온 힘을 다해 당장 즐겨야 하는 아까운 시간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겐 갈 길을 몰라 헤메는 시간인 경우가 더 많으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공허한 이들에게 영화는 '그냥 밥이나 한 끼 잘 먹어' 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다.
물론 교훈을 주는 어른은 여기에도 있다. 혜원의 엄마(문소리)는 무심한 듯, 그러나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그녀의 레시피에 섞어 나직이 들려준다.
"기다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남들과 속도가 달라도,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이는 혜원의 이야기에 심취해 극 중에 나오는 요리 몇 가지에 도전했다. 혜원 엄마의 비밀 무기였던 '양배추전(오코노미야끼)'은 집에 있는 자투리 재료를 활용하기에 더없이 좋은 요리다. 아쉽게도 '크림브륄레'는 대실패였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리틀 포레스트>의 온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나를 위한 한 끼를 맛있게 만들어 먹는 재미를 알아버려서다. 서울에서 나고자란 내겐 혜원처럼 돌아갈 수 있는 작은 숲이 없지만 적어도 나만의 소울푸드 레시피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입맛도 변하고, 계절에 따라 소울 푸드는 매번 바뀌지만 건강한 한 끼를 먹고 건강한 내가 되는 것은 평생 해도 모자란 일이다.
지금은 가을의 초입이다. 아침저녁 기온이 뚝 떨어져 쌀쌀한 계절. 내가 사랑하던 푸르른 봄과 여름을 보내줘야 해서 마음이 무겁지만, 가을과 겨울을 잘 견뎌내야 봄이 더욱 반가울 것임을 이제는 안다. 이 허전한 속을 꽉 채우기 위한 요리, '김밥'을 해 먹어야겠다. 학창 시절 가을 소풍 때마다 친구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핑크색 도시락 뚜껑을 열어젖히면 그 안에는 엄마의 소고기 김밥이 가득했다. 나에겐 내 도시락이 최고였는데, 나보다 도시락의 완성도가 썩 좋지 않았던 친구들도 제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을 찬바람 탓에 김밥이 많이 식어있어도 아랑곳 않고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눠주던 김밥 한알의 자부심. 그거면 남은 추위는 거뜬할테니.
리틀 포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