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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피녜이로를 소개합니다

by 시네마토그래프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번에 시네마토그래프에서 주최하는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전과 내한행사에 앞서 마티아스 피녜이로라는 이름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영화를 많이 보시고 깊은 교양을 갖추신 분이라도 이 이름은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분이 보통의 경우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일 텐데요. 영화를 좋아하더라도 실험 영화나 지루한 예술 영화에는 관심을 두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님의 영화는 즐거운 오락 영화보단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 발자국만 더 내딛는다면 인생에 새로운 재밋거리를 하나 더 발견하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글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발을 살짝 담가 보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영역의 문을 열게 되신다면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영화는 예술을 위한 것일까요 오락을 위한 것일까요?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의 창작물을 선보일 때 가졌던 목적을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특성의 준거로 삼을 수 있을까요? 영화의 근본적인 목적성이 무엇인지는 딱 정해 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영화라는 보편적인 개념에 각 개인이 자신의 창조물을 내놓으며 그에 대해 가졌을 목적성을 모두 동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일본의 영화감독은 사회의 제도권이 포함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드러내기 위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극영화를 촬영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 제작은 이런 윤리적 목적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논리를 따라 이뤄지곤 합니다. 어떤 영화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지 고려하며 내린 판단을 기반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영화는 제각기 다른 목적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지므로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곳만 해도 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걸리곤 합니다. 이 사실은 목적성에 대한 문제를 더 어렵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한 영화에 하나의 목적성을 부여하려는 시도 자체를 바보같이 느껴지게도 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이론적인 분류에 앞서는 법이니까요. 이 글에서도 좀 더 초점을 맞추어 다룰 내용은 영화의 목적성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가 아닙니다. 이 글에서 다룰 것은 영화가 이 세상 속에서 가지고 있는 수많은 모습 중에 예술로서의 영화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영화가 인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이 양식이 가지는 가능성은 오락으로서의 영화를 만들어가는 속에서 탐구되고 발전되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뤼미에르가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선보이던 때만 해도 영상은 움직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움직이는 영상 자체에 익숙해지고 식상해진 사람들은 이제 서사를 영상에 담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화라는 문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영상을 만들어야 서사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습니다. 영화 연출의 방법은 단순히 연극을 풀 숏으로 촬영하던 것에서 발전해 가지를 뻗어 나갔습니다. 카메라와 대상과의 거리 조절, 화면 내 피사체 배치, 카메라와 피사체의 운동성, 숏들의 유기적 배치 등이 모두 고려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방법론은 사람들이 오락으로서 서사를 즐길 수 있을만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목적 속에서 탐구되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대중의 문화였고, 통속적인 것이었으며, 이 사실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이 매체를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차원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이후로 사람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좀 더 입체적인 것이 된듯합니다.


오락에서 시작한 영화는 도대체 언제부터 예술이라 불리게 되었을까요? 이 과정엔 셀 수 없이 많은 인과가 작용했을 것이고, 하나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추상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미학적으로 보려 하며 너무 깊이 있는 곳까지 다루진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예술가들이 영화라는 양식에서 본 가능성은 정말 많은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브레히트적인 방식을 통해 제3의 벽을 깨기도 하고(개인적으로는 이 이론이 본래 사용될 곳이었던 연극보다 영화가 더 탁월하게 이 아이디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관으로 이동해 현대 예술의 다양한 분야들과 경계를 넘나들고, 수많은 실험영화들이 영화 양식 자체에 대해 관념적인 확장을 하며 다양한 형식들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수많은 시도들 속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영화로서 텍스트를 다루는 시도입니다.


피녜이로의 영화 또한 텍스트를 다룬 영화입니다. 그러나 피녜이로의 영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우린 텍스트를 표현하는 새로운 수단으로써의 영화를 이미 접해본 바가 있습니다. 스트로브-위예라는 시네마의 커다란 한 축은 피녜이로 세대 이전에 영화 속에서 어떻게 텍스트를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찍어낸 예술가들입니다. 이들의 영화 속에서 텍스트라는 것은 단순히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말과 글이 아닙니다. 이들의 영화를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은 많이 움직이지도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국어책을 읊는 듯이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듣기만 해도 지루한 영화를 왜 만든 걸까요? 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이상한 영화를 만든 걸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할 때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것과 글을 통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몸의 감각으로 소리, 냄새, 음식, 현실적인 물체와 상황들을 경험하는 것은 문자가 표현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문자를 통해 인간은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해 왔습니다. 그 지식은 어떤 이야기와 시이기도 해서 전 세대가 행한 정서활동과 시대에 대한 통찰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떤 물체를 다루는 설명서나 일에 대한 매뉴얼로서 상황을 처음 접하는 세대에게 지침을 주기도 했습니다. 무너뜨릴 수 없는 논리의 굳건한 성을 쌓으며 인류의 지성을 누적시키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자가 세상을 표현한다는 게 어찌 보면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으시나요? 문자라는 것은 세상 그 자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전달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문자를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자세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문자에 대한 태도를 어릴 적부터 학습을 통해 익혀 나가고, 쓰고 읽는 것에 대한 방법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읽고 쓸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신이 연구한 것과 경험한 것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자에 대해 접근하면, 문자라는 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만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좀 더 편하게 와닿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나 소설 같은 문학 텍스트에 대해서도 이런 문자에 대한 개념을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시나 소설은 개인적인 정서나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런 규칙이나 형식도 없이 그냥 막 전달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겠죠? 그래서 시나 소설엔 규칙이나 형식이 있고, 이 틀을 통해 문학은 정서나 교훈 같은 것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학 텍스트이건, 다른 종류의 텍스트이건, 텍스트를 경험하는 것은 현실을 경험하는 것과 구분되는 하나의 방법을 가지고 있고, 이 사실을 통해 텍스트를 자연 그 자체와는 거리가 있는 사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요? 영화는 글자가 아닌 시각과 청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물론 현실 자체를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영화 감상은 자연을 경험하는 것의 본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한적인 감각을 통해서 이뤄지고, 서사의 전달을 위해 영화만의 방법론이 구성되긴 했지만 글자를 읽는 행위와 비교하면 현실과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에 텍스트를 읽는 것에 대한 감각을 가져오는 시도를 감행한 게 바로 스트로브-위예 부부였습니다. 물론 이 감독들은 영화가 오락으로서의 문화 속에서 발전해 오며 자신들의 방법론을 구축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새로운 시도는 기존의 모든 방법들을 발 밑에 둔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겠죠. 그렇기에 기존의 영화 문법과는 완전히 다른, 겉으로 보기엔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이 영화들 속에서 배우의 대사는 책을 읽을 때 생기는 리듬감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발화됩니다. 문학 텍스트에서 플롯 구조 나누기를 통해 만들어지는 서사의 리듬을 영화적인 분절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이들의 영화 속에서 텍스트는 기존 영화처럼 영화 제작의 도구(시나리오)로 쓰인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 것입니다.
스트로브-위예 뿐 아니라 말과 배우를 다룬 많은 영화감독들에게서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님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님의 영화 속에선 텍스트가 주요 소재가 되고, 인위적인 것에 대한 실물적 감각이 주요하게 다뤄집니다. 그럼 피녜이로 감독님의 영화는 어떨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님의 전작을 보지는 않았기에 제가 그 필모그래피에 대하여 어떤 하나의 정리된 감독론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본 ‘너는 나를 불태워’, ‘비올라’, ‘시코락스’, ‘이사벨라’를 바탕으로 이 작가에 대한 총체적인 인상을 소개하겠습니다.


피녜이로의 영화들은 확실히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 독창성을 가진 스타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존 카사베츠 영화처럼 인물들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한 쇼트가 많습니다. 그래서 배우의 표정이 아주 잘 보이기도 하고, 배우의 작은 움직임에도 초점 변화가 쉽게 일어나면서 카메라가 크게 크게 움직입니다. 이 카메라 움직임은 배우가 쏟아내는 텍스트와 몸짓과 어우러져 묘한 활기를 내뿜습니다.


<너는 나를 불태워>의 경우엔 체사레 파베세의 희곡 <레우코와의 대화> 중 2 챕터 ‘바다 거품’ 텍스트를 주축으로 해서, 원작과 관련된 다른 텍스트들과(고대 그리스에서 사포가 실제로 쓴 아프로디테 송가와 이에 관련된 배경, 체사레 파베세 실제 삶에 대한 증언 등) 이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정리해 만들어진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반복되는 대사와 이미지들, 시적이고 섬세한 글귀,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인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비올라>, <이사벨라>의 경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십이야>, <자에는 자로>가 영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지만 셰익스피어 원작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용되는 부분은 극히 일부입니다. 이 영화들은 연극을 올리는 극단이나 연극 오디션을 준비하는 캐릭터를 촬영하며 영화 속 세계를 셰익스피어 텍스트와 묘하게 겹치게 해 독특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이 겹침은 어쩔 때는 영화 속 등장인물과 셰익스피어 원작의 등장인물의 이름을 똑같이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 셰익스피어 텍스트와 영화 속 내용이 정서적, 의미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지점을 만드는 식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감정선을 영화 흐름에 묘하게 녹여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적 리듬을 가지는 게 특징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시코락스>는 셰익스피어 희곡 <템페스트> 속 캐릭터, 시코락스가 가지는 분위기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단편입니다. 도시의 시민들과 어두운 성 속에서 진행되는 오디션, 아름다운 숲의 풍경과 안개, 어두운 망토, 빛과 그림자 마녀 같은 배우의 마스크가 자연스레 섞여 있는 영화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 봤는데요. 짧은 소개 글이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인상이 편하게 느껴지고, 영화를 감상하고픈 욕구 또한 불러일으켰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인상적 설명을 통해 영화를 즐겁게 보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앞서 말한 텍스트에 대한 개념을 염두에 두시고 보시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으실 겁니다. 보는 이에게 감정의 고저를 만드는 서사가 없는 영화적 세계 속에서, 발화되는 텍스트들이 어떻게 의미가 옅어지며 분위기를 형성하는지, 어떻게 영화를 한정이 없는 자유로움에 가닿게 만드는 지를 느껴보세요.


문화의 축소 과정에선 아주 다양한 시도가 선보여지기 마련입니다. 사진이 발명된 후 회화는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처럼 그리는 것이 그림의 전부였던 미술계는 오히려 자신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났습니다. 화가는 자신만의 새로운 화법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생존에 위협적인 환경에 놓이게 된 유전자 군이 급속도로 많은 돌연변이를 발현시키는 모습과 닮아 있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거의 150년의 시간 동안 영화라는 문화는 이어져 왔고, 이제는 이 문화 또한 축소기에 접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화의 황금기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아쉬워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것이 흥하고 쇠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데 큰 우울에 빠져 있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회화도, 조각도, 문학도 모두 그들의 전성기를 지나 축소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문화들은 살아있으며 우리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예술들도 그러했듯, 축소 과정 속의 영화 또한 오락으로서의 영화에서 벗어나 아주 다양한 시도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다양한 시도 속에서도 특별해 보이는 피녜이로 감독님의 영화를 즐겨보세요. 작품전에 오셔서 글에는 나오지 않은 영화들도 경험하시고 특별한 세계를 관찰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박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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