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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Jun 07. 2024

환상 살인: 기차 밖으로 엄마 던지기?

딸 J의 시선



한국에서 [환상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는 1987년 작 [Throw Momma from the Train]은 정확히 번역된 원제로는 “엄마를 기차 밖으로 던져”라는 뜻을 갖고 있는 영화이다. 1980년대 한국의 문화적 배경이라면 지나치게 자극적인 제목이었을 테니 분명 궁여지책으로 취해진 조치일 것이라 짐작하게 되는데, 제목부터 상당히 패륜적(?)인 이 작품이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 영화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을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도 사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 캐나다에 온 직후 어느 날 TV에서 방영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던 듯도 하다 – 그후로는 이 영화를 둘 중 한 사람이 언급만 해도 같이 웃게 되는 우리의 ‘웃음 버튼’이 되었다. 5월 어버이날을 맞아 전편에서 다룬 [주먹이 운다]가 ‘아버지’(그리고 ‘아들’)라는 소재를 상당히 정석적으로 풀어낸 영화였다면, 이 작품은 ‘어머니’라는 소재에 대한 꽤나 색다른 접근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두 주인공, "래리 도너"(빌리 크리스탈)와 "오웬 리프트"(대니 드비토)의 같은 듯 다른 삶을 비추며 시작된다. Community college(지역의 전문대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에서 문예창작(creative writing)을 가르치는 교수인 래리는, 이혼한 전처 "마가렛"이 가로채 그녀의 이름으로 출간한 자신의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후 억울함과 그녀에 대한 증오심뿐 아니라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 "절필감"(writer’s block)에까지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한편 중년의 나이에도 스스로 독립하지 못한 채 홀어머니와 함께 살며 괴팍한 그녀의 수발을 드는 오웬 또한 글쓰는 일에 몰두하는 작가 지망생으로, 현재 래리의 수업을 듣고 있는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답게 엄마의 잔소리(를 빙자한 인신공격), 무시무시한 성질과 깐깐한 요구들에 대부분 순응하고 있는 오웬이지만, 그럼에도 엄마를 홧김에 '해치워' 버리는 망상을 끝없이 머릿속에 떠올릴 만큼 엄마와의 삶에 지쳐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인지 오웬은 래리의 수업 과제물로 ‘살인’을 소재로 한 추리물을 집필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얻고자 래리를 거의 스토킹 수준으로 졸졸 - 수업 외 시간에도 - 쫓아다닌다. 오웬의 집요함에 백기를 든 래리는 결국 늦은 밤 오웬과 따로 만나, 추리물치고는 지나치게 평면적인 데다 범인 또한 너무 명백한 그의 작품에 대한 논평을 전한다. 그런데 대화의 과정에서 ‘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한 추리물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 즉 살인의 동기(motive)에 대해 설명하던 래리가, 자신은 전처를 ‘죽이고’ 싶어하고 오웬 또한 엄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일례로 들게 된다. 추리물을 잘 쓰기 위해서는 등장인물의 뻔한 살인의 '동기'를 제거하면서 그의 '알리바이'를 정확히 성립시켜야 한다는 조언을 건넨 래리는 오웬에게 추리물의 대부인 히치콕(Hitchcock) 감독의 작품 또한 추천해 준다.



래리의 조언을 들은 오웬은 곧바로 히치콕 감독의 영화 한 편을 보러 가는데, 그 작품이 하필이면 아무 관계없는 두 인물이 의심을 피하기 위해 서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바꿔 살해하는("교환 살인"이라는) 소재를 다룬 [열차 안의 낯선 자들](1951)(Strangers on a Train)이라는 데에서부터 둘의 삶은 거하게 핀트가 엇나가기 시작한다. 지나치게 순수(?)한 오웬은 래리의 문학적 조언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가 자신에게 영화와 같은 "교환 살인"을 제안했다고 오해하고, 래리의 전처 마가렛을 대신 ‘죽여 주기’ 위해 그녀가 살고 있는 하와이로 향한다. 다음날 아침, 아무것도 모른 채 술독에 빠져 있다 깨어난 래리는 마가렛이 바다에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뉴스 보도와 더불어, 자신은 맡은 바를 해냈으니 이젠 그가 자신의 엄마를 ‘처리해 줄’ 차례라는 오웬의 해맑은(?) 연락을 받으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요약된 줄거리에서도 유추가 가능하듯 이 영화는 꽤 냉소적인 블랙코미디이다. 주인공 "오웬"을 연기한 톱 배우 대니 드비토가 연출울 맡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인데, 사실 그는 연출을 담당한 다른 작품들 - 특히 1989년 작 [장미의 전쟁](The War of the Roses)이나 2002년 작 [스무치 죽이기](Death to Smoochy) – 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어딘가 살짝 어둡고 초현실적(surreal)인, 그러니까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색채를 잘 활용하는 감독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 또한 현실성을 추구한다기보다 망상이나 섬망, 혹은 ‘개꿈’과도 닮아 있는 연출 방식을 사용하며 "교환 살인"이라는 소재에 내재된 ‘터무니없음’(ludicrous)과 비현실성을 고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다. 오웬이 래리의 데이트 장소까지 쫓아가 자신의 글에 대한 소감을 묻는 장면이나 래리의 전처를 하와이에서 살해(?)한 뒤 래리에게 연락할 때 경찰이 전화를 추적할 수 있다며 몇 초 간격으로 완벽히 다른 배경의 공중전화 여러 곳에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장면 등에서 이 작품의 엉뚱한 매력이 특히 더 드러나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두 인물의 살인 충동, 특히 엄마를 ‘죽이고’ 싶어 하는 오웬의 마음은 진심에서 비롯되는 염원보다는 은유(metaphor)라는 측면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보다 더 정확할 듯하다. 이 두 주인공이 작가라는 직업(혹은 목표)을 공유한다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사실 작가란 상상, 혹은 공상 속에서 ‘어떤 짓’이라도 시도할 ‘명분’이 있는 직업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추리물 작가가 살인 사건을 상상하는 것이 그닥 ‘이상한’ 일이 아닌 것처럼 오웬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설정 역시 그가 망상 속에서 엄마를 ‘죽이는’ 순간들을 조금 더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진지하지 않은 상황이 될 수 있도록 포장해 주고 있다.



 


무척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조금 놀랐던 점은 "오웬"이라는 인물이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귀여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영화의 내용상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실제로 오웬이 지나치게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이었기에 래리의 문학적 조언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상황이 발생되었음은 분명하다. 사실 영화 초반 래리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 장면이나 중년의 나이에도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괴팍하고 무례한 노모에게 줏대 없이 휘둘리는 모습 등을 보면 오웬을 객관적으로 매력 있는 인물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음에도, 상황이 전개될수록 그가 점점 더 귀엽고 안쓰럽게 보이는 이유는 – 대니 드비토의 송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도 물론 빼놓을 수 없는 요소겠지만 – 미처 자라지 못하고 엄마에게 의지해야만 했던 어린 날에 여전히 갇힌 ‘아이’로 그를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영화 속에서의 오웬이 글을 쓰거나 엄마를 돌보며 집에 있는 것 외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경제생활을 하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무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래리의 수업을 듣는 같은 반 학생들과 교류는 하지만 가깝게 어울리는 친구는 없어 보이고, 래리가 같은 학교 교수인 "베스"와 데이트를 하며 야릇한 분위기가 조성될 때조차 눈치 없이 끼어드는 등 ‘성인’이라면 당연히 이해와 경험이 있을 만한 부분들에도 완벽하게 무지한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 그는 래리를 어린아이가 ‘맨 처음’ 사귀게 된 친구, 혹은 동경하는 ‘형’처럼 대하고, 마가렛이 바다에서 실종된 후 경찰을 피해 자기 집에 숨어 있던 래리와 ‘아이스러운’ 자신의 취미들(동전 모으기, 모델 기차 만들기 등)을 공유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래리가 처음 오웬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간도, 오웬의 별것 없어 보이는 ‘동전 수집’이 사실은 그가 어릴 적 아빠에게서 받았던 동전들을 보물처럼 간직한 결과임을 깨달을 때이다. 별다른 대사나 장치 없이도 오웬이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지가 이 순간 정확히 전달되고, 오웬은 마치 아빠와 지냈던 시간들을 잊지 못해 그 순간에서 성장을 멈춰 버린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이 순간의 래리 또한 귀엽고 안쓰러운 ‘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오웬을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건네준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할 때 오웬의 엄마가 아들에게 범한 잘못은 끊임없는 잔소리와 잔인한 비판, 종을 부리듯 남발한 요구들 그 자체라기보다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짓누른 일이 아닌가 싶다. 모종의 이유로 아빠를 잃은 오웬이 그 상처와 결핍을 넘어 성숙해질 수 있게끔 든든한 토양이 되어 주는 대신 아이가 자라지 못하도록 손에 꽉 움켜쥐고 있던 듯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오웬은 엄마의 폭압에 갑갑해 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엄마의 영향력을 벗어나 홀로 설 수 있는 감정적, 경제적 독립을 상상조차 못한다. 자신을 요양원으로 보낼 생각이냐며 계속 의심하고 추궁하는 엄마에게 아니라고 항변만 할 뿐, 현실적으론 가장 손쉽게 엄마를 ‘처리’할 수 있는 그 방법도 선택하지 못하고 말이다. 오웬이 엄마의 ‘살해’라는 극단적 수단까지 고려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그가 엄마를 ‘두려워’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신을 옥죄는 엄마의 영향력과 그런 엄마에 대한 오웬의 의존도가 그 정도로 강력하고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점은 오웬과 대비되는, 즉 ‘어른’을 대변하는 듯 보이는 래리도 사실 그렇게까지 성숙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래리는 오웬과 달리 실제로 마가렛을 ‘죽이겠다는’ 바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선 오웬이 엄마에게 가진 감정보다 더 심각한 분노와 원망을 그녀에게 품은 것으로 보인다.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가 마가렛에 대한 소식만 들으면 광기와 같은 증오에 사로잡혀 작가와 교수로서의 공적 생활뿐 아니라 친구나 새 연인과의 사적인 관계까지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만한 입장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처인 마가렛을 원망하고 증오함으로 그녀에게 ‘종속’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쳐 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오웬과 마찬가지로 래리 또한 긴 시간 동안 마가렛의 부정적 영향력, 그녀를 향한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에 ‘지배’되는 감정적 불안정성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마가렛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게 쫓기던 래리와 그를 따라온 오웬이 멕시코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티격태격하던 중, 자신의 엄마가 기차에서 추락할 위험에 처했을 때 오웬은 결국 엄마를 구하는 쪽을 선택한다. 자기가 ‘꿈꾸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음에도 엄마를 구하기로 결정한 그의 행동이 엄마를 향한 사랑과 용서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만 - 그리고 그런 요인들도 분명히 기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는 오웬의 선택을 드디어 그가 엄마의 감정적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시사로 여기게 되었다. 베어 넘겨야만 하는 ‘괴물’처럼 보이던, ‘없애’ 버리지 않으면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힘과 권위를 가진 듯만 보였던 엄마가 처음으로 늙고 연약한, 이제는 자식을 통제하기보다 자식의 도움과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 보였기에 오웬이 그녀를 구하는 쪽을 택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오웬이 자신을 구하려 애쓰는 것을 보고 엄마도 감동을 받은 듯 보이지만, 워낙 성격이 고약한 데다 변덕이 들쑤시는 사람이다 보니(여태껏 아들에게 너무 심하게 굴기도 했고) 그 부드럽고 애정 어린 태도가 과연 얼마나 갈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이 오웬과 엄마의 ‘화해,’ 혹은 엄마의 ‘개심’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오웬이 엄마를 구한 그 ‘감동적’ 장면 이후 엄마가 영화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이 마무리된 1년 후, 오웬은 오랜만에 래리를 찾아와 자기 엄마의 부고를 알린다(자연사가 맞느냐고 래리가 확인하는 대사도 압권이다). 이 장면을 통해, 엄마의 행동이나 태도와 관계없이 그녀의 지배력과 영향력에서 벗어난 오웬이 엄마를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 있던 감정들을 직접 매듭지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상대의 회심이나 반성에 기반하지 않는 용서와 은혜로써 세상을 감싸안으신, 우리에게 죄짓는 자들 또한 사랑하기를 여전히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과도 궤를 같이하는 결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웬의 이런 선택은 결국 래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기차 위에서의 소동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래리는 사실 오웬이 마가렛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배에서 미끄러지며 바다로 추락했다가 구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마가렛에 대한 자신의 감정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엄마를 죽이는 망상을 자주 떠올리던 오웬과 달리 래리는 이때 처음으로 마가렛을 죽이는 상상을 하는데, 자신이 목 조르던 그녀의 얼굴이 자기 얼굴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며 악몽으로부터 께어난다. 마가렛을 향한 자신의 증오와 분노가 결국은 본인을 죽이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 조금 빤하긴 하지만 – 얻은 셈으로, 이후 래리는 오웬과 있었던 "교환 살인"의 소동을 소설로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글’을 다시 되찾는다. 배신에 의해 빼앗겼던 과거에 매몰되어 있던 그가, 마침내 그 과거의 상처와 고통의 지배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살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1년 뒤에 래리를 찾아온 오웬이 그들의 이야기로 엮어 낸 자신의 동화책을 보여 주는 장면은 이번에도 꽤 뭉클했다. 책 속에서의 그들은 오웬의 엄마를 죽이려 시도하는 대신 같이 사이좋게 소풍을 가고 서로를 배려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웬의 엄마가 아들에게 실제로 그런 추억을 남겨 주지 못했다는 점이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오웬이 그녀의 부족함과 잘못들을 묻어둘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는 뜻이 되기도 하리라 여겨진다. 영화 속 오웬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 특히 사랑과 보살핌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가족을 단순히 용서하고 잊은 것만은 아닐 듯하다. 엄마를 무섭고 두려운 존재, 벗어날 수 없던 공포로만 기억에 남겨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마음껏 휘두르도록 놔두는 대신, 그 ‘자신’을 위해 그녀에게도 조금의 은혜를 베풀겠다는, 이상과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열심히 성장해 가는 여정에서의 첫 발걸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엄마 C의 시선 



“가정의 달”인 5월은 이미 지나갔지만, 지난 포스팅에서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 영화 “주먹이 운다”를 먼저 다루었기에 이번에는 ‘어머니’와 자녀들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Throw Momma From the Train”이라는 외화를 소재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을 직역하면 “엄마를 기차 밖으로 내던져 버려”라는 살벌한 문장이 되는 데다 한국에서 비디오로 출시될 때도 ”환상 살인”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고 하니 뭔가 끔찍하고 기괴한 내용이리라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스릴러”로 분류한 몇몇 비평이 무색하게 웃음 터지는 에피소드들로 점철된 기발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물론 그 내용으로만 생각한다면 ‘어머니’라는 주제와 연결해 다루기엔 ‘불경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 1973년 “어버이날”로 명칭이 바뀌기 전까지는 5월 8일이 “어머니날”이었을 만큼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특별한 것인 만큼 – 워낙 저와 딸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상이나 소재에 대해 ‘정색’하고 이야기하는 경직된 방식보다는 한 번 ‘비틂’을 통해 보는 이의 숙고를 끌어내는 접근을 더 선호하다 보니 이번에도 이 영화로 ‘어머니’라는 주제를 다루기로 의기투합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주요 인물은 “래리(Larry)”와 “오웬(Owen)”으로, 래리는 글을 쓰며 지역 대학(community college)에서 문학 수업 강의를 하는 작가이자 교수이고, 오웬은 래리가 진행하는 수업에 참석하고 있는 중년 학생입니다. 최근 글쓰는 일이 뜻대로 풀려 나가지 않아 고심이 깊은 래리가 과거 자신이 썼던 글을 가로채 출간한 책으로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이혼한 전 아내를 향한 미움과 원망 때문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순수하고 착하게만 보이는 오웬은 사사건건 아들을 무시하고 심하게 구박하는 어머니 밑에서 힘들고 고달픈 삶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글을 빼내 출판한 책으로 유명세는 물론 윤택한 삶까지 누리고 있는 ‘뻔뻔한’ 전 아내 “마가렛(Margaret)”에 대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다가 본의 아니게 자신의 학생들 앞에서 “그녀가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소리치는 래리의 악담을 듣게 된 오웬은, 역시 래리가 ‘본의 아니게’ 추천했던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를 보고는 그 내용을 통해 ‘끔찍’하고 ‘발칙’한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맑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순진한 그임에도 수업 과제로 부과된 소설에 ‘살인’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곤 할 만큼 ‘그쪽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범죄를 구성할 경우 동기(motive)는 모호하고 알리바이(alibi)는 확실해야 한다”는 래리의 말과 영화 대사에서 힌트를 얻어, 자기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인생을 망친 마가렛과 자신을 참기 힘들 만큼 몰아세워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어머니를 서로 ‘맞바꿔’ 살해한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지요. 


 



팬 사인회 장소에 참석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배에 올랐던 마가렛이 바다에 떨어져 사망했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래리는 오웬이 그녀를 죽였을 것으로 확신하고 경찰(그녀의 죽음을 래리가 ‘열망’했다는 여러 학생들의 증언을 확보한)은 래리를 범인으로 지목한 가운데 여러 가지 좌충우돌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마가렛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고,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며 탑승한 기차에 함께 탔던 자신의 어머니를 래리가 공격하려 했을 때 – 모욕적인 말로 그의 화를 돋운 그녀에게 순간적인 살의를 느껴 –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를 보이는 오웬이 “Momma”를 외치며 쫓아가 엄마의 목숨을 구하면서 오웬의 어머니도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잠시나마) 표합니다. 영화의 끝 부분은 오랜만에 출판된 래리의 책과 처음으로 출간되는 오웬의 책(팝업북)이 모두 성공을 거두는 최상의 결말, 즉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지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라는 로맨틱 코미디 덕분에 한국 관객들에게도 이름과 얼굴이 잘 알려졌을 배우 빌리 크리스탈(Billy Crystal)이 주인공 두 명 중 하나인 래리의 역할로 특유의 재치 있는 연기를 보여 주는가 하면, 배우와 성우, 감독, 프로듀서, 각본가 등으로 다방면의 재능을 자랑하는 –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이란성 쌍둥이로 출연한 코미디 영화 “트윈스(Twins)”로 한국 관객들에게 역시 낯설지 않을 – 대니 드비토(Danny DeVito)가 이 영화에서 연출과 주연을 맡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줍니다. 150cm가 채 안 되는 신장이라는 상당히 불리한 신체 조건을 가지고도 오히려 이런 특징을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 구축에 활용해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대니 드비토의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면서, 이같이 ‘위험한’ 소재를 다룰 수 있었던 그의 ‘용기’에도 함께 주목하게 됩니다. 


‘상식’을 가지고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로선 이 영화를 보면서 그냥 웃자고 만든 이야기지 ‘설마’ 저런 엄마가 세상에 존재할까 하는 생각을 할 것이고, 이 작품이 제작된 1987년만 해도 ‘상상력’에 근거하여 재미있게 만든 ‘픽션’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소설이나 영화, 연극 등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일정 소재를 “극(劇)적으로” – 말 그대로 드라마틱(dramatic)하게 – 표현한 것일 뿐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데다, 최근 들면서 소설이나 영화 뺨치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세상이 되다 보니 이런 영화가 주는 메시지의 해석 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여겨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특성상 아무리 부모나 형제라 해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에게 ‘살의’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 지나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고, ‘천륜’을 거스르는 상대에게는 본인도 그 천륜이라는 것 자체를 무시해 버리려는 본성이 발현되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타인에 대해서보다 훨씬 큰 것은 그 부모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자녀들의 바람과 기대가 그만큼 더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바보 취급하면서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존재라고 비하하는 오웬의 어머니를 보고 있으려니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에서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와 “사도(思悼)”에 등장하는 “영조” 임금이 떠오릅니다. “글래디에이터”의 경우 아들인 자신보다 매사 뛰어나고 용맹한 “막시무스(Maximus)” 장군에게만 인정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마르쿠스 황제)를 그 아들 “콤모두스(Commodus)”가 살해하는 내용이라면, “사도”의 경우는 본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사도세자)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아버지(영조)가 자기 가문(즉, 왕권)의 수호를 위해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 사실상 직접 ‘살해’하는 –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흔히 부모 자식이나 형제 관계같이 스스로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인연에 의해 정해지는 혈연적 관계를 “천륜(天倫)”이라고 부르는 한편, 부부 혹은 친구의 사이처럼 세상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는 “인륜(人倫)”이라고 일컬어집니다. 하지만 천륜이든 인륜이든 – 게다가 이런 개념을 낯설게 받아들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 인간 각자의 양식과 통제력에 의해서만 ‘패륜(悖倫)적’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은 불가능한 시점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자신을 정신적으로 ‘학대’할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만나면 ‘폭력’부터 쓰고 보는(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출시된 비디오의 제목을 “엄마는 해결사”로 기록한 자료도 발견되는) 어머니임에도 결정적 순간 그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절박하게 달려가는 아들 오웬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과 같이 - 또한 저의 번역서 내용 중에도 논의된 바 있듯 - 인간 스스로는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음에도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진리, 즉 하나님께서 인간 내부에 ‘장착’시켜 주신 “객관적 가치 기준”에 의해서만 점차 흉흉해지는 세상적 가치와 절대 기준의 왜곡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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