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역 배우님, 진짜 죄송합니다.

근데 저한테도...

by 씨네마조이스트

촬영장에서 이렇게 가만히 있어본 게 언제였더라.

숏드라마 연출을 맡았을 때, 폭우를 3시간 기다렸을 때.

음. 그때 말고는 없는 것 같은데...


촬영장에서 이렇게 무력한 경험은 또 오랜만이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내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니.

제발, 제발 아역 배우님께서 주무셔줬으면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 밖에 없다니.

물론 모니터 뒤에 숨어서 기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정말 기도만 하진 않았는데 뭐라도 씨부리고 디렉팅이라는 걸 했는데

이번엔 정말 그저 어머님을 믿으며 제발 잤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것 밖에 답이 없다니.


원래 같았으면 뭐라도 다음 컷을 준비했을 것 같은데

아역 배우님과 전투를 한 바탕 끝내고 나서 그런가 왜 움직이고 싶지가 않지.


아... 나도 잠에 드나...




쉭. 플래시 백.


끼야아아아강강강각각각강으아아각ㄱ가각

조금 전 오후 2시쯤.

갑자기 몰입하신 아역 배우님이 눈물 연기를 시작하셨습니다.
화들짝 놀란 연출감독. 촬영 감독에게 갑자기 뭐 하냐며 찍으라고 다급하게 말한다.

연출감독
(뭐 해?!?! 찍어!!)

촬영감독
(뭘 찍지?)

연출감독
(알아서 찍어 몰라)

어머니 역할 배우님
(???)

연출감독
(뭐해요?? 그냥 연기해 주세요!!)

어머니 역할 배우님
(연기를 하며, 무슨 연기를...?)

연출감독
(몰라요!!! 그냥 해주세요!!)

꺄아앙앙거ㅏㅇ강아각가각ㄱ각가각

연출감독, 촬영감독 옆에 딱 붙어서 윽박을 지른다.
왜 아역을 찍고 있냐고 어머니 배우를 찍으라고!!!
촬영감독, 어머니 배우를 찍는다.
그러더니 연출감독 다시 촬영감독에게 윽박을 지른다.
왜 어머니 배우를 찍냐, 아역 배우를 찍어야지!!!

꺄아아아각각가각가각

연출감독
네. 컷. 오케이요.

촬영감독
?

배우
?

연출감독
다음 컷 준비하자.

촬영감독
응;;


그렇다.

나도 뭘 찍었는지 모른다.

뭔가 아이가 우는 장면을 찍긴 찍었다.

근데 이야기를 과연 담았나.

모른다.

얼추.

얼추.

뭔가를.

뭔가를 찍긴 찍었다.




다음 컷. 그다음 컷. 그다음 컷.

뭐 어떻게 뭔가를 잘 모르겠지만 뭔가를 찍었다.

메모리는 있다.

이야기는 모르겠다.

분명 나는 컷을 열심히 짰다.

IMG_3F6A3A5B2A4B-1.jpeg
IMG_92BC8CB54C32-1.jpeg

그리고 뭔가 X표시를 하나씩 늘리고 있긴 하다.


근데 나는 뭘 찍었는지 모른다.

진짜 모른다.

이게 아무리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았는데

내가 촬영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몰랐던 적이 있나.


나는 분명 연출감독인데 내가 뭘 찍었는지 이렇게까지 몰라도 되나.


감독 자아 1,2 오랜만에 등장!
화려한 등장!은 아니고 자아 1은 화가 단단히 난 듯하다.
자아 2는 초점을 잃었다.

자아 1
이거 뭐 만들 수 있는 거지?

자아 2
... 몰라.

자아 1
너도 모르면서 그냥 찍는 거야?

자아 2
뭐 스탭들 배우들 다 모아놓고
우리 지금 그냥 X됐으니까 그만 찍자고 할 수도 없잖아.

자아 1
대책도 없니?

자아 2
몰라. 클립 있으면 뭐라도 만들겠지.


...뮤비 만들까 봐.

자아 1
...

자아 2
일단 흘러가보자.

자아 2, 촬영장 물을 향해 첨벙! 유유히 유영을 한다.
자아 1은 수영이 무서운지 제 자리에서 자아 2를 바라보고 있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자아 1
나는 자아 2, 너에게 모든 걸 맡긴다.

그대로 깨꼬닥.


음. 맞다. 나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지금 모든 컷을 바꾸며

아역 배우님의 상황에 맞게 모든 걸 바꿔가며 찍고 있다.


그렇다.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냥

그냥

찍고 있다.


거의 다 왔다.

하지만 장장 5시간 정도의 촬영을 강행하셨더니

체력을 거의 다 하셨는지 도무지 촬영을 하고 싶지 않으신 듯하다.


3층짜리 건물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불상만 한 아역 배우님 앞에
한참 개미만 한 연출감독이 무릎을 꿇으며 하소연을 하고 있다.

연출감독
아역 배우님!!
제발 저희 어머니 배우에게 반창고를 한 번만 붙여주시옵소서 제발!!
제발!!
그 컷 하나만!!
저는 그걸 찍기 위해서 이 영화를 기획했사옵나이다.

아역 배우님
싫.다.

연출 감독
이유를 한 번만 여쭤봐도 되겠사옵니까...!!

아역 배우님.
피곤하다.
낮잠을 자지 못하였다.

감독
그렇다면 지금 잠을 청하시겠사옵니까...!!
잠을 자는 장면 또한 있사옵니다.
단 2컷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역 배우님.
싫다.
재우려고 하니 잠을 자기가 싫구나.

연출감독
제가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아역 배우님.
미안하다.
너에게는 따로 방법이 없다.


결국 컷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마무리가 되었다.


모르겠다.

여느 때처럼 편집하는 나에게 맡긴다.



어떻게 편집했다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