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백수였던 우민호, '남산의 부장들' 감독되기까지

27일 300만 관객 돌파한 우민호 감독 인터뷰

by 씨네프레소

둘 중 무엇을 실수로 만들었을까.

2018년 '마약왕'으로 흥행 참패를 맛본 우민호 감독(49)에겐 한동안 이런 질문이 쏟아졌다.

스타일리시한 미장센, 캐릭터 간 팽팽한 기싸움으로 900만 명(감독판 포함)을 동원한 '내부자들'(2015)과 평단과 관객의 기대에 못 미쳤던 '마약왕' 중 어느 쪽이 본인의 실력이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이제는 그런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1월 27일 개봉 6일째를 맞이한 '남산의 부장들'이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인 500만 명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DSCF8208.jpg 27일 300만 관객을 돌파한 '남산의 부장들' 한 장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극 중 이름 김규평)로 분한 이병헌이 고뇌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쇼박스>

최근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우 감독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를 관객이 흥미진진하게 보게 하는 게 목표였다"며 "사료와 역사책엔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심리를 쫓아감으로써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우 감독 말이 무슨 뜻인진 주인공 이병헌 연기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와 담뱃갑을 움켜쥐는 손아귀 움직임으로 '각하'의 선택을 받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김재규(극 중 이름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의 깊숙한 내면을 드러냈다.


DSCF6772.jpg 차지철 역의 이희준, 박 대통령 역을 맡은 이성민에, 김형욱 전 중정부장으로 분한 곽도원까지 전 출연진은 차가우면서도 밀도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사진 제공=쇼박스>


영화 속 김 부장과 달리 우 감독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관객의 지지를 받을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 온전히 만족할 작품을 만든 창작자의 내면이 엿보이는 낯빛이었다.

우 감독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이었던 30대엔 그런 표정을 짓지 못했노라고 털어놨다. 이 인터뷰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백수처럼 지냈던 청년이 어떻게 충무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 됐는지에 대한 탐구다.


DSCF1909.jpg 그는 단어 선택을 신중하게 하는 사람이다. '내부자들'의 이강희 주필(백윤식)이 그랬듯, 토씨 하나로 문장 전체 의미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사진 제공=쇼박스>


30대 백수의 시간, 독서로 창작의 토양을 다지다

-2010년 '파괴된 사나이'로 상업영화계에 데뷔했습니다. 감독님 나이 39살이었는데요. 졸업 후 꽤나 긴 공백기를 어떻게 보냈나요.

▶ 공백기라기보다는 백수의 시간이었죠(웃음). 영화가 계속 엎어졌어요. 돈도 못 벌었고요. 그때 책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멘탈 관리하기 힘들지 않았나요.

▶ 힘들었죠. 불안했고요. 영화 한 편 못 찍고 이대로 끝나는 건가, 하는 자격지심에 찌들기도 했죠.


-불안감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 책 한 권을 읽었어요. 제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책이죠. '제5도살장'이라는 책인데요.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배웠죠. 체념의 미학이라고 할까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되 때로는 '여기까지다'라고 내려놓을 필요도 있다고요.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 후로 오히려 영화 제작이 들어가더라고요.


x9788954643252.jpg 우 감독은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통해 체념의 미학을 배우게 됐다고 했다. <사진 제공=문학동네>


-감독님 작품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나 영화는 무엇인가요.

▶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조셉 콘래드 '로드 짐'이 생각나네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쓴 존 르카레 작품도 좋아했고요. 영화로는 장 피에르 멜빌, 마틴 스코세지 등 다양한 감독에게 영향받았죠.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 김지운 감독 이렇게 한국 감독들이 더 큰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고요.


-다독과 한 작품을 여러 번 읽는 것 중 무엇을 추구하시나요.

▶ 저는 다양하게 읽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요.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영화도 반복적으로 봐요. 좋아하는 영화와 좋아하는 책은 시간이 되면 다시 한 번 들춰 보고요. 20대, 30대, 40대에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거든요.


우 감독은 '밀실'에서 이뤄지는 논의를 비중 있게 다룬다.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한다. <사진 제공=쇼박스>


감독에게 가장 좋은 공부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찍고보는 것


-언제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나요.

▶ 아버지가 굉장히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었거든요. 주말엔 '토요 명화'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곤 하셨어요. 그때 아버지랑 함께 영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낀 거죠. 영화감독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때부터 했어요. 영화과를 못 가고 재수를 하는 과정에서 기필코 영화과를 가겠다고 다시 다짐했고요.


-중앙대학교에서 배운 걸 현장에서 많이 활용하시나요.

▶ 학교는 학교일뿐이죠. 오히려 저는 영화를 많이 보고 책을 읽으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또, 영화를 찍으면서 많이 느끼는 것 같고요. 감독은 어떤 상황에서든 영화를 많이 찍어보는 게 중요해요. 장편이든 단편이든 말이죠.


-많은 영화감독이 30대 무렵 갖춘 연출력에서 평생 동안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감독님은 ‘간첩’(2012)에서 ‘내부자들’(2015)로 오는 동안에도 연출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다는 이야기를 듣죠. 40대 이후에도 꾸준히 연출력을 늘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글쎄요. 계속 영화를 찍으면서 조금씩 배워가고, 궁극적으로 연출에 대한 고민을 하잖아요. 저는 첫 상업영화를 찍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이후엔 운이 좋게도 쉬지 않고 영화를 찍었어요. 다른 사람들 눈에 제가 연출력이 는다고 보이는 건 제가 한 작품, 두 작품, 다섯 작품 하면서 성공은 성공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경험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산의 부장들.jpg '남산의 부장들' 김 부장은 '달콤한 인생'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선우를 연상시킨다. 우 감독은 "의도한 바는 없으나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했다. <사진 제공=쇼박스>


한국 영화계엔 여전히 리메이크 영화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가 순수한 원작이었을 때, 비로소 창작자의 창의성이 발휘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소설도 만화도 좋아하는 우 감독으로 말하자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보는 쪽이다. 그건 영화가 단순히 원작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원작의 세계를 넓히는 힘이 있는 매체라고 믿어서다.

"'남산의 부장들'이 역사에 갇혀 있길 바라지 않았어요. '영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영화적인 확장성'을 갖게 되길 바랐죠. 영화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는다면 알려진 그대로 바라볼 수밖에 없잖아요. 역사책에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인물의 내면을 드러냄으로써 그 사건을 다르게 보도록 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