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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Oct 17. 2024

#026(D-75)상실과 사랑은 반의어?

영화 <어느 멋진 아침> 에 대한 단상

우리는 타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자신이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때 가장 불행하다.


영화 <어느 멋진 아침>은 파리의 한 골목을 빠르게 걸으며 어딘가로 향하는 주인공 산드라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산드라의 뒷모습을 통해 보이는 파리 시내는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저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는 삶의 한 풍경처럼 일상의 흔적이 역력한 색바랜 거리이다. 카메라는 커다란 검은 백팩을 멘 산드라가 골목골목 지나가는 차량과 달리는 오토바이 사이를 지나 낡은 아파트의 입구를 통해 현관문까지 이르는 길을 따라간다. 그런데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현관문을 열 수가 없다. 안에서 열쇠로 문을 열어줘야 밖의 문을 열 수 있는데 아버지가 열쇠를 찾지 못해서 겨우 문을 열게 된다. 닫혀진 문을 열려고 하는 산드라와 아버지. 산드라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일상을 잠시만 보아도 관객은 산드라가 처한 상황의 힘겨움을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산드라는 남편과 사별 후 번역과 통역을 하며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자신의 일과 육아로 매일 벅찬 날을 보내지만 여기에 아픈 아버지 돌봄이 더해지고...삶의 상실과 슬픔의 상황에서 뜻밖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나는 주인공 레아 세아두를 좋아하기도 하고 이 영화가  <아무르> <더 파더><스틸 앨리스> 등 죽음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리뷰는 브런치를 비롯한 여러 플랫폼을 통해 아주 많이 찾아볼 수 있으니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느꼈던 부분만을 조금 이야기해보고 싶다.


우선, 서유럽에서 사회복지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편인 프랑스에서도 가족의 돌봄을 딸이 도맡아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또 이혼 후 혼자 살아가는 아버지가 불치병에 걸린 후 병세가 악화되어 더이상 치료가 불가능해지자 이곳 저곳 요양원을 옮겨다니는  과정을 보면서 파리의 요양병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나는 산드라 못지 않게 산드라의 아버지가 영화를 통해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철학교수였던 산드라의 아버지는 희귀병에 걸려 앞을 못보고 제대로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어느 멋진 아침>은 아버지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자서전의 제목이다. 산드라는 아버지가 수첩에 독일어로 자서전 제목을 An einem schönen morgen라고 메모된 것을 발견한다. 산드라의 아버지 게오로그는 철학교수이다. 책을 통해, 지식을 통해 평생동안 최고의 지성을 추구하던 사람이 그것의 도구인 시각과 기억을 잃게 되었을 때의 무력감과 혼란과 상실감이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산드라의 고통스런 시선을 통해 보여진다. 이제 요양병원으로 보낼 수 밖에 없다며 형식적인 질문을 하는 의사에게 기만적이라고 대답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세 사람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오랜 여자친구인 레알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좋아하며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정작 자신을 돌보는 딸에 대한 언급이나 애정표현은 전혀 없는 모습이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느끼게 한다.


아버지에게 평소에 좋아했던 슈베르트를 들려주자, "이 음악은 이제 내게 너무 무거워".라고 대답한다.

노화가 급속한 질병은 개인의 음악적인 취향도 바꾸어놓는다.  요양병원을 방문한 봉사자들이 노인들에게 일괄적으로 들려주는 국민 노래 샹송을 따라 부르는 노인들. 철학교수였던 아버지도 노동자였던 또래 노인도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그 노래를 따라부른다.


내가 며칠 전에 포스팅했던 '죽은 후에 남겨질 물건들(유품)'은 자꾸 관심이 가는 주제이다. 이 영화에서는 철학교수인 아버지를 상징하는 커다란 서재의 수많은 책들이 아버지의 유품이다. 칸트, 괴테, 키에르케고르부터 한나 아렌트까지 문학, 철학에서 독일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책이 빽빽히 꽂혀있는 서재를 산드라는 망연자실 바라본다. 어린 딸에게, 아픈 할아버지보다 이 책이 더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다소 뜬금없으면서도 흥미로운 장면도 등장한다. 통역가인 산드라는 노르망디 해전에서 참전군인이었던 미국인 노인들의 이야기를 퉁역한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언어가 아닌 타인의 언어로 말해야 하는 산드라의 상황을 표현한 것일까.


상실감에 빠진 산드라의 심리를 잘 표현한 레아 셰아두


"사랑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 같아"

오래 전 친구였다가 이제는 결혼해서 유부남이 된 끌레몽과 사랑에 빠진 산드라. 그러나 그 만남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산드라의 절박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상실감과 슬픔이라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래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사랑받고 싶은 산드라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내가 이런 상황이면 나역시 끌레몽같은 친구에게 사랑을 느끼고 매달리고 싶을까?


줄곧 어둡고 칙칙하고 비가 내리는 파리의 풍경 안에서 산드라는 계속 이동한다. 버스로 기차로,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어디 한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산드라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던 두 사람. 아니, 끌레몽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영화의 후반부엔 거의 산드라를 선택하는 것처럼 암시된다. 그러면서 아이와 클레몽과 함께 하는 그 순간, 파리의 풍경은 화사한 햇살이 비치며 밝아지며 마치 마법처럼 낭만적으로 변화한다.


파리의 화창한 공원 풍경

산드라의 옷이 변화하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처음엔 보이시한 스트라이프 차가운 색상의 티셔츠와 청바지 등 남자같은 옷차림이다가 끌레몽과 만나면서 스커트와 원피스,  밝은 색상의 의상으로 변화한다. 계절의 변화 역시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이 영화가 디지털이 아닌 35mm 필름으로 찍은 필름 영화라 더 옛영화같은 질감이 잘 드러나있다. 오랜만에 보는 영화적인 영화라고 해야할까.


요양원 옥상에서 산책하는 아버지와 산드라


아버지의 집, 좁은 문으로 진입하기 위해 애쓰는 산드라의 모습으로 시작된 이 영화의 마지막은 산드라와 딸, 그리고 연인 클레몽 세 사람이 탁트인 파리 시내를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끝난다. 닫힌 문이 새롭게 활짝 열리는 구조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줄곧 아버지를 보내는 딸의 마음이 되었다가 또 한편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놓아버리게 되는 아버지의 입장이 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감독인 미아 한센-뢰베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의 작품들 중 가장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말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죽음과 삶, 상실과 사랑은 반의어가 아니라 결국 같은 선상에 놓인 동의어처럼 느껴졌다.  프랑스 영화는 확실히 삶의 진실, 인간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진한 커피같은 울림을 준다.


https://youtu.be/V1cSZX43IDA?si=a1ezey-oR8aYTObI




아버지와 함께 남겨진 아버지의 책들을 망연히 바라보는 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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