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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May 30. 2022

단순한 것들은 살아남는다

영화 <내 인생 특별한 숲속 여행> 를 보고

# 1. 영화를 전공하고 영화와 관련한 학술적인 글을 썼던 후유증으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브런치에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어떤 영화가 감명깊거나 뭔가 시사할 바가 있어 글을 시작했어도 중간에 그래도 형식을 갖춘 글을 써야한다는 압박감이 고개를 쑥 내민다. 그러면 어느새 사공이 나타나 배를 바다가 아닌 산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결국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글이 되어 마무리를 못하고 발행도 못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어설픈 완벽주의자이다. 전업요리사가 휴가와서 예상치 않게 요리를 해야할 상황에 처했는데 재료와 레시피와 절차를 갖춰 제대로 요리를 못할 바에는 아예 요리를 안하고 대충 컵라면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사례가 적당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압박감 때문에 쓰고 싶은 글은 많으나 제대로 마무리를 못짓고 있다. 브런치 <영화와 영성> 매거진의 두 편은 그나마 브런치 처음 시작할 때 멋모르고 그냥 쓴 글이라 그렇다치고. 모르면 용감하다. 그렇다. 나에겐 그 용감함과 단순함이 필요한 거다.  


#2. 뭔가 복잡하게 머리아픈 이야기가 아닌 단순한 플롯을 가진 가벼운 영화를  한편 보고싶었다('리틀 포레스트' 같은). 마침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는 영화 중에 딸과 함께 언젠가 보려고 찜해둔 12세 이상 뉴질랜드 영화가 눈에 띄길래 얼른 버튼을 눌러봤다. 음 <피아노>와 <쥬라기공원>의 샘 닐이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었네. 일자무식의 심술궂고 무뚝뚝한 이 양아버지가 반항적인 10대 고아 소년과 야생의 숲에서 이상한 도주 행각을 벌이게 되는 이야기. 그런데 의외로 뻔한 스토리를 뒤집는 독특한 유머와 개성강한 등장인물들로 인해 지루함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접근법이 신선했고 단순했지만 힘이 있었다. 이불을 둘둘 말고 티브이보는 방 소파에 끼어들어온 딸은 '이렇게 못생긴 애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거야?' 하면서 같이 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의 낯선 유머 코드가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는지 중간에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뭔가 내공이 느껴져서 감독이름을 찾아보았더니 <조조 래빗>을 만든 타이카 와이티티이다.


# 3. 시인인 선배가 오래전 출간한 시집의 제목은

<단순한 것들은 살아남는다>이다.


단순한 것들은 살아남는다


단세포 동물들의
그 왕성한 번식력을 보면

망치나 드라이버처럼

간단한 도구의 든든함을 보면

단순한 것들은

단순한 사람처럼
어디서나 살아남는다


근심도 없이

걱정도 없이

언제나 살아남는다


-김용국


#4. 도시에서 온 십대 남자아이(여자아이인 경우도 많다)가 숲에서만 살았던 노인과 야생의 숲에서 이상한 모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 결국 삶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변화하는 이야기.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쌓게 되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가 수없이 많이 보아온 익숙한 이야기이다. 그 단순함을 독특한 유머로 버무린 감독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절대 복잡하고 어려운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다. 예술성을 지향하는 어려운 예술영화보다는 사실 이런 단순하고 따뜻한 영화를 좋아했다. 영국에서 귀국하고 얼마 되지 않아 국내 유수 예술대학교의 졸업논문 지도교수를 맡은 적이 있었다. 논문 진행에 대한 공개심사를 하는 도중에 당시 내 상사인 그 분야의 매우 저명한 교수님이 내가 지도하는 학생의 논문에서 어떤 영화 제목하나를 발견하고 지적했다. 어떻게 이런 싸구려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레퍼런스로 넣을 수가 있냐고 학생과 내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순간 잘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영화의 시공간 사용이 매우 독특했기 때문에 논문의 주제를 뒷받침할 신선한 자료라고 생각했었다.  아, 나는 이 학교가 지향하는 방향을 따라갈 수가 없겠구나. 고귀한 예술영화만을 다루는 학풍이 너무 답답하게 여겨졌던 기억이 난다. 결국 나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학풍 운운했지만 사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짤린 것이다.

# 5.  복잡하고 추상적인 것보다 단순하고 구체적으로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게 나에겐 참 어렵다. 나는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 절대 그냥 시작하지를 못한다. 뭔가 계속 할까말까 고민하고 될지 말지 혼자 예측하고 망설이고 시간을 끈다.  결국 이런 게으름과 망설임 때문에 쉽게 시작해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들을 아예 해보지도 못하고 후회막심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내가 고안한 방법들 중 하나는 내가 더 복잡하게 핑계대기 전에 나를 강제로 그 일에, 그 환경에 그냥 집어넣어버리는 것이다. 운동하기 싫으면 잠들기 전에 운동복을 다 꺼내놓고 알람을 맞추고 가족들에게 아침에 일찍 나간다고 미리 선포한다. 정원에 심고싶은 식물들의 리스트를 이 농원 저 농원 가격 비교하면서 언제까지나 만지작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그냥 제일 처음으로 뜨는 농원을 클릭해서 주문해버린다. 뭐 이런식이다. 백퍼 성공하지는 않지만 나처럼 게으름장이 핑계쟁이에겐 꽤 효력이 있는 방법이다.


# 6.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분야에도 단순함의 원칙은 적용된다. 선 하나 긋는 거, 유치원 아이나 거장이나 뭐가 다를까 싶지만, 다르다. 똑같은 색종이를 오려도 앙리 마티스가 가위로 오린 색종이들의 조합이 이루어낸 아름다움은 다른 것과 비교하기 어렵다. 대학에서 서예 동아리에 있었는데 먹을 갈고 처음 한 일자를 긋고 선을 그리는 데만 한달이 걸렸었다. 단순함은 기본에 충실하다. 단순함에는 교만이나 허영같은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있지 않아 담백하고 겸손하며 결단력이 있다.  음악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분야도 같은 원칙이 적용될터.

앙리 마티스, Nadia with smooth hair(Nadia aux cheveux lisses), 1948, 종이에 애쿼틴트

#7. 내 안에 든 허영과 자존심의 바람이 빠지면 언젠가는 나도 영화에 대해 진심인 글을 여기에 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단순해진다면. 단순함이 복잡함보다 어렵다. 복잡한 것들은 얼핏 있어보이고 한눈에 멋져보이지만 그 수명은 길지 않다. 단순한 것들은 얼핏 쉬워보이지만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다. 단순한 것들은 살아남는다. 걱정도 근심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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