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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네씨 Oct 04. 2023

산에 묻힌 것은 어린 날의 추억 그 이상의 것이었다

영화 <여덟 개의 산>

조금 낯설게 느껴질 법한 알프스의 고산(高山) 지대. 그러나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영화 <여덟 개의 산>은 유년시절의 추억, 우정 사이 균열, 가족 간의 갈등, 상처의 회복 등의 다채로운 주제를 산을 무대로 펼쳐지는 복잡하지 않은 플롯에 녹여냈다. 샤를로트 반더히르미, 펠릭스 반 그뢰닝엔이 공동 연출 및 각본을 맡은 이탈리아-벨기에 합작 영화다.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코네티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제75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 이 글은 <여덟 개의 산>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날 가족과 함께 도시 토리노를 떠나 알프스 산맥의 몬테로사에 위치한 그라나를 찾은 피에트로는 마을의 유일한 아이이자 동갑내기인 브루노와 만난다. 두 소년에게 산은 우정을 쌓아가는 땅과도 같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산의 역사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산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알아내는 과정을 함께하며 둘의 우정은 알프스의 유빙이 흐르는 계곡처럼 깊어져 간다.


산에서 쭉 자라며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방목장이나 벽돌공 일을 돕던 브루노를 안타깝게 생각한 피에트로의 부모는 비용을 부담해서라도 브루노를 토리노의 학교로 입학시키려 한다. 도시는 브루노를 망칠 것이라며 이에 반발하는 피에트로. 결정적으로 브루노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브루노는 아버지 일터로 불려가며 벽돌공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헤어진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우연히 한번 마주치지만 눈길만 주고받고 대화는 나누지 못한 채 다시 뒤돌아선다. 네팔 히말라야를 여행하면서 보낸 후 서른이 넘어 그라나를 찾은 피에트로(루카 마리넬리)는 브루노(알레산드로 보르기)와 상봉한다. 20대를 아버지와 단절한 채 보냈던 것과 달리 브루노는 자신의 아버지와 끈끈한 유대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면비의 양면적 효과


이 영화의 화면비는 1.33:1의 비율을 쓰고 있다. 이러한 화면비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정밀하게 다룰 수 있는데, 먼저 두 사람의 우정을 보여줄 때는 타이트한 투샷을 활용하고 있다. 두 사람을 한 화면에 한 번에 잡는다고 할 때, 일반적인 화면비인 1.85:1을 쓰거나 2.35:1를 쓸 경우 투샷을 잡을 때 좀 더 거리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근데 1.33:1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샷을 잡으려면 훨씬 더 가까이 있어야 된다. 두 주인공이 들판을 뒹굴며 노는 장면,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 등이 그러한 투샷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여덟 개의 산>은 우정에 관해서 물리적으로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홀로 견뎌야 되는 고독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부르짓는 것 같지만 정반대로 고독이라는 대척점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1.33:1은 싱글샷을 찍을 때도 잘 맞는 화면 비율이다. 어쩌면 두 사람을 찍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을 찍을 때 훨씬 더 잘 맞는 비율이다. 우정을 다루는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이 단독샷이 중요할 수밖에 없고, 영화를 가만히 보면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 그리 많지 않다. 진한 우정을 그리는 동시에 주변을 배제함으로써 각자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정의 속성과 삶에 관한 태도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극과 극이 만나 우정을 일궈낸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대비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나무와 돌, 도시와 산(자연), 정주와 방랑, 유식과 무지 등이 대표적이다. 브루노는 교육받지 못하고 산에서 정주하는 나무라면, 피에트로는 도시에서 학교를 다닌 후 네팔 각지를 방랑하는 돌이다. '수미산'으로 상징되는 인물이 브루노라면 '여덟 개의 산'으로 비유되는 인물은 피에트로이다. 우정의 속성은 피에트로의 성질과도 닮아 있다. 때로는 갈등을 겪어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가까워지기도 하는 유동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피에트로의 이동을 통해 우정은 결코 정지된 유대감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삶의 터전은 산과 도시이며, 삶에서의 관계는 우정과 균열, 삶을 대하는 방식은 제각각 고독을 견디는 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삶에 관한 태도를 산행에 비유하여 나타낸 것도 인상적이다. 영화에서는 어린 피에트로와 아버지, 두 소년과 아버지, 피에트로와 브루노, 피에트로가 산행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피에트로를 영화의 단독 주인공이라고 설정하고 봤을 때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다. 영화는 피에트로가 삶에 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대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소설과 다른 궤도의 결말을 걷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진다. 아직 둘 다 접하지 못했다면, 소설보다는 영화를 먼저 보는 것을 추천한다. 다른 문화권에 사는 관객일수록 작가가 묘사하는 알프스의 광활함을 떠올리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를 통해서는 압도되는 산의 절경과 함께 강하고도 쓸쓸한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문득 아이맥스로 관람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끝으로 영화 <여덟 개의 산>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산, 관계, 인생에 관한 섬세한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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