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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Mar 29. 2024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다시 본
4편의 영화들

* 지난 3월 8일은 올해로 114주년을 맞는 - 1911년 처음 기념되기 시작한 -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이었습니다. 그 첫날을 3.1절로 시작하는 3월은 한국인들에게 무척 뜻 깊은 달인 만큼 지난 회에 올렸던 한국 영화 “동주”에 이어 역시 “독립(Independence)”을 주제로 하는 외화 한 편을 다루려고 계획했다가, 나름대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세계 여성의 날”도 그 못지않은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에 이번 편에는 저희 각자 ‘여성 영화’의 대표격으로 기억하는 작품들을 먼저 다루는 것으로 결정을 바꾸었습니다. “여성의 날”을 국제적 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고 맨 처음 제안했던(1910년) 사람은 독일의 여권 운동가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으로, 1857년 3월 8일 뉴욕시 섬유, 의류 분야 여직공들의 불공정 근로 조건 / 불평등 여성 인권에 대한 항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한 후, 1908년 3월 8일에는 의류 산업 종사 여성 노동자들이 뉴욕 거리를 가로지르며 미성년자 노동 금지와 여성 참정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임으로써 “세계(국제) 여성의 날” 제정의 단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엄마 C의 선택


 

제가 소개하려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와 “스핏파이어 그릴(The Spitfire Grill)”은 1991년과 1996년 각각 만들어졌다는 영화 제작 시기의 근접성뿐 아니라, 시골의 작은 음식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공간적 유사성, 무엇보다 여성을 포함한 소외 계층들에 초점을 맞추는 주제 의식 등에서 다양한 공통점을 가진 영화들입니다. 물론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1987년 출간된 패니 플래그(Fannie Flagg)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라면, 반대로 “스핏파이어 그릴”은 영화의 개봉과 함께 많은 화제를 일으키면서 책과 뮤지컬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문 차이점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한국에서도 2007년의 뮤지컬 초연 이후 2021년 겨울 재공연되었음을 이번 글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


‘상큼한’ 제목을 가진 - 하지만 내용은 그다지 상큼하다고 할 수 없는 - 이 영화는, 저희가 예전에 소개했던 “그린 마일(The Green Mile)”과 유사하게 화자(話者)가 청자(聽者)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 주는 과정에서 두 개의 내러티브가 시공을 넘나들며 교차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어중간한’ 나이와 ‘볼품없는’ 외모에 남편의 무관심까지 더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가던 40대 여성 “에블린(Evelyn)”은, 남편 “에드(Ed)”와 함께 요양원에 있는 시숙모를 찾아갔다가 그곳에 거주하는 80대 노인 “니니(Ninny)”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성격이 괴팍한 남편의 숙모와 달리 늘 미소 띈 얼굴과 다정한 말투로 자신을 맞아주는 니니를 자주 찾아가 대화를 나누게 된 에블린에게, 자신도 요양원 생활에서의 외로움이 힘겹던 니니는 과거에 경험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 주기 시작합니다. 





니니가 들려 주는 60년 전의 – 원작 소설이 1987년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1920년대에 일어났던 일인 –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잇지(Idgie)“와 “루스(Ruth)”라는 이름의 두 여성으로, 앨라배마 주의 휘슬 스톱(Whistle Stop) 마을에서 자라는 동안 각별한 사이의 오빠 “버디(Buddy)”와 그가 사랑하는 여성 루스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잇지가 뜻하지 않은 기차 사고로 오빠를 잃게 되면서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며 어두운 청소년기를 보내는 한편, 성인이 된 잇지를 만나 잠시 우정을 회복했던 루스는 조지아주에 사는 “프랭크(Frank)”라는 남자와 결혼한 이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루스를 보러 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잇지가 임신 중이던 루스를 휘슬 스톱으로 다시 데려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카페를 차리고 함께 일을 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들을 감싸 주고 그들을 위한 따뜻한 쉼터가 되어 줍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늘 오래 가지 않는 법, 루스를 찾아와 그녀가 낳은 아들을 데려가겠다는 협박을 계속하던 프랭크가 아이를 몰래 빼앗아 가려고 아무도 없는 그들의 집으로 침입했다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용의선상에 오른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결국 영화 안에서 밝혀진 사실은 그들과 함께 살던 흑인 여성 “십시(Sipsey)”가 그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흑인들을 옹호하며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여 “KKK(백인 우월주의 결사단)”의 협박까지 받았던 그들이었던 데다 죽은 프랭크도 KKK의 일원이었기에 십시의 범행이 밝혀졌다면 사형이나 끔찍한 보복을 - 설령 정당방위였더라도 - 면하기 어려웠겠지만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사건은 미제로 종결됩니다. 영화의 끝부분은 이처럼 긴 이야기를 계속 듣기 위해 자주 니니를 찾아가 만나는 동안 자신의 열등감에서도 적지 않은 회복을 얻었던 에블린이, 갑작스런 사정으로 오갈 곳이 없어진 니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오래된 이야기 속의 루스와 잇지는 현재를 살고 있는 니니와 에블린를 한 가족처럼 이어 주었을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을 스스로에게 투영해 낮은 자존감으로 억눌려 있던 에블린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도 해 주지요.  



                                             “스핏파이어 그릴(The Spitfire Grill)


수감 생활을 마치고 교도소를 나선 한 젊은 여성이 늦은 밤 미국 북동부의 작은 마을 길리아드(Gilead)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 젊은 여성, 즉 주인공인 “퍼시(Percy)”에게 남다른 ‘사연’이 있을 것임을 처음부터 짐작게 합니다. 지역 보안관의 추천으로 “한나(Hanna)”가 운영하는 음식점 “스핏파이어 그릴”에서 일을 하게 된 낯선 그녀를 바라보는 주위의 눈길은 온통 의혹과 경계, 그 자체이지요. 검소하면서도 고지식한 청교도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퍼시가 교도서에서 출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가 자신들의 마을에 온 이유를 캐내려고 하지만, 우연히 알게 된 길리아드의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된 것이 자신의 발길을 이끈 유일한 이유였던 그녀는 의심하는 그들에게 달리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경계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그녀를 특히 싫어하던 한나의 조카 “네훔(Nahum)”이 식당 일로부터 그녀를 배제하려 함에도,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다리를 다치는 사고를 당했을 때 침착하게 자신을 도와준 퍼시에게 신뢰를 갖게 된 한나는 도리어 자신의 식당을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깁니다. 요리 경험이 전무한 퍼시를 찾아와 도와주는 네훔의 아내 “셸비(Shelby)”는 편견 덩어리인 남편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따뜻하게 퍼시를 대하며 아름다운 우정을 쌓아 가고, 처음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던 “조(Joe)” 역시 그녀의 거부와 주위의 만류 속에도 청혼을 감행할 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심성을 보여 줍니다. 숲속에 홀로 사는 방랑인을 위해 음식을 놓아 두는 한나의 모습을 우연히 보고 자기도 그 일을 몰래 돕기 시작했던 퍼시가, 그릴을 매각하려는 한나에게 기발한 아이디어, 즉 100불의 돈과 함께 각자의 특별한 사연을 적어 보내도록 공고한 후 그중의 한 사람을 뽑아 식당을 거저 주는 방식을 제의하는데, 전국 각지에서 특이한 사연들이 몰려 들면서 식당과 마을 분위기도 활기를 띄게 됩니다. 그러나 퍼시의 ‘저의’를 계속 의심하던 네훔은 그녀가 살인죄로 복역했다는 사실을 알아 내고는 식당을 경품으로 내놓은 것도 그렇게 해서 생긴 돈을 훔쳐 가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모함하지요. 



 


그녀가 숲속에 자루를 내다 놓는 것을 본 네훔은 일부러 금고에 있던 돈을 꺼내 자루에 옮겨 두었고, 그 속에 음식이 있는 줄로 생각한 퍼시가 방랑인에게 주려고 자루를 숲속으로 가져가면서 돈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의심합니다. 변함없이 자신의 결백을 믿으며 홀로 숨어 들었던 외진 교회까지 찾아온 셸비에게, 퍼시는 10대 시절 수년간 자신을 성폭행하던 의붓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했었고 아이가 유산된 후에도 가해를 멈추지 않는 그를 살해한 뒤 감옥에 가게 된 과거에 대해 털어 놓습니다. 퍼시가 자루를 숲속에 두었던 것임을 깨달은 한나는 숲속의 방랑인이 베트남전 참전 후 사회 부적응자가 된 자신의 아들임을 고백하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자위대가 그를 위험 인물로 오인해 추격하자 그에게 위험을 알리려고 숲속을 뒤지던 퍼시는 강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오해와 편견에 대해 뒤늦은 회한을 표하고, 사연 공모에 지원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당첨된(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는 여성인) “클레어(Claire)”를 한나를 포함한 길리아드의 이웃들이 모여 환영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그 끝을 맺게 됩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 주는 단 한 사람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듯, 자신의 치부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위로 받고 지지 받을 수 있는 ‘공간’ 역시 모든 인간에게 있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고려하면, “백인 우월주의”가 판을 치던 1920-30년대 미국 남부라는 환경 속에서 주위의 온갖 비난과 위협을 무릅쓴 채 소외되고 억압 당하는 이들의 보호처, 안식처가 되어 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와,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이웃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에 시달리던 한 여성에게 잠시나마 쉴 곳이 되어 준 “스핏파이어 그릴”은, 어쩌면 척박한 세상 가운데에도 가장 안전한 어머니의 모태 같은 곳, 어떠한 과거의 잘못이나 허물과도 관계없이 우리를 받아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품속 같은 장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흑인에게 식사를 제공한다고 비난하는 이웃들에게 “피부 색깔을 논하기 전에 그 피부 속의 사람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먼저 깨달으라”고 지적하던 잇지의 일갈에는, 자신의 뚱뚱한 외모를 빈정대고 무시하는 남편과 주위 사람들 때문에 주눅 들었던 에블린이 잇지와 루스의 삶을 전해 들으며 달라져 가는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이 두 영화 안에서 서로 ‘연대’하는 사람들이 단지 “여성들”만이 아니라 주위의 억압과 편견을 함께 ‘부숴 나가는’ 같은 “인간들”이라는 사실도 의미하는 바가 역시 큽니다. 예전에 포스팅한 “블랙 팬서(Black Panther)”의 영화평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서로 ‘다른’ 성별과 인종, 그리고 그가 겪은 과거 등은 다양성을 사랑하고 그를 통한 조화와 화합을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하신 조건입니다. 각자의 다양성, 서로 간의 ‘다름’이 마치 ‘틀림’을 의미하기나 하는 양 차별과 구분을 일삼는 부당한 행위는 타락 이후 인간이 드러내는 죄성의 발로임이 하루빨리 모든 이들에게 인식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딸 J의 선택



이번 편의 글에서는 지난 3월 8일 있었던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을 기념하는 의미로 엄마와 내가 각각 “여성”이라는 주제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영화 몇 편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인구의 절반(혹은 그 이상)이 여성인 세상에서 아직도 ‘여성 중심’ 영화를 굳이 따로 분류해야 한다는 현실이(‘남성 중심’ 영화라는 표현은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굉장히 씁쓸하긴 하지만 말이다.


글을 이어 가기에 앞서 이 영화들이 여성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 중 가장 중요하거나 뛰어나다는 생각은 전혀 없음을 먼저 밝히고 싶다. “여성 중심 서사”라는 맥락에서 봤을 때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영화들 몇 편을 고르긴 했지만 지극히 개인적 취향의 반영일 뿐임을 감안해 주시기 바란다. 또한 ‘대놓고’ 여성 인권을 주제로 삼는 영화들, 예를 들어 [82년생 김지영](2019)이나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한 [서프러제트](Suffragette)(2015) 같은 작품들은 일부러 다루지 않았다. 


 

                                           [델마와 루이스] (Thelma and Louise)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91년작 [델마와 루이스]는 페미니스트 시네마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로드 무비” 혹은 “버디 무비”라는 넓은 장르 안에서도 큰 사랑과 인정을 받은 영화이다. 개봉 당시만 해도(뭐 사실 지금도 그렇게 큰 변화는 없는 듯하다)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들이 처벌을 피해 도망치는 플롯의 “범죄 로드 무비”가 전통적으로 남성 캐릭터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 가장 유명한 예로 이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1969년작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가 있듯 - 이 작품이 당시 얼마나 신선하고도 충격적으로 느껴졌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967년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나 1973년작 [황무지] (Badlands) 등 여성이 범죄자 2인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작품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 속의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연인인 남성 파트너와 함께 행동할 뿐 아니라 은행 강도, 연쇄 살인 등 지극히 ‘마초’적인 범죄에 가담한다는 점에서 [델마와 루이스] 속 여성들과 구별된다.


사실 이 영화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고 싶은 작품인지라 여기에선 말을 조금 아끼려 한다. 그래도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이 영화가 같은 장르의 작품에서 줄곧 주인공을 맡았던 ‘남성’의 자리에 ‘여성’을 넣으며 성별만 바꾸는 식의 ‘단순한’ 전환에서 그치는 대신, 주인공이 ‘여성’이기 때문에만 성립할 수 있는 갈등과 흐름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획기적’(transgressive)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가 작품 내내 경찰을 피해 도주하게 되는 이유부터가 ‘여성적’인데 - 주인공들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유발된다는 의미로 - 이 둘의 첫 범죄 행위, 그러니까 ‘원죄’는 성폭행을 당할 뻔한 친구 델마를 구하던 루이스가 가해 남성을 총으로 쏴 죽이면서 발생한다. 여성을 착취하고 탄압하는 폭력에 ‘대항’하려 한 이들의 선택이 결국 이어지는 여정과 마지막을 결정짓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 이후에도 델마와 루이스의 모든 행동들은 그들의 ‘여성’으로서의 욕망, 혹은 원한들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둘의 행보는 한순간의 ‘죄’로 일상에서 추방된 주인공이 파멸을 향해 달리는, [오이디푸스] 등의 그리스 비극 이후 유구하게 사용된 서술적 구조를 보이는 동시에 새로움과 참신함도 함께 선사한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남성 캐릭터들을 파괴로 이끄는 것이 주로 거부할 수 없는 ‘운명’(혹은 운명을 가장한 본인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이라면, 델마와 루이스를 자멸하게 만드는 무형의 힘은 ‘여성’이라는 그들의 사회적 정체성과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이 ‘여성성’은 그들의 여정에 어떤 환희와 매력 또한 덧입힌다. 델마와 루이스가 영화 내내 행하는 일탈, 혹은 범죄 행위들도 ‘타락’이라기 보다는 억압되고 짓눌리던 인물들이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며 처음으로 움켜쥔 ‘자유’처럼 느껴지고 말이다. 비슷한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들이 대부분 개인적 욕심, 원한, 혹은 충동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달리 델마와 루이스의 ‘잘못’들에 대한 근본적 책임은 남성들, 더 정확하게는 “남성 우월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약자를 탄압하는 사회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여성들의 행보는 ‘범죄’에 해당할지언정 감정적인 정당성은 부여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어떤 승리감, 혹은 통쾌함마저 가져다 주는 것이다.


물론 20여 년 전의 작품인 데다가 약자를 향한 사회적, 구조적 억압에 대한 논의와 이해가 비교적 미숙했던 시기의 산물인지라 지금 시대의 의식 수준에서 보면 지나치게 기본적이고 당연한 부분도 없잖아 있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그저 자유를 원했던 자신들을 기어코 범죄자로 만들어 버린 세상의 지배와 속박을 거부하며 도약하는 새처럼 절벽에서 떨어지는 둘의 모습은 여전히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조지 밀러 감독의 2015년작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감독 본인이 30여 년 전 제작했던 [매드 맥스]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이다. 예술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뒤쳐지지 않고 발전과 자각, 성장을 거듭한 창작자가 어떤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고도 생각된다. 여성 중심 영화를 다룬다면서 앞선 [델마와 루이즈]뿐 아니라 이 영화까지도 남성 감독이 - 더구나 리들리 스콧은 1937년생, 조지 밀러는 1945년생이다 -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이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여성 영화’ 혹은 ‘여성 중심 영화’라는 명칭이 임의적이고 부적합한 범주화에 불과하며 이 영화들에서 다루어지는 내용과 주제가 남녀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공감 가능한 것들이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매드 맥스]의 표면적 주인공은 핵전쟁으로 멸망한 세계의 난장판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남성 “맥스”(톰 하디)지만, 이 작품의 실제적 중심점은 사실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이다. 무정부 시대의 혼란을 틈타 공포 정치를 펼치는 폭군 “임모탄 조”의 측근 부하인 퓨리오사는 여성의 몸(심지어 한쪽 팔을 잃은 상태)으로도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특권 계층’에 속하게 될 만큼 전통적인 '남성성'에 기반을 둔 현 사회 제도 안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뼈와 살을 깎는 노력으로 얻게 된 자신의 힘과 권위를 임모탄 조에게 속박되어 살던 그의 “다섯 아내들”을 구출하는 일에 사용한다.


사실 문명의 이지가 사라진, ‘멸망’ 이후의 세상을 다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물을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보고 있자면 너무 우울해진다) [매드 맥스]는 개인적 호불호와도 관계없이 그냥 관객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가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감독이 지난 30여 년 간을 이 영화만 구상했나 싶을 정도로 [매드 맥스]는 그 호화로운 제작비와 긴 촬영 기간이 단번에 납득되는 영상미와 액션을 자랑한다. 보고 있는 동안 정신이 조금 이상해질 듯한 광기가 스크린에서 번뜩이지만 동시에 캐릭터들의 성장이나 서사의 개연성 등 작품의 완성도 또한 놓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저 “액션 영화”로만 봐도 충분히 황홀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의 초점이 폭력과 갈취라는 전통적 ‘남성성’의 테두리 안에서 정점에 오르고서도 이런 ‘남성적’ 힘의 질서에 반항하는 퓨리오사에 맞춰져 있다는 점은 더더욱 고무적이다. 자신을 짓밟고 착취한 임모탄 조와 그의 세력들에게 힘과 무력의 논리로 똑같이 대응하는 대신,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여성들로 대변되는 ‘희망’과 ‘미래’를 구해 자유를 찾는 그녀의 여정이 이 미쳐 돌아갈 수 있는 영화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 준다. 단순한 ‘반란’이 아닌 ‘혁명’을 일으키는 퓨리오사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그 외…] (Honourable Mention)


글을 쓸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인데… 이번에도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 임순례 감독의 2008년작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나 정재은 감독의 2001년작 [고양이를 부탁해], ‘강한 여자 주인공’의 시초격이라 할 “리플리”를 탄생시킨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Alien) 시리즈와 전문직 여성들의 고충에 관한 전설적 코미디인 1980년 작인 [나인 투 파이브] (Nine to Five) 등등 더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어차피 이 글을 통해 여성 중심 영화의 포괄적 목록을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 이번에 다 다루지 못했더라도 다음에 소개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여성 중심 서사”라는 테마를 들기는 했지만, 언급된 영화들 모두 결국은 그냥 ‘인간’에 대한 고찰이 담긴, “여성 영화”라는 식의 장르적 제한이 불필요한 작품들이라는 추신을 덧붙이고 싶다. 굳이 이런 식의 구분을 할 필요도 없이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의 영화들이 넘쳐나 관객들을 행복하게 해 줄 언젠가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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