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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Jun 22. 2024

더 테러 라이브: 무너진 다리가 다시 세워질 수 있기를

딸 J의 시선



김병우 감독의 2013년 작 [더 테러 라이브](The Terror Live)는 ‘반전’이라는 개념이 무색할 정도의 '휘몰아침'이 반복되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 넋을 잃었다가 작품의 끝에 이르러서는 어떤 감정적 탈력감까지 느꼈을 정도로 처음 볼 당시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더 테러 라이브]는 가상의 방송사 "SNC"에서 신생 라디오 프로그램 "데일리 토픽"을 진행 중인 앵커 "윤영화"(하정우)를 비추며 시작된다. 특정 주제에 대한 청취자들의 의견을 전화로 듣는 코너에서 그는 자신을 일용직 노동자 "박노규"라고 소개한 인물과 통화를 하게 되는데, 이 박노규는 프로그램의 취지와 달리 자신의 신세 한탄만 늘어놓으며 윤영화와 제작진을 곤란하게 만든다. 전화를 끊고 다른 사람과 연결하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박노규와의 통화는 끊어지지 않고, 상황 수습을 위해 광고 방송을 내보내는 윤영화에게 그는 자신이 폭탄을 가지고 있으며 곧 마포대교를 폭파할 것이라는 ‘헛소리’까지 덧붙인다. 방송을 방해 받으며 짜증이 날대로 난 윤영화는(사실 원래도 성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지만) 박노규에게 욕설을 내뱉으면서 말만 하지 말고 어디 한번 폭파시켜 보라는 식으로 맞받아쳐 버리는데, 그렇게 이상한 해프닝이 일단락되나 싶은 순간 마포대교에서 실제로 폭발이 일어나고, 윤영화는 라디오 부스의 창문을 통해 상황을 그대로 목격하게 된다.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려던 윤영화는 멈칫하며 전화를 끊고, 마찬가지로 상황을 신고하려는 라디오 방송 PD를 말리며 자신이 ‘독점’으로 테러범 박노규와 통화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낼 계획을 세운다. 한때 9시 마감뉴스의 앵커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난 듯 보이는 윤영화는 비밀리에 보도국장 "차대은"에게 전화를 걸고, 테러범과의 전화 연결이라는 자신의 ‘특종’을 당장 속보로 방송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차 국장과 유영화의 ‘흥정’ 끝에 결국 라디오 부스는 TV 촬영 스튜디오로 바뀌고, 윤영화의 속셈에 당하고 만 라디오 프로그램 PD는 방송이 폐지되었다는 차 국장의 어이없는 통보와 함께 부스에서 곧바로 쫓겨나 버린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속히 옷을 갈아입고 채비를 마친 윤영화가 예전 뉴스 앵커의 모습으로 스튜디오에 되돌아와 속보를 시작하자, 후속 전화 연결을 통해 박노규는 마포대교를 폭파시킨 자신의 의도를 그에게 밝힌다. 2년 전, "세계선진국정상회담"을 준비하며 마포대교를 미적으로 보수하는 공사에서 위험한 야간 작업을 하던 인부 세 명이 한강에 빠졌지만 행사 준비 때문에 구조 조치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아 모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한 박노규는, 대통령이 그 세 사람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면 테러 행위를 멈추고 자수하겠다고 약속한다. 



 


"대통령의 사과"라는 요구를 비현실적이라 여기는 윤영화의 생각과 달리, 박노규는 다른 스튜디오에 있던 여성 앵커 앞의 마이크를 폭파시키면서 윤영화가 끼고 있던 인이어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협박까지 한다. 스튜디오에서 나가거나 허튼 짓을 하면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위협에 윤영화는 라디오 부스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마포대교 2차 폭발을 진행한 박노규는 다리 위 생존자들을 고립시켜 ‘인질’로 만든 후 다리가 완전히 무너져 시민들이 사망하기 전에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재차 요구한다. 취재차 현장에 갔던 윤영화의 전 부인 "이지수" 기자가 다리 위에서 고립된 데다 끊어진 다리 상판에 걸려 있던 자동차가 추락하며 사망자까지 발생하자, 두려움에 휩싸인 윤영화는 대통령이 스튜디오로 나와 사과할 것을 더욱 절박하게 요청한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분위기 파악을 전혀 못하는 경찰청장을 대신 보내거나 대테러대책 위원회를 파견하는 조치에 그치며 박노규의 요구에 응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각자의 이기적 목표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차 국장과 테러대책팀장 "박정민" 사이에 놓인 윤영화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홀로 발버둥치게 된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몇 개의 다른 작품들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데, 일정 조건을 맞추지 않으면 폭탄이 터지고 만다는 긴박한 설정의 1994년작 [스피드](Speed)나 - 사실 이 장르에서는 대표적 작품으로 꼽힐 만하다 - 생중계되는 ‘라이브’ 방송에서 ‘테러’가 벌어진다는 내용의 2016년작 [머니 몬스터](Money Monster)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할리우드 작품에서 ‘반정부적’ 정치 감정, 개인적인 경제적 곤란이나 억울함, 은밀한 제도적 ‘음모론’ 등을 테러의 동기로 삼는 것과 달리, 한국 사회에 ‘대놓고’ 만연한 부패와 불평등을 소재로 쓰고 있다는 것이 [더 테러 라이브]의 흥미로운 차이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테러’라는 소재가 한국으로 온 후 ‘현지화’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98분여 가량의 러닝타임 내내 라디오 부스라는 한정된 공간을 거의 벗어나지 않음에도, 관객의 집중감을 놓치지 않은 채 긴장 상태를 끊임없이 고조시킨다는 면에서 굉장한 힘을 가진 작품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방송 과정과 현장을 표현하는 부분에서의 미흡함이나 ‘인간 쓰레기’의 총집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기적인 악인들이 즐비한 인물 설정, 타 방송국과의 ‘보도 전쟁’을 그리는 방식에서 보여지는 약간의 과장된 톤 등 아쉬운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핵심 주제, 그리고 시종일관 극단적으로 진행되는 상황 같은 특유의 서술적 스타일을 고려한다면,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 자체를 현실을 꼬집고 풍자하는 ‘은유’로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크게 두 가지의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 작품이 ‘진짜 나쁜 놈’을 다룸으로써 관객들이 상대적으로 ‘덜 나쁜 놈’에게 이입하고 공감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윤영화는 몇 년간 SNC ‘간판 앵커’의 위치를 맡았을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전처인 이지수 기자의 특종을 가로챘으며 정부로부터 수년간 뇌물을 받았다는 등의 어두운 이면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사실 영화의 초반, 이 사건에 대해 곧장 신고를 하기는 커녕 라디오 제작진의 뒤통수를 치면서까지 ‘특종’을 터뜨려 ‘잘 나가던’ 앵커로서의 예전 지위로 복귀할 궁리를 하는 것만 봐도 이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물인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국민들이 ‘모두 믿는’, 신뢰도 높은 사람이 필요했다는 영화 속 ‘박노규’는 윤영화의 비리가 드러나자 그래서 더욱 분노하며 실망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나쁜 놈’인 윤영화는 영화 속 다른 ‘나쁜 놈’들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에 불과하다. 영화의 초반에는 윤영화의 속보 방송 강행을 도울 뿐 아니라 테러범이 요구한 돈까지 곧바로 송금해 줄 정도로 윤영화의 ‘조력자’로 보였던 - 물론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 보도국장은 시청률 ‘대박’을 터뜨려 본부장으로 승진하고 국회로도 진출하려는 본인의 궁극적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행위를 거듭한다. 이에 따라 그는 윤영화가 박노규를 자극해 마포대교의 인질들을 모두 죽이도록 만들어야 정부가 박노규를 잡을 확실한 명분이 생기고 자신들의 방송도 더 ‘성공’할 수 있다는 반인륜적 의견을 아무렇지 않게 제시하며, 이에 경악해 그 같은 ‘보도지침’을 따르지 않는 윤영화의 비리 사실을 경쟁 방송사에 직접 흘림으로써 윤영화를 궁지에 몰아넣기까지 한다. 





비슷한 예로 경찰청 대테러팀장 박정민은 테러범에게 대응하는 방식을 윤영화에게 조언하거나 박노규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를 안심시키지만, 결국은 테러범을 잡으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윤영화를 이용하기만 할 뿐이다.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위해 옆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반복하며 윤영화를 시간 끌기의 도구로 사용하고, 마지막에는 윤영화가 정부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흘리지 못하도록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윤영화에게 뇌물을 준 장본인이었던 청와대 비서실장 또한 테러에 대한 국민들의 공분을 분산시키기 위해 윤영화를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에 소환시켜 그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간계를 드러낸다.

 

이런 인물들에 비교하면 그래도 윤영화는 인질들의 안전을 염려하고 대통령의 사과를 요청하는,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과 상식은 남아 있는 사람인 셈이다. 또한 박노규(사실은 그의 아들인 박신우) 역시 마포대교를 폭시키는 실제 과정 중 직접적 인명 피해는 의도적으로 삼갔으며 궁극적인 목적도 대통령의 사과뿐이라는 점에서, 비록 ‘테러범’이지만 앞에서 소개한 인물들보다 훨씬 인도적인 -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기까지 한 -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물론 테러 행위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비극은 ‘진짜 나쁜 놈들’ 때문에 ‘덜 나쁜 놈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잘못과 책임이 훨씬 적은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상처 입히며 결국 침몰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부패한 윤영화가 '박노규'에겐 악인처럼 보이겠으나 실상은 그도 단지 거대한 타락과 비리의 '졸'일뿐, 역시 꼬리 자르기로 쉽게 내쳐질 수 있는 별 볼 일 없는 인물에 불과하다. 마포대교 테러 사건으로 윤영화의 삶은 진창으로 처박히고 박노규의 삶 또한 산산조각 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시작인 정부의 실책과 구조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그 어떤 책임 규명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범죄 사례, 특히 권력과 ‘기득권’의 이해관계에 연결된 범죄 사건들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 쉽게 버려지고 교체될 수 있는 ‘아랫사람’들이 실제 책임자인 ‘윗사람’들 대신 처벌을 받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전개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다른 뺨을 내밀면서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교훈이 이런 의미에서도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악’과 부정은 그것들을 행하는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의 책임보다 훨씬 복잡하고 뿌리 깊은 문제일 수 있으며, 그 '악'에 따른 책임과 배상, 회복을 이루어 가는 것은 인간적 노력의 범주를 벗어난 일일지도 모른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윤영화와 ‘박노규’가 뒹굴며 싸우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현 사회를 병들게 만드는 증오와 악의, 갈등의 대부분이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의 근본적 원인으로서의 불평등, 제도적 부정부패,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이익 아래 두는 기득권의 탐욕에 '개혁'을 요구하는 화살을 돌리는 대신, 결국 같은 피해자의 입장인 사람들을 악인시하며 적으로 겨냥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 드물지 않은 현실이다. 경제적, 정치적 과도기에 특히 두드러지는 젠더 갈등이나 지역 감정, 장애인과 이민자(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반감과 증오가 안타깝게 다가오는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두 번째 생각은 마포대교라는 다리의 폭발이 우리 사회의 소통과 공감, 교감의 단절을 상징하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방대하게 정보가 유통되지만, 실상은 ‘통신’의 시대일뿐 진정한 ‘소통’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지 않은지 우려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테러범이 가장 먼저 ‘다리’를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데, "다리를 놓다"라는 표현이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을 뜻할 만큼 ‘다리’의 이미지는 ‘상호작용’(interaction)과 긴밀히 연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다리는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공간을 이어 주는 장치로서, 사람이나 물건들이 ‘오고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 그 존재의 목적인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이민자와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에 대한 반감과 배타심을 부채질하는 방안으로 단절과 추방, 편 가르기를 상징하는 슬로건 "벽을 쌓자"(Build the wall)를 내세웠을 때, 그에 반대하며 나온 슬로건이 "벽이 아닌 다리를 세우자"(Build bridges, not walls)였음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다리를 폭파시킨 테러범의 행동이 표면적으로는 소통과 공감의 거부를 뜻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슬픈 일은 ‘박노규’가 이런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결국 원했던 것은 ‘진정한 소통과 교감’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테러를 통한 그의 궁극적 목표는 오직 대통령의 사과, 바꿔 말하면 자기가 겪은 아픔과 슬픔에 대한 책임자의 ‘대답’과 진심 어린 공감뿐이다. 정의와 평등 같은 인간적 대우를 요구하다 지친 약자들이 이런 ‘극단적’ 방법을 택할 때 그들이 더 이상의 소통을 거부한 듯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더욱더 처절하게 자신들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들리게 되길’ 바란다는, 진정한 소통과 교감을 향한 갈구의 다른 표현일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의 다리를 본질적으로 끊으며 소통과 교감을 단절시키는 인물들이 누굴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 속의 여러 ‘진짜 나쁜 놈’들을 보며 "burn bridges"라는 영어 표현이 자주 떠올랐던 것은, 이 말이 "절연하다" 혹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관계를 단절시키다"라고 의역되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말하자면 어떤 관계나 상황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행동을 "다리를 태우는" 일에 비유한 셈인데, 영화 초반 윤영화가 라디오 방송 PD를 배신하는 장면, 차 국장이 윤영화의 비밀을 타 방송국에 넘기고 박 팀장이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대목 등에서 저들이야말로 "다리를 태우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포대교를 폭파한 것은 테러범이었을지라도, 실제적으로 소통과 교감을 거부하고 동등한 입장에서의 이해와 대화를 끊어 내며 상징적 ‘다리’를 없애고 있는 자들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여러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고 ‘진짜 나쁜 놈’들이 벌을 받는 해피엔딩은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불가능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해와 공감을 주고 받는 다리를 태우고 부수는 일만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이루어지는 소통과 공감이 손쉽게 내버려지고 이용 당할 뿐 아니라 힘 없는 보통의 ‘나쁜 놈’들 사이에서나 나누어진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고통과 억울함 가운데에도 엉뚱한 곳에 분노를 쏟아붓는 대신, 벽이 아닌 다리를 세우려는 노력이 계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수천, 수만 개의 다리가 서로와 서로를 연결한다면 결국 언젠가는 ‘위’와 ‘아래’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날도 올 수 있지 않을까.




엄마 C의 시선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2013년 개봉되었던, 감독 김병우의 상업 영화 데뷔작이자 배우 하정우의 원톱 주연 작품입니다. 데뷔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뛰어난 연출력을 이 영화에서 과시한 김병우 감독이 이후 특별히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기는 하지만, 외화로 오해 받을 정도의 ‘순수’ 영어 제목(“The Terror Live”)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특성’을 보이는 – “올드보이(Old Boy)”나 “텔 미 섬딩(Tell Me Something)” 정도가 생각날 만큼 그리 흔치 않을 - 이 영화는, 긴박한 내용이 펼쳐지는 1시간 30여 분의 러닝타임 내내 한 공간(방송국 스튜디오)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연극적 요소와 같은 특이점도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그에 더하여 대다수 영화들이 작품성의 상당 정도를 배우들 간의 ‘케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의거하더라도 - 지금까지 이 공간에서 저희가 다룬 영화 중 상당수가 투톱 주연이었다는 사실이 방증하듯 -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주연 배우 한 사람의 활약으로 이 같은 완성도를 제공하고 있다는 측면 역시 이 작품만의 특이성으로 내세울 수 있을 부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국민 앵커”로 불릴 만큼 능력 있고 인지도도 높은 진행자 “윤영화”가 “SNC”라는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방송 진행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국회에서 추진 중인 세금 인상안에 대해 청취자들의 의견을 전화로 연결해 듣고 있던 그는, 자신을 건설 노동자 “박노규”라고 소개한 한 ‘중년’ 남성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으며 계속 전화를 끊지 않는 그에게 짜증을 내던 윤영화가, 자신이 폭탄을 가지고 있고 마포대교를 폭파시킬 수 있다고 하는 박노규의 위협을 허풍으로 여기면서 “한번 해 보라”고 비웃듯 말을 던진지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방송국 근처의 마포대교가 실제로 무너지는 믿기 어려운 장면이 그의 눈앞에 펼쳐집니다. 





큰 충격과 당황스러움으로 한동안 정신이 없던 윤영화는 곧 이 급박한 사건을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 반전에 이용하겠다는 ‘기막힌’ 발상으로 연결합니다. 경찰에는 신고하지 않은 채 자신과 가장 먼저 통화한 테러범을 이용해 강제 하차 당했던 메인 뉴스의 앵커 자리로 되돌아갈 방편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그의 ‘복안’이었고, 개인 휴대폰에 녹음된 박노규와의 통화 내용을 미끼로 후속 속보 방송을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한 윤영화의 요구를 보도국 국장 “차대은”(시청률에 ‘목을 매는’)”이 수락하면서 그의 라디오 부스는 순식간에 TV 송출 스튜디오로 탈바꿈합니다. 테러범 박노규는 자신의 범행 이유에 대해, 2년 전 개최된 “세계선진국정상회담” 당시의 마포대교 보수 공사 중 인부 세 명이 물에 빠졌던 사건을 상기시키며 행사 준비에만 바쁜 위정자들이 사고 수습을 등한시함으로써 그 세 명의 동료가 모두 익사했기 때문임을 밝히는데, 그의 두 가지 협상 조건 중 ‘출연료(사실은 인부 세 사람에 대한 보상금, 장례비 등을 합산한 금액)’는 방송국에 의해 곧바로 지급되지만, 또 다른 조건인 “대통령의 공식 사과” 요구에서부터는 이야기가 꼬여 가기 시작합니다. 


본래 자신의 주목적이던 대통령의 ‘사과’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자 박노규는 추가적으로 마포대교에 폭탄 하나를 더 터뜨려 다리 위의 생존자들을 고립시키는데, 기자인 전 아내가 현장에서 취재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윤영화의 불안과 두려움이 점점 증폭됨에도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준비되기는 커녕 대신 나타난 경찰청장이 박노규의 신상을 공개하며 도리어 그를 자극하다 귀에 꽂고 있던 in-ear(폭탄이 설치되어 있던)가 폭발해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자신의 귀에 있는 인이어도 폭탄이라는 박노규의 경고를 이미 받았던 윤영화는 극심한 공포로 패닉 상태에 이른 가운데 선택의 여지없이 방송을 계속 이어 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전 아내의 취재 내용을 가로채 특종으로 삼은 – 지난 회에 다루었던 “엄마는 해결사” 편의 “마가렛”과 유사한 경우일 - 사건으로 메인 앵커직에서 밀려났던 것과 오랜 기간 부정한 금품을 수수해 왔다는 의혹에 대한 폭로도 함께 벌어집니다.





여성과 아이들의 구조를 허락한 박노규의 협조에도 갑작스런 다리 붕괴로 윤영화의 전 아내 “이지수”가 추락하고, 시청률이 70%를 넘었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한 보도국장은 당혹감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윤영화를 뒤로 한 채 현장을 떠나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SNC 사옥 옆 건물에 숨어 있던 박노규의 위치를 파악한 경찰특공대가 그의 체포를 위한 침투 작전을 펼치자, 그들이 침투한 건물을 박노규가 폭파하면서 기울어진 옆 건물이 방송국 건물을 덮치고, 놀란 방송국 직원들은 모두 밖으로 몸을 피하며 도망칩니다.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에 머리를 맞아 기절했다가 깨어난 윤영화는 타 방송사의 보도와 관련 서류 등을 통해 사실 박노규는 2년 전 사고에서 이미 사망했고 테러범은 그의 아들인 “박신우”임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스튜디오까지 잠입해 격투를 벌이던 박신우가 건물 밖으로 떨어지며 줄에 매달리게 되자 그의 목숨을 살리려는 윤영화는 자기가 대신 사과한다고 말하면서 사력을 다해 끌어올려 보려 하지만, 경찰특공대의 저격으로 인해 박신우는 결국 추락 사망하고, 곧이어 윤영화는 자신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 수사할 것이라는 보도와 전 아내(아직도 그가 사랑하는) 이지수 기자가 구조 중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경찰의 무전기를 통해 전해지는 “윤영화를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듣게 된 그가 자신을 향한 저격수의 총구와 스튜디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경찰특공대의 침투 장면을 응시하며, 박신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손에 남겨 준 카드 폭탄의 스위치를 눌러 방송국 폭파와 함께 산화하는 것으로, 영화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 드리고 싶다는 아들의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해도 – 그리고 자신의 본의로 인한 결과는 아니었더라도 – 적지 않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박신우를 영화가 합리화해 주고 있지 않을 뿐더러, 생전의 박노규가 그의 뉴스만 볼 만큼 큰 신뢰를 가졌다는 방송인임에도 실상은 아내의 기사를 가로채거나 권력기관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등의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러 온 윤영화의 본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반드시 뻔뻔하고 잔인한 ‘악한’ 권력자들과 그로 인해 착취 당하며 고통을 겪는 ‘선한’ 일반 민중의 대비를 의도한 것은 아니리라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사과’라는 하나의 단어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억울한 상황을 만들어 낸 상대를 향해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기억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상대는 전혀 사과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데다 그 ‘사과’에 의해 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부질없는’ 요구를 ‘끈질기게’ 하는가 싶어 들었던 생각이지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민족의 ‘인간적’ 정서를 고려하거나 끊임없이 당신을 배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작은 참회에도 즉시 용서를 베푸시던 하나님의 품성을 기억해 볼 때, ‘사과’의 행위는 ‘관계’ 회복의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정 책임자의 무능력과 부도덕이 빚어 낸 온갖 문제들이 말 한마디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채 그 사과를 기다리는 지금 한국 국민들의 마음도 이런 사실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타인의 위에 군림해 그들을 지배하며 권력과 이익을 누리는 ‘지배층’이 있고, 그런 지배층의 능력이나 윤리의식 등에 따라 삶이 편안해질 수도 가시밭길이 될 수도 있는 ‘피지배층’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전처럼 명확하고 표면적인 계층 구조는 사라졌다 하더라도 현사회에 여전히 실존하는 정치, 사회, 경제적 우위의 소수 집단이 그렇지 못한 대다수 군중들의 생계와 생활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니까요. 그렇기에 비록 이 영화의 내용은 ‘픽션’이라 해도 억눌리고 또 억눌리다 보면 언제가는 터지는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 물리적, 사회적 원리에 따르는 ‘논픽션’일 수밖에 없고, 본인의 삶이 타인에 의해 좌우될 수 있을 대다수 사람들보다 그런 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수 지배자들에게 보다 큰 책임이 지워지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귀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고 많은 일을 맡은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물으실 것이다; 우리말성경 (Everyone to whom much was given, of him much will be required, and from him to whom they entrusted much, they will demand the more; ESV)”라고 말씀하신(눅 12:48) 이유도 그와 같을 테고 말이지요. 





물론 저는 기본적으로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맞는다 해도 그 일의 해결 방식을 자기가 직접 찾으려 하지 말라는, 즉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표준새번역, 새번역 (do not avenge yourselves, but rather give place to wrath; NKJV)”라는 성경의 가르침(롬 12:19; 신 32:35; 히 10:30)에 순응하며 순종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도피성” 관련 구절들이 나열된 구약의 기록에서 가해의 의도 없이 일어난 살인(사고)의 범행자가 도피성에 머물며 안전을 보장 받을 것(민 35:25-29)을 권고하신 하나님께서, ‘의도적’ 살인(범죄)을 저지른 범인에 대하여는 그를 추적한 친족이 복수의 의미로 살해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 사실상 해야 한다고 – 허용(민 35:19-21; 신 19:11-13)하셨음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허용 혹은 명령의 함의는 ‘악의’의 결과인 범죄적 행위에 반드시 그에 따른 귀결(consequence)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같은 귀결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계시는 것으로 해석되어 마땅합니다.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에 머물러야만 의도치 않은 범죄에 대한 면죄부(민 35:25, 28, 32; 수 20:6)가 유지될 수 있다는, 즉 범행자가 그 “경계 밖으로” 나갈 경우 ‘피의 보복’이 이루어지더라도 살해자는 무죄하다(민 35:26-27)는 구절 역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에 대한 신학적 분석과 관계없이 저는 이 구절들을, 우리가 살면서 범하게 되는 의도치 않은 잘못과 실수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써 용서되고 회복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자신의 실수와 과오를 깨달은 사람이 피해 입은 상대방에게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자세에 대한 요구이자 명령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용서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지, 잘못에 대한 인정도 ‘사과’조차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용서라는 것이 베풀어지는 일은, ‘물리적,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일 터이기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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