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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삶’과 ‘생존’의 경계에서...

by Joanne

딸 J의 시선



예전에도 몇 번 언급한 적 있듯 나는 워낙 쫄보인지라 공포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데, 그에 비해 "호러"라는 장르 그 자체에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도 "좀비물"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액션이 가미된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 시리즈, [아미 오브 더 데드(Army of the Dead)] 등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봤고 - 아예 코미디 쪽으로 가면 [새벽의 황당한 저주(Shawn of the Dead)]도 꽤 훌륭하다 -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무서웠던 [킹덤]을 정주행하느라 밤을 새웠던 기억도 있다. 연상호 감독의 2016년 작 [부산행] 역시 "좀비"라는 소재를 다룬 작품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이다.


[부산행]은 스토리의 큰 뼈대가 단순하다는 것이 큰 장점인 영화로서 짧게 요약하면 부산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의 승객들이 갑자기 퍼진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들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펀드매니저인 "석우"(공유)와 그의 딸 "수안"(김수안)으로, 아내와 별거 중인 석우는 부산 친정에 내려가 있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새벽같이 열차에 탔다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 그 밖에도 임신 중인 "성경"(정유미)과 그녀의 지나치게 듬직한 남편 "상화"(마동석), 대회에 출전하려는 고교 야구팀의 학생들, 어찌어찌 기차에 탑승한 노숙자(최귀화)와 영화 속 최강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용석"(김의성) 등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출연해 ‘좀비’의 등장이라는 사상 초유의 재난에 반응하는 인간 군상의 여러 면모를 보여 준다.



거듭 말하듯 나는 호러라는 장르, 그중에서도 좀비 영화에 관심이 많지만 좀비라는 소재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사실 좀비는 무섭고 징그럽다. 요즘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좀비들이 빠르게 달리고 관절을 기괴하게 꺾는 존재들로 진화한 것도 불만스럽다. 옛날처럼 천천히 좀 움직이라고!!) ‘좀비’라는 위험한 존재와 관련된 사회적 의미와 공포감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말해야 할 듯하다. 대부분의 호러 영화에서는 귀신이나 뱀파이어, 미치광이 살인마 같은 ‘외부의 위협’에 대항해 등장인물들이 똘똘 뭉쳐야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 "혼자 다니는 인물이 가장 먼저 죽는다"는 것이 호러 장르의 유구한 클리셰이기도 하고 말이다 - 좀비물에서는 그와 반대로 ‘단절’이 생존의 가장 필수적 조건이 된다. 특히 좀비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처리하는([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처럼) 일을 목표로 삼지 않는 [부산행] 류의 영화에서는 생존자들이 무리 지어 움직이는 것에 아무런 이점이 없다. 오히려 함께 움직이다 소리를 내 좀비들을 불러들일 수 있는 데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언제 좀비로 변해 공격을 가할지 모르는 ‘잠정적인 적’이 될 뿐이다. 실제로 영화 초반, 감염된 소녀를 발견한 승무원이 그녀를 도우려다 물려 감염이 되면서 열차에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고, 야구팀 학생 "영국"(최우식) 또한 친구인 "진희"(안소희)가 감염자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를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물어뜯긴다.


말하자면 좀비물에서의 가장 큰 두려움은 ‘접촉’인 셈이고, 그렇기에 다른 호러 영화나 재난 영화들에서 감동 포인트로 자주 사용되는 등장인물들의 협력과 소통, 신뢰와 이해가 그 힘을 잃으면서 사람들 간의 디폴트는 ‘단절’ 혹은 ‘배척’이 된다. 영화의 초반부, 성경과 상화가 도망쳐 오는 것을 보면서도 객실의 문을 닫아 버리는 석우의 행동은 무척 이기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그리고 지금까지 일과 성과에 집중하느라 아내와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그의 냉정한 성향을 대변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석우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감염자들, 혹은 감염 의심자들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만이 더 큰 위험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말이다. 좀비물 속 세상에서는 모든 타인이 위협의 대상이 되기에 상대를 ‘배척’하는 것도 자기 방어, 즉 ‘정당방위’의 범위에 속하게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설정이 정말정말 두렵다. 인간의 이기심과 잔악함에 날개를 달아 주는 이런 상황들은 생각만 해도 섬찟하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강타했던 몇 년간의 시간 속에서도 비슷한 공포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크게 앓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실질적 위험만큼이나 격리, 즉 타인과의 ‘단절’에서 유발되는 문화적, 정서적 문제들이 심각하게 다가왔는데 -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의 방침들과 예방책들은 당시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조치들이라고 믿는다 - 타인을 경계해야만 했던 그 시간의 후유증이 아직까지도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외부인’을 향한, 특히 이민자나 외국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등을 배척하고 증오하며 그들과의 접촉과 교류를 거부하는 추세가 심각하게 증가했다는 점이 더욱 그렇다. 사회의 안녕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위야 어떻게 되든 자기 자신의 만족과 개인적 이익에만 집중하는 이기심이 대놓고 성행하는 풍조 또한 타인에 대한 단절과 배척이 가장 나쁜 방향으로 진화한 결과물일 듯하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멀쩡한 사람들을 “감염자”라고 매도하며 군중을 선동하고 불신을 부추기는 용석의 행태가 단순히 ‘영화 속’ 악역의 모습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물론 작품 안에서 결국 살아남는 인물들은 단절과 배척이 아닌 협력과 소통, 공감을 선택한 사람들로, 성경은 좀비에게 물어뜯기는 승객을 보며 남편에게 도와주라고 말했고 석우가 자신들 앞에서 객실 문을 닫았는데도 다들 겁이 나서 그랬을 테니 이해해 주자고 상화를 달랜 사람이다. 수안 역시 노숙자를 무시하는 용석의 조롱에 반박할 뿐 아니라 딸과 자신만 격리 조치를 피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군 관계자와 ‘딜’을 하던 석우의 행동에 실망을 표현하는 아이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열차의 승객 가운데 가장 약자라는 위치(임신부, 어린아이)에 있고 그렇기에 이들의 생존은 타인의 희생을 통해 가능할 수밖에 없다. 신체적 조건으로만 따지면 누가 봐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상화는 임신한 아내를 위해 미끼가 되고, 영화의 후반부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석우 또한 성경과 수안을 지키기 위해 좀비로 변한 용석의 입을 틀어막다가 손이 물리며 감염이 되고 만다. 사실상 이 약자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더 강한 자들의 희생’을 통해 살아남게 되는 셈이다.



대부분의 재난 영화에서 "강아지와 아이는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전제가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잡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에 성경과 수안이 마지막까지 무사히 생존해 부산의 ‘안전지대’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는 조금 더 복잡한 생각들이 오갔다.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혹은 여러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긴급 상황에서 주인공에게 방해가 되거나 곤란에 빠지게 만드는 것을 ‘민폐’라고 여기는 경향이 큰데, 그런 맥락에서 보면 성경과 수안이라는 약자들이 상화와 석우의 죽음을 통해 안전하게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게 불공평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성경과 수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상화와 석우의 선택을 낭비나 허비가 아닌 ‘희생’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영화 속에서 ‘살아 있음’의 의미 혹은 목표와 연결되어 있으며,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는 상태만 추구하는 용석과 달리 상화와 석우의 궁극적인 목표는 끝까지 자신들의 인간성(humanity)을 지키는 일이었음을 보게 된다.


상화는 달려드는 감염자들을 혼자 저지하며 최대한 시간을 버는 동안, 잠시 대립했던 석우에게 아내를 부탁하면서 울고 있는 성경에게 딸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것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한다. 펀드매니저로의 직무 중 여러 ‘더러운’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데다 가족과의 관계에도 소홀했을 석우는 수안을 보듬고 위로한 후 갓 태어난 딸을 안아 보았던 환희의 순간, 티 없이 맑았던 사랑과 순수의 시간을 떠올리며 마지막을 맞는다. 그에 비하면 용석의 끝은 특히 끔찍한 측면이 있는데, 좀비에 물린 다른 등장인물들의 마지막 순간이 자세히 그려지지 않는 것과 달리 용석은 변이가 되는 중에도 어느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이며 맨정신으로 석우에게서 “당신은 감염되었다”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누구보다 자신의 안위가 중요했고 변이를 두려워했던 용석에게는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죽음보다 훨씬 더 잔인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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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화와 석우가 지켜 낸 ‘인간성’은 수안을 통해 안전지대에까지 퍼져 나간다. 서로를 의지하며 걸어오는 성경과 수안을 발견한 군인들이 터널 속 어둠 때문에 그들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지 못할 때 수안의 노랫소리가 그들의 ‘인간성’ 혹은 ‘인간됨’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단절과 배척의 태도를 취하려던 군인들이 생존자를 보호하고 받아들이는, 자신들의 ‘인간성’을 되찾는 순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위협과 공포가 몰아치는 상황 가운데 그 종착지가 어떤 모습일지 확신하지 못한 채 내달리는 열차의 여정이 우리 삶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낯선 상대, 나의 울타리 밖에 있는 ‘남’을 배척하거나 이용하는 방식에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더 쏠리고 있다는 두려움이 종종 들지만, 우리 사회의 궁극적 목표가 단순히 ‘살아남는’ 의미에서의 생존으로 전락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져 본다. 끝까지 각자의 인간성, 인간됨을 지켜 내면서 강한 자들이 더 약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사랑의 순간들이 쌓이고 굳어 튼튼한 안전지대를 구축하기를, 그리고 그곳에서는 누구든 따뜻하게 환영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 C의 시선



영화 “부산행”은 이 작품 이후 “반도,” “정이,” “계시록” 등의 - 얼마전 개봉한 “얼굴”을 포함하여 - 문제작들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이 실사(實寫)로는 처음 제작해 2016년 발표한 영화입니다. “한국 최초 좀비 블록버스터”라고 불리며 1,000만 관객을 넘기는 흥행 실적을 기록한 데다가 개봉 첫날 86만 이상의 관객수 동원으로 역대 최고 오프닝이라는 기록도 세우게 된 작품이지요. 촬영 분량의 절반 가량이 부산행 KTX 안에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서울에서부터 441km 거리의 부산에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경악과 공포로 점철되는 내용을 실감나게 그려 내기 위해 열차 바깥 장면의 촬영을 LED 스크린으로, 전체 분량의 1/3 가량을 CG로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연출 경력을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으로 시작했고 이후 2D 애니메이션으로 전환히며 단편영화 “지옥: 두 개의 삶”에 이어 장편영화 “돼지의 왕”을 연출했던 연상호 감독이 “서울역”이라는 좀비물 애니메이션 제작 도중 좀비물 실사 영화인 “부산행”의 연출을 맡았다는 소식에 당시 세간의 관심이 모였는데, 해외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수작 좀비물”이라는 호평을 얻은 이 작품이 2016년 제 69회 “칸 영화제”의 심야 상영 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Midnight Screening)”에 초청을 받으면서 연상호 감독은 자신의 이전 작품 “돼지의 왕”에 이어 두 번째로 칸에 초청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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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의 승객과 행인, 군 병력 등 상당수의 인물이 출연하는 이 영화의 핵심 주인공은 아내와 갈등을 겪고 있는 바쁜 직장인(펀드매니저) “서석우”로, 엄마가 머물고 있는 부산에 혼자라도 가겠다고 나선 어린 딸 “수인” 때문에 마지못해 부산행 열차에 함께 오른 입장입니다. 같은 열차의 승객인 임신부 “성경”과 ‘다정한’ 남편 “윤상화”는 유별난 금슬을 자랑하는 부부인 한편, 고속버스 회사의 상무이사로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KTX에 승차한 “용석”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행태를 보이는 인물입니다. 대회 참가를 위해 단체로 승차한 고교 야구팀 선수들 가운데 한 명인 “민영국”과 팀의 응원단장으로 이 여행에 동행한 “김진희” 같은 고교생을 포함하여, 대전에 가려고 KTX에 탑승했다가 끔찍한 사태에 휘말리는 “인길”과 “종길” 자매, 그리고 이 열차의 기장인 “김동현”과 주요 승무원인 “이기철” 등, 다양한 위치와 계층의 인물들을 영화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은 간단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과 상황이 뒤엉키는 이 영화의 구성은 3개의 역과 구간(서울 – 대전, 대전 – 동대구, 동대구 – 부산)을 거치며 벌어지는 사건들로 구분되는 흐름을 보입니다. 출발 직전 갑직스레 열차에 뛰어오른 기괴한 상태의 소녀가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발견한 여승무원이 몹시 당황해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그 소녀에게 물어뜯겨 같은 모습으로 변하면서 역시 발작을 일으키고, 너무 놀라 무방비 상태이던 다른 승객들도 그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물어뜯기며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서울역을 막 출발한 기차에서 일어나는 전체 사건의 발단입니다. 고교 야구부 학생들도 상당수가 물어뜯겨 감염이 되고 여승무원이 팀장을 물어뜯으며 팀장 또한 감염자가 되는 공포스런 상황에서 석우는 화장실 통로에 넋을 잃고 서 있던 수안을 안고 황급히 안전한 쪽으로 옮겨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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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출발 직후 발생한 최초 감염 사태로 천안아산역을 무정차 통과한다는 안내 방송을 한 기장은 해당역에 도착해 서행하는데, 이때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광경은 필사적으로 열차에 승차하려 문에 달라붙는 절박한 생존자들을 감염자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끔찍한 모습입니다. 곧이어 기장은 대전이 종착역이니 도착 즉시 모든 승객은 하차하라고 방송으로 통지하지만, 대전이 폐쇄되었다는 정보를 주고받는 용석의 통화를 엿듣게 된 석우는 군 지휘부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해 자신과 수안만 격리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고, 대전역 도착 후 다른 승객들로부터 이탈해 별도의 출구로 향합니다. 그러나 메인 출구로 가던 사람들이 이미 감염된 군인들을 보고 놀라 다시 열차 쪽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기장과 승무원 기철을 포함한 용석과 진희 등이 15호칸에 무사히 탑승한 반면 성경과 수안, 인길 등은 하필 감염자들이 타고 있는 13호칸에 탑승하는 바람에 화장실에 숨어 겁에 질린 채 떨게 되지요. 게다가 감염된 군인들을 제어하느라 뒤에 쳐진 석우와 상화, 영국 등은 이미 출발한 기차에 간신히 올라타면서 그들로부터 한참 떨어진 9호칸에 탑승하게 됩니다.


대전역을 힘겹게 출발한 기차에서 서로 간의 통화로 수안과 성경이 13호칸 화장실에 숨어 있음을 알게 된 석우와 상화, 그리고 15호칸의 진희에게 가려는 영국은 여러 묘수를 동원하며 가까스로 13호칸까지 도달하고, 그곳에서 만난 모두는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15호칸으로 함께 가느라 애를 쓰지만, 진희에게서 그들이 자신들 쪽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들은 용석과 그에 동조하는 승객들이 석우 일행도 감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며 문을 잠그고 열어 주지 않아 감염자들을 혼신의 힘으로 저지하던 상화도 끝내 그들에게 물려 감염자가 됩니다. 석우에게 아내 성경을 부탁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상화가 최선을 다해 방어를 해 주었음에도 15호칸 승객들은 목숨을 걸고 그곳까지 온 석우, 성경, 수안, 영국 등을 다른 칸으로 가라며 매몰차게 내쫓는데, 이런 와중에 대전역에서 뒤처져 헤어졌던 언니가 감염자로 변해 가는 것을 목격한 종길이 자기만 살겠다는 사람들의 악다구니에 환멸을 느끼며 감염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면서 15호칸의 승객들도 모두 – 용석과 기철만 화장실에 숨고 – 감염되는 사태가 벌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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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지인 부산까지 직행하려던 열차가 동대구역에 진입하는 순간 시야를 가리던 검은 연기가 흩어지며 파괴된 열차와 컨테이너들이 선로를 차단한 광경이 펼쳐지는데, 운행 가능한 열차를 발견하면 좌측 끝 선로에 대기시키겠다는 기장의 방송에 따라 부산행 KTX에서 내려 왼쪽 끝 선로로 이동하던 생존자들 가운데 진희와 영국은 물론 기장 동현과 승무원 기철까지 용석의 간계로 감염이 되고 마지막엔 용석 자신도 감염자가 됩니다. 동대구역을 자동으로 출발한 기관차에 겨우겨우 탑승한 석우 일행이 조종실을 확인하러 갔다가 감염된 상태의 용석과 마주치게 되면서, 수안과 성경을 공격하는 그를 제지하던 석우는 자신 역시 손이 물려 감염자가 되고도 혼신의 힘을 다해 용석을 선로로 밀쳐 낸 후 울며 매달리는 딸을 뒤로한 채 스스로 선로에 몸을 던집니다. 결국 단둘만이 살아남은 성경과 수안은 천신만고 끝에 부산역에 도착하지만 그들 앞에 가로놓인 터널 맞은편엔 방어선인 부산의 사수를 위해 실탄을 장전하고 대기 중인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감염 여부를 판별할 수 없는 그들을 조준한 병사에 의해 사살되기 직전의 상황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발표회 때 아빠에게 들려 주려고 연습했던 수안의 노래 “알로하 오에(Aloha ʻOe)”가 터널 안에 울려 퍼지면서 군인들은 총을 내려놓고 그들을 ‘생존자’로 인정하며 구조하게 되지요.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받는 작품들 대부분이 숨은 의미를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듯, ‘좀비’를 소재로 삼은 이 영화 역시 단순히 “좀비 영화”로만 이해할 경우 왜곡되고 부적절한 해석으로 이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제가 가장 주목하게 된 부분은 ‘자신밖에 모르는’ 석우, 그런 그와 정반대의 성정을 갖고 있는 듯한 그의 아내 - 출연은 하지 않지만 수안의 말을 통해 ‘인격’이 짐작되는 - 그리고 그런 엄마의 영향으로 아빠와 다른 성향을 갖게 된 딸 수안의 대비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늘 남들을 먼저 챙기는 인길이 동생 종길을 의자에 앉히느라 자신은 서 있는 모습을 본 수안이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양보하자 석우는 수안에게 그럴 ‘필요’ 없다면서 “지금 같은 땐 자기 자신이 제일 우선”이라 말하고, 수안은 그런 아빠를 향해 “우리 할머니(석우 어머니)도 매일 무릎 아프다고 했는데…” 라며 말끝을 흐립니다. 대전역에 도착한 후 격리를 피하기 위해 자신들만 다른 출구로 나가려 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도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수안에게 석우는 다시 “그럴 필요 없다”며 언성을 높이지만, 어린 딸은 아빠를 올려다보며 “아빠는 자기밖에 몰라, 그러니까 엄마도 떠난 거 잖아요”라는 ‘뼈 때리는’ 말로 응수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처럼 딸로부터 ‘자기중심적’ 속성을 지적 받던, 또한 영화 초반 먼저 피한 자신들만 살겠다고 그쪽으로 달려오던 상화와 성경의 눈앞에서 문을 잠근 채 들여 보내지 않으려 했던 석우가 그런 이기적 죄성에 계속 머무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자신보다 연약한 다른 생존자들을 돕고 보호하며 자신의 옛자아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결국은 사랑하는 딸 수안과 상화의 아내 성경(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던 남편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은)을 위해 자신도 목숨을 바치는 결정을 하는 ‘변화’된 사람으로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반면, 영화 초반 화장실에 숨어 있던 노숙자를 수안과 함께 발견했을 때 “너도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저 아저씨처럼 된다”라는 막말을 해서 “우리 엄마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랬는데…” 라는 면박을 들었던 용석은 마지막까지 전혀 변화되지 않은, 오히려 악화되는 상황 속에 더욱 끔찍한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지요. 더구나 용석의 그 같은 악함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쳐 처음에는 원칙과 명분을 지키려던 기철 역시 점차 자신처럼 괴이하게 ‘변질’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스스로의 잘못된 판단과 행위가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영화가 제시하려는 메시지 중 하나인 듯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15호칸 근처에 도착한 석우 일행을 못 들어오도록 막다가 결국 다른 칸으로 쫓아낸 용석과 다른 생존 승객들이 자신들 외에 모든 사람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해 촘촘하게 설치한 밧줄 등의 차단물은, 종길이 감염자들에게 문을 열어 들어오게 했을 때 그들 자신의 탈출을 - 아이러니하게도 -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작용을 합니다. 또한 영화 후반부 석우가 부하 직원의 전화 내용을 통해 자신들이 주식 ‘작전’을 벌여 억지로 살려 놓았던 “유성 바이오”라는 회사가 그 모든 사태(자기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내도 연락이 두절된 데다 본인들의 생존 가능성도 불투명한)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흐느끼는 장면 역시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다”는 흔한 속담은 물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길이어도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뿐이다; 우리말성경 (There is a way that seems right to a man, but its end is the way to death; ESV)”라는 잠언의 두려운 경고(잠 14:12; 16:25)까지 기억나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동대구역에서 선로의 차단을 목격하고 진행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기장이 운행 가능한 열차를 발견하면 좌측 선로에 주차할 테니 조심해서 오라는 방송을 할 때 “행운을 빕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들으며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행운(luck, fortune)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행운’이었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수안과 성경은 그저 유난히 운 좋은(lucky, fortunate) 사람들일 뿐일 테니까요. 예전에 저희가 다루었던 영화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의 비평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소녀 “잉드리시카”와 젊은 여성 “안나”를 보며 “부산행”과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는 소감을 밝힌 일이 있는데, 이들의 생존을 우연한 행운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많고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했으며 그 ‘변수’란 결국 물밑에서 모든 과정을 지휘하신(orchestrating) 하나님의 뜻과 섭리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축복의 인사를 전할 때 “행운을 빕니다(Good luck)”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합니다(God bless you)”라고 말하는 이유일 테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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