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발렌타인 데이를 맞아 로맨스 영화 몇 편을 짧게 다루는 기획을 생각하게 되었다. 작품 속에 표현되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를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2004년 작 [노트북](The Notebook) 같은 ‘정통’ 로맨스에는 알러지 반응이 일어나는 비뚤어진 성격 탓에 ‘로맨스’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 자체는 꽤 독특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밝힌다. ‘로맨스’물을 표방하는 작품보다는 장르를 막론하고 영화 안에서 인물들의 관계성과 ‘케미’에 더 집중하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를 ‘추천’한다는 의도보다는 좋아하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드라이브] (Drive)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2011년 작 [드라이브]는 아마도 주연배우 라이언 고슬링의 ‘핫함’(인기적 측면에서)이 절정으로 다다랐을 시점 나온 작품일 것이다. 화려한 영상미만큼이나 어딘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내용과 철학으로 유명한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 혹은 관객 친화적인 영화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동차 정비공이자 스턴트 드라이버로 일하며 밤에는 범죄자들의 도주를 돕는 운전사 역할을 하는 주인공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가 감옥에 수감된 남편을 기다리며 어린 아들 “베니시오”를 홀로 키우는 이웃 “아이린”(캐리 멀리건)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은 크게 특별할 것이 없고, 그녀의 남편 “스탠다드”(오스카 아이작)가 출소하며 시작되는 비극 또한 예측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감각적인 사운드트랙과 차곡차곡 쌓인 긴장을 터뜨리듯 폭발하는 강렬한 액션 신 사이에서 조용하고 섬세하게 진행되는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서사는 영화가 예견된 끝으로 달려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관객에게 애틋함과 아련함을 선사한다. 매사 무덤덤하고 무심해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짧은 눈짓과 시선을 통해 조금씩 전달되는 그의 깊고 넓은 감정 또한 영화에 묵직함을 더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 속 드라이버와 아이린이 로미오와 줄리엣보다도 더욱 안쓰럽고 안타까운 ‘엇나간 인연의 연인’(star-crossed lovers)이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 속 “드라이버”가 라이언 고슬링이 이후 2025년 작 [스턴트맨](The Fall Guy)에서 연기한 스턴트맨 “콜트 시버스”와는 거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엄청난 순애보를 보이는 부분은 비슷하다는 점이 재미있다. [스턴트맨] 또한 보편적 ‘로맨스’ 영화는 아니지만 썸과 연애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두 주인공 사이의 케미가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고 말이다.
[미이라](The Mummy)
누구나 영화의 객관적 품질과는 상관 없이 그냥 애정하는 작품들이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는 1999년 작 [미이라]가 그중 하나다. 물론 영화가 개봉한 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컬트’작(cult favourite)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기는 한다.
1932년 개봉한 동명 영화를 재해석한 [미이라]는 냉정히 말해 B급 액션 영화로, 1920년대 이집트의 유적지에서 전설의 보물을 찾던 도서관 사서 "에블린"(레이첼 와이즈)과 그녀의 오빠 "조나단"(존 해나), 그들의 안내인으로 고용된 군인 출신 "릭"(브랜든 프레이저)가 수천 년 전 저주 받아 매장된 미이라 ‘이모텝’(아놀드 보슬루)을 부활시키며 일어나는 혼돈을 담는다.
사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내게는 애증의 작품인데, 아주 어릴 적 이 영화 속에서 징그러운 미이라가 등장하는 장면을 우연히 봤다가(기억하기로는 “교보문고” 같은 큰 서점에서 큰 TV 화면으로 재생되던 중이었다) 한동안 악몽을 꿨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랫동안 이 작품을 끔찍한 호러 영화 정도로 생각하고 기피해 오다가 몇 년 전 나름 트라우마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냥 유치하고 재밌는 영화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전설적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도 액션 영화로서의 직무를 잘 해내는 재밌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했을 정도로 충분히 신나는 영화지만(물론 세련되거나 뛰어난 작품이라는 기대감을 버리고 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주인공 릭과 에블린 사이의 관계성이다. 사실 이 작품은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다루고 싶은데, 레이첼 와이즈가 연기한 당돌한 공부벌레 ‘에블린’과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무모한 ‘육체파’이지만 그럼에도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릭’의 조합이 당시로서는 꽤 선구적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요즘 흔히 욕받이가 되는 ‘민폐’ 캐릭터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당당하고 주도적이고, 릭은 위험에서 그녀를 구해주는 든든한 백마 탄 왕자의 포지션을 갖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의 지성과 판단력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공통 분모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둘이 악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미이라와 좀비 비스무리한 그들의 부하들을 막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와중에도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그래서 의외로 따뜻하고 ‘서윗’하게 다가온다.
주인공들의 케미에 힘입어 나온 속편은 꽤나 혹평을 받았는데, 객관적으로는 그 평들에 동의하긴 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미이라] 시리즈의 1, 2편은 둘 다 애정하는 작품들이다. 2008년에 개봉한 3편이나 스핀오프 시리즈인 [The Scorpion King], 2017년에 야심차게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의 "리부트"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오리지널 캐스트에 대한 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지며 브랜든 프레이저, 레이첼 와이즈와 존 해나가 재결합하는 4편을 제작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단은 기대감을 가졌다가 실망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다. 릭과 에블린이 여전히 눈꼴 시리도록 알콩달콩 살며 몇번이고 세계의 멸망을 막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참 반가울 듯하다.
[비잔티움] (Byzantium)
"영원을 산다"는 설정의 생명체들답게 ‘뱀파이어’를 다루는 영화들은 그 작품의 장르와 상관 없이 로맨스적 요소, 그러니까 불멸의 삶 속에서 사랑이나 애정이라는 감정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한 탐구를 어느 정도는 하기 마련이다. 그런 주제에 대한 고찰은 1994년 작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거나 짐 자무쉬의 2013년작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Only Lovers Left Alive) 등의 조금 더 ‘진지한’ 작품들에서 더 뛰어나게 표현된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오히려 더 오래 뇌리에 남는 영화는 닐 조던의 2012년작 [비잔티움]이다.
작품은 영국의 황폐한 해변가 마을에 흘러들어와 자리를 잡는 두 비밀스러운 자매 "클라라"(제마 아터턴)와 "엘레노어"(시얼샤 로넌)를 조명한다. 이 둘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은 곧 밝혀지는데, 다 쓰러져가는 "비잔티움" 호텔을 물려받은 외롭고 순진한 마을 남자를 꼬신 뒤 불법적 사업을 통해 돈을 벌며 어둠과 향략을 ‘즐기는 듯’ 보이는 클라라와 달리 엘레노어는 병약한 "프랭크"와 순수한 사랑에 빠진다. 잔혹한 세상으로부터 엘레노어를 지켜주길 원하는 클라라와 달리 엘레노어는 클라라가 택한 삶의 방식을 거부하지만, 프랭크를 뱀파이어로 만든 뒤 함께 떠나려는 그녀의 계획은 모종의 이유로 이 둘을 쫓는 뱀파이어 단체인 "형제회"(The Brethren)의 등장으로 엉망이 되기 시작한다.
재미있게도 닐 조던은 앞서 언급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감독이기도 한데, 그래서 이 작품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뱀파이어물’이라기 보단 이 장르의 (나름) 전문가가 같은 소재 안에서 자유롭게 탐구하고 실험한 결과물에 더 가깝다. 이 작품은 뱀파이어의 ‘영생’이라는 특성 보다는 인간이 뱀파이어로 변하게 되는 과정을 엘리트(특히 부유한 백인 남성)들이 독점하며 생기게 된 특권과 부당함에 집중하는데, 여기서 클라라와 엘레노어는 상대적 약자인 여성이 이 ‘특혜’를 스스로 취한 특이하면서도 ‘위험한’ 존재가 된다. 뱀파이어의 정체성을 ‘저주’로 여기는 수동적 입장을 택하는 대신 클라라와 엘레노어는 뱀파이어의 영생을 능동적으로 이용하려 들고, 이 과정에서 그들을 계속해서 피해자이자 약자의 위치에 두고자 하는 뱀파이어 ‘사회’의 탄압을 받는다.
이 영화의 서사나 진행 방식 자체는 그다지 탄탄하지 않지만 우울한 듯 매혹적인 분위기,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 덕에 작품은 꽤 매력적이다. 작품 안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로맨스’ 요소 또한 그럼에도 영화 도처에 몽환적인 자력을 남기는데, 조니 리 밀러와 샘 라일리 같은 상대 배우들 덕인지 어떤 면에서 클라라와 악당 "루스벤", 의뭉스러운 "다벨" 사이의 삼각 구도는 [오만과 편견]의 ‘절망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클라라와 엘레노어 사이의 그것으로, 작품은 이 둘을 통해 자신을 원하지 않는 사회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약자들의 갈등과 연대, 그리고 ‘딸’을 향한 엄마의 죄책감과 통제를 흥미롭게 표현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나마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과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두 주인공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며 ‘다른 길’을 택함으로서 오히려 의미 있는 통합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사랑’의 과정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소개하거나 다루고 싶은, 로맨스는 아니라도 ‘로맨틱’한 영화들은 여럿 더 있지만 이만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다양한 종류와 방식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발렌타인 데이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