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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Jan 27. 2024

굿 나잇 앤 굿 럭: 어둠 속 공허한 메아리일지라도

딸 J의 시선



2005년 작 [굿 나잇, 앤 굿 럭]은 연출을 담당한 조지 클루니가 배우로서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자신이 가진 기량과 능력을 훌륭히 입증했던 작품이다. 제작 초기 그의 연출 ‘데뷔작’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지만 제작비 마련을 위해 L. A.의 저택을 담보로 삼았다는 소식이 들리며 “과연 어떤 영화를 찍으려 했길래”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개봉을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영화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언론인 중 한 사람인 에드워드 R. 머로우(데이빗 스트라한)와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조지 클루니)가 1950년대 방영되던 자신들의 시사 프로그램 “See It Now”를 통해 당시 미국 사회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은 “Red Scare”(“적색 공포기”라고 불린,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R. McCarthy)에 의해 시작된 극단적 반공 정서)에 맞섰던 실제 역사를 다루고 있다. 머로우의 직업적 경력을 짧게 소개하자면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선에서 런던 대폭격을 중계하며 종군 기자로서 대중적 신뢰와 명성을 쌓게 된 인물로, 뉴스를 전하는 방식이 라디오나 신문 같은 전통적 매체에서 TV라는 새로운 시도로 옮겨가는 과도기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1 세대 저널리스트”라고 불릴 만한 언론인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제목이 머로우가 전쟁 중 리포트를 마무리할 때 쓰다가 나중엔 “See It Now” 방송을 끝맺을 때도 사용하게 된 - 머로우를 대표하는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로도 기억되고 있는 - 문구의 인용임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들었던 생각은 일단 이 작품이 관객에게 ‘친절한’ 영화(요즘 표현을 빌리자면)는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총천연색 ‘볼거리’에 익숙한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는 흑백영화라는 점이 그렇다. 게다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짧은 자막 외에는 영화의 무대가 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매카시즘”이라는 용어가 지금까지 사용될 만큼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으니 관객들도 어느 정도의 기본 상식은 가지고 있을 것이라 전제했다 해도, 이 영화에서 표현되고 다루어지는 여러 사건들(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애니 리 모스 사건”이나 “라둘로비치 중위 사건” 등등)에 대해 부연 설명이나 대략적 정보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들은 최소한의 사실, 그러니까 그 시절 기자들이 실시간으로 모니터한 청문회 영상들과 그에 대해 반응하고 의논하는 대사 등을 들으며 스스로 공백을 채워 가야 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첫 장면(머로우의 공로를 치하하는 이벤트)에서 그의 약력이 소개되는 순간을 빼고는 머로우의 경력이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설명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프로듀서인 프렌들리와 다른 기자들 역시 그들이 ‘일’을 하는 것 외의 다른 모습은 거의 그려지지 않고 있다. 관객은 머로우를 포함한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의 성격, 사생활, 배우자와의 관계 등 각 캐릭터를 ‘사람답게’ 만들고 공감 가능한 인물로 형성시키는 감정적 정보와 도구를 하나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사내 결혼을 금지하는 CBS 방송국의 사칙에 따라 결혼 사실을 숨기고 사는 두 등장인물 “셜리 워시바"(패트리샤 클락슨)와 “조 워시바"(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사생활을 잠시 보여 주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도 둘이 몰래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는 부부이자 동료라는 사실 외에 그들의 자세한 서사나 감정들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내내 인물들이 방송국의 스튜디오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관객들 또한 방송 부스, 회의가 진행되는 뉴스룸, CBS의 임원 사무실 등 마치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의 비좁은 장소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관객들도 이런 한정된 공간 안에 갇혀 ‘바깥 세상’의 소식을 신문을 통해, 혹은 다른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 받기만 할 뿐, 실제로 관찰할 기회를 제공 받지 못하는 것이다. 머로우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신문에 실린 논평이나 방송국에서 마주치는 동료 언론인을 통해서만 매카시를 저격하는 자신들의 방송에 대한 반응을 접하면서 실제로 그것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것처럼, 관객들 또한 머로우와 기자들이 제작한 방송이 이뤄 낸 정치적 쾌거나 국민들의 정서적 공감을 경험하는 대신 ‘꾸역꾸역’ 할 일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상황에만 집중하게 된다.


작품이 이런 식으로 설계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그 어떤 불필요한 ‘기교’도 작품에 포함시키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가장 표면적인 면에서는 작품 전체를 흑백으로 제작한 것 자체가 영화의 컬러감을 없앰으로써 어떠한 ‘효과’나 ‘화려함’으로도 관객의 시선과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여진다(물론 영화가 자주 이용하는 1950년대 기록 영상들이 흑백이다 보니 그것에 맞추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지만, 흑백 영화를 연출한 이유가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 확신한다). 명암이 두드러지는 흑백의 스크린 속에서 관객은 배우들의 연기에, 또 시대의 암울함에 보다 더 몰입하게 된다. 흑백논리로 나뉘던 1950년대의 상황, 다시 말해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로 사람을 구분하며 가족들끼리도 서로를 고발하고 비난하기를 강요 받던 시대의 비인간성이, 따뜻한 색감이 모두 추출된 차가운 흑백의 카메라를 통해 더욱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촬영 방식과 ‘미장센의 최소화’는 작품 내에서 제공되는 정보나 배경의 유형과도 같은 결을 띤다. 작품은 의원 매카시의 행보와 당시 사회의 방향에 대해 극히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는데 - 매카시가 이끄는 반공 세력들에 의해 많은 미국 시민이 실제적 증거나 공식적 재판 없이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를 갖게 되었다는 -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그러한 최소한의 정보만으로도 당시 벌어졌던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법적인지 관객들 스스로 판단하고 깨달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즉 관객들의 인식 수준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영화가 관객에게 역사적 상황 설명을 자세히 하지 않는 것, 또 등장인물들의 배경과 관계, 그들의 개인적인 고뇌와 어려움을 지켜보며 감정적 유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사설이나 논평(editorializing) 없이 뉴스(바꿔 말하면 “팩트")에 대해 ‘보도’만 하려 하는 언론의 방향성을 따르기 위한 의도로도 이해된다. 관객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어떠한 장치도 없이 “진실 전달"이라는 최소한의 임무만 수행하는, 하지만 오히려 그 메마름을 통해 더욱 강한 신뢰성과 설득력을 부여하려는 노력 말이다.


또한 영화는 머로우와 프렌들리, 또 다른 등장인물들이 ‘영웅화’되는 것(어떤 면에서는 ‘주인공화’되는 것마저)을 결벽적으로 경계한다.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머로우와 동료들이 인간적인 고통을 겪어 가며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다가 결국엔 ‘옳은’(더 정확하게는 ‘의로운’) 선택을 해 내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영화는 허용하지 않는다. 머로우와 프렌들리는 언제나 ‘덤덤’하게, 심각해지는 상황이나 방송에 대한 외압도 짧은 농담과 자조적인 고집 따위로 넘겨 버린다. 실제의 머로우는 많은 갈등과 고통, 스스로에 대한 의심 등의 과정을 겪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영화 속에서 그의 심정적 소용돌이는 아주 가끔, 카메라가 꺼지고 난 뒤 찰나에 스쳐가는 표정이나 은연 중 내 보이는 손짓 등을 통해 관객들이 추론할 ‘여지’만 남길 뿐이다. 사실 작품 내에서 “좌파"라고 폄하 당했던 동료 언론인 홀렌백의 자살 외에 머로우와 기자들이 매카시에 대항하며 겪는(또한 겪었을) 여러 난관도 깊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광고주가 떨어져 나가며 제작비를 머로우와 프렌들리가 대신 채워 넣는다거나 - 생각해 보면 사실 엄청난 결단인데도 - 방송국 사장에게 불려 가 경질을 당하는 등의 ‘고난’을 보여 줄 때조차 그다지 공들인 표현이 사용되지 않는다. 영화의 이런 연출 방식이, 머로우가 본시 굳센 신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강인한 인물이었다는, 혹은 ‘옳은 일’을 하고 공포 정치에 맞서 싸우면서 그가 감내했던 불이익과 고통이 ‘별 것 아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저 머로우와 동료들이 했던 일이 ‘당연한’ 책무라는, 또 그들을 방해하는 여러 어려움 앞에서 그들의 - 그리고 우리의 - 의무는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다는 담담한 관점이 제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1950년대 당시의 영상 기록물, 즉 매카시가 주도한 청문회 녹화본은 물론 광고 영상들까지 그대로 사용한 방식은 관객의 몰입이나 흥미를 넘어 작품을 최대한 ‘진짜’로 만들려 한 -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하려 한 - 연출진의 의도적 노력에 기반을 두었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화를 위해 실화를 각색하는 일은 불가피했겠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감독의 사견이 배제된, ‘가짜’보다 ‘진짜’의 영역에 더 가까운(다큐멘터리와 같은) 작품을 만들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실제로 영화는 매카시 의원을 ‘악하게’ 묘사하기 위한 노력을 굳이 들이지 않는다. 그의 성격적 결함이나 그가 이끈 반공 세력에 의해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의 서사를 부각하면서 관객이 매카시에게 악감정, 혹은 감정적 거부 반응을 품도록 유도하는 대신 영화는 매카시 의원의 실제 영상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영화 속에서, 또 실제로도 머로우와 그의 팀이 매카시를 향해 인신 공격을 가하는 대신 당시의 청문회 영상에 드러난 그 스스로의 언사에 의해 매카시를 비판한 것과 정확히 같은 접근법인 셈이다.   


이처럼 최소한의 정보만 전달하면서 감정적 호소 없이 ‘사실’의 힘에 의지하다 보니 영화가 다소 차갑게 느껴짐은 부인할 수 없다. 캐릭터들과의 감정적 유대 관계, 또 그를 통한 서사의 개인화에 익숙해진 관객에게는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이 작품을 이렇게 제작한 이유는 이 영화가 단순히 어느 특정 시대에 국한된, 그러니까 한때 일어났지만 이젠 ‘과거’가 된 역사적 사건을 다루었다기보다 공포와 선동에 대한, 또 그 소용돌이 안에서 견지되는 인간성과 신념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우화’와 같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일 듯하다. “공산주의"라는 공포스러운 허수아비를 세워 두고 반대 의견을 억누르며 탄압했던 1950년대뿐 아니라 7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공감하고 경각심을 키울 수 있는, 그 어느 때 보더라도 시기적절한 작품이 되길 바래서였기 때문이 아닐지.





그래서인지 영화는 머로우와 그의 팀이 결과적으로는 ‘승리’를 이룬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관객들에게 별다른 카타르시스를 선물하지 않는다(정말 끝까지 불친절한 작품이다). 머로우와 동료들의 보도를 통해 사회, 문화적 기류가 바뀌고 매카시는 상원에서 견책 당하며 권력을 잃지만, 막상 머로우의 시사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이 골치 아픈 뉴스 대신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더 선호한다는 이유로 폐지와 다름없는 결말을 맞는다. 그렇기에 영화의 시작과 끝이 자신의 ‘공로’를 치하하는 언론인들의 모임에서 머로우가 칼날을 문 듯 날 선 언어로 당시의 언론을 비판하는 장면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깊다.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매카시라는 어떤 ‘악인’ 혹은 ‘위협’을 무너뜨린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대중을 계몽하고 격려하며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는”(speak truth to power) 임무 대신 오락과 일시적 즐거움을 통해 사회가 당장의 현실과 불의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언론 세력에 대한 고발, 또 그에 자발적으로 동참해 스스로 눈과 귀를 가리고 현 상황에 안주하는 대중 – 바로 우리 – 에 대한 질책일지 모른다.


머로우가 자신을 향한 칭송을 누리고 즐기는 일을 거부하며 언론의 자성을 촉구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버스트 숏, 로우 앵글, 클로즈업 등등의 타이트한 앵글로 그를 잡으며 머로우의 얼굴을 떠나지 않고, 그의 어깨 너머로는 어둠 말고 그 어떤 배경도 보여지지 않는다. 배우 출신 감독답게 배경이나 소품 대신 연기자 자체에 집중하는 촬영법과 흑백을 대비하는 연출이 영화 내내 발견되지만, 개인적으론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 모든 것이 정점을 찍는 듯 느껴진다. 캄캄한 배경만을 뒤로 하고 카메라 앞에 선 머로우는 당장에라도 자신을 삼킬 듯한 어둠 속에서 홀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외로워 보인다. 영화의 전체 장면들 중 가장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그러나 여전히 이성적인 언어로 현실을 꼬집는 머로우는 한때 모두의 안녕과 평안을 바랐던 인사말을 경고처럼 남기고 단상을 떠난다. “Good night, and good luck.” 그가 앵글을 떠나고도 카메라는 한동안 같은 자리에 머무르며 여전히 머로우 뒤의 어둠을 비춘다.  



      


흑백논리, 증오와 무지의 열성이 들불처럼 우리를 위협하는 시간의 반복에 갇혀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 지긋지긋한 퇴화의 굴레 속에서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일은, 영화 속 머로우같이 듣는 이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새까만 공허에 그저 외침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야 하는 - 그리고 나아갈 수 있는 - 이유는 무력과 공포심을 이용해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압제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 나오는 목소리가 언제나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흔들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머뭇거릴지언정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쌓여 이뤄 내는 승리의 역사가 계속될 것을 또한 믿는다. 그 찬란한 ‘언젠가’가 지금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을지라도.  죽음만이 끝이었던 세상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유산을 이어받은 우리가 앞장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어둠 속에서 침묵하지 않는 모두에게 축복을.   




엄마 C의 시선 



“굿 나잇 앤 굿 럭(Good Night, and Good Luck)”은 195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2005년 개봉되었던, 유명 배우 조지 클루니(George Cloony)가 각본과 연출, 배역을 맡은 정치 다큐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에드워드 R. 머로우(Edward R. Murrow)는 미국의 주요 방송사 중 하나인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에서 1935년부터 1961년까지 방송 진행자로 이름을 날린 실존 인물로, 그가 진행했던 시사 다큐 쇼 “See It Now”는 7년의 방영 기간(1951~1958) 동안 네 차례나 에미상을 수상한 유력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진행자인 머로우, 프로듀서인 프레드 프렌들리(Fred Friendly)가 이끈 방송팀 또한 당시 상당히 민감한 소재이던 인종 차별 정책, 이민 노동자 착취, 남아공 문제, 매카시즘(McCarthyism) 등을 주목하며 다루었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정의와 진실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언론인들의 집단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 “매카시즘”은 1950년대 미국을 광풍으로 휩쓸고 간 극단적 반공(反共)주의를 일컫는 말로, 1950년 2월 미국 공화당 상원 의원인 조지프 매카시(Joseph R. McCarthy)가 미 국무성 내에 200명 이상의 현직 공산당원이 활동 중이고 자신이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며 진보 성향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공산주의자(communist)”로 지목했던 - 우리도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 어처구니 없는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라 불리는 이 사건의 발생은 1950년대의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를 함락시킨 양대 진영의 이념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기존 패권을 쥐고 있던 유럽 국가들이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의 여파로 몰락하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초강대국이 등장하며 부수된 현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두 나라의 갈등으로 인해 국제 정세에서 “동-서”의 개념은 ‘방향’이 아닌 ‘진영’을 구분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되기도 했지요. 



 


영화가 자세히 소개하는 매카시즘의 단적인 사례는 1953년 10월 미 공군측이 처분한 공군 중위 마일로 라둘로비치(Milo Radulovich)에 대한 고발과 직위 해제 사건으로 예시되는데, 그런 조치의 이유가 단지 라둘로비치의 아버지가 세르비아 신문을 봤다는 것인 데다 그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누이를 고발하면 군에 남도록 해 주겠다고 회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문제가 불거집니다. 사실 이 사건은 동서 진영의 냉전이 한 국가 안의 내부 냉전으로까지 확산되던 상황을 일부 정치인이 자신들의 세력 유지 수단으로 활용한 대표적 경우로서 –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 정권도 이 사상을 ‘계승’하면서 시대적 ‘행운’도 따라 주었는데 – 이러한 분위기가 낳은 사회적 대세, 즉 매카시의 주장에 반대하는 일 자체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으로 인하여, 그의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한 언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항하지 못하는 양상이 지속되었습니다. 




실제로는 경력 위조, 금품 수수, 음주 추태 등으로 다가오는 재선을 앞두고 궁지에 몰려 있던 매카시가 급조해 낸 돌파구에 불과했지만 일단 그가 이 ‘소재’에 불을 붙이자 사태는 들불처럼 번져 갔고, 정작 매카시 자신도 ‘진짜’ 공산주의자를 지목하거나 밝혀 내지 못했을 만큼 거짓됨과 부당함이 곧 드러난 ‘해프닝’이었는데도 정계와 관계, 예술계, 언론계에 이어 대통령의 정책까지 문제시되며 - 역시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 본 듯한 - 광란의 형태로 진행된 이 사건이 만들어 낸 피해자의 수는 엄청났다고 합니다.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수감된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으며, 12,000명 가량의 사람들이 의혹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매카시즘의 타격이 특히 심했던 문화계, 그중에도 영화계에서는 300명이 넘는 배우, 작가, 감독들이 비공식적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해고되었고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등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한동안 미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머로우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고 그의 방송에 지지 의사를 밝혔던 CBS의 방송 진행자 돈 홀렌백(Don Hollenbeck)이 극우 방송인 오브라이언(Jack O'Brian)과 매카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장면을 보면서 말이나 글로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현실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우 이선균 씨의 죽음으로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한국의 비정상적 정치-언론계의 구조가 바로 그와 같으니 말이지요. 매카시즘은 70-80년 전의 과거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고 영화에 연설 장면이 잠시 등장하는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도 “매카시즘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다(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라고 - 매카시즘에 포함된 철자 “is”를 과거형 “was”로 바꾸어 – 말했다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 체제가 사라진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적색 공포(Red Scare)”는 과거의 언어가 아니며, 특히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정치인들이 끌어다 사용하는 무척 편리한 개념이 되기도 했습니다. 


미디어의 계몽적 역할 또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크고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 1958년 10월 25일 열린 “머로우에 대한 헌정식(A Salute to Edward R. Murrow)”에서 그는 “역사를 만드는 언론인들이 부유하고 편안하고 무관심함으로써 불쾌한 정보를 외면하고 본질을 흩트려 사람들을 속이는데 동원되는 자기기만을 계속한다”라고 언론의 현실을 비판했고, 끝부분에 다시 이어지는 같은 헌정식 장면에서도 머로우는 “가끔은 대중에게 [정확한]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면서 오락 프로가 점령한 어느 일요일 밤엔 부모와 자녀들이 미국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귀 기울이게 하고, 그러다 어느 때는 인기 코미디 쇼 대신 미국의 중동 정책에 국민들이 관심을 더 갖게 합시다”라고 제언합니다. 매카시즘의 몰락 이후 그에 필적할 만한 문제로 대두된, 저널리즘의 가치를 훼손하는 방송의 상업화를 우려했던 머로우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기자들의 정신이 살아 있지 않으면 텔레비전은 그저 사각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전선과 발광 장치들(wires and lights in a box)에 불과할 것”이라는 일침을 가하기도 했지요.   





교회가 - 사실상 목회자들이 - 자신의 편향된 정치색을 드러내며 신자들의 ‘사상’까지 좌지우지하는 일도 적지 않게 벌어지지만, “좌우”나 “동서” 등의 이념과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옹호하고 편들어 주시는 쪽이 어느 편일지, 다시 말해 자신의 소유나 권리에 손실이 올까 봐 이념을 분쟁의 소재로 삼곤 하는 ‘가진 자,’ 기득권층의 사람들일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혹 내더라도 주목 받지 못하는 ‘없는 자,’ 소외된 사람들일지는 성경의 몇 구절만 들춰 봐도 너무나 명백해지는 사실입니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 못지않게 교회의 사회적 기능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그 같은 사실 때문이지요. “운/운수(luck, fortune)”라는 것을 믿지 않기에 “운 좋다”는 뜻의 “lucky”나 “fortunate”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 - 대신 “축복 받았다”는 의미의 “blessed”를 사용하는 -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행운을 빈다(Good luck)”와 같은 인사말 역시 주고 받지 않는 만큼, 오로지 자기 삶에만 몰두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Good luck”이라는 형식적 인사를 건네는 무심한 이들과 달리, 각자가 선 자리에서 과연 어떤 정치, 어떤 언론이 힘없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 편에 서고자 노력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함으로써 온 세상에 “God bless”라는 축복의 인사를 전하는, 주님의 메신저로서의 우리 모두가 된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매카시즘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엘렌 슈레커(Ellen Schrecker)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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