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프레소] 영화 '마더!' 리뷰
매주 토요일 연재하는 '씨네프레소'를 브런치에 옮겨 담는 작업을 합니다. 오늘은 2022년 4월 2일에 올린 '마더!' 리뷰를 게재합니다.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단칸방일지라도 자기 집이 1만평 회사보다 더 편하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편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의 눈엔 정리 정돈되지 않은 채 더러워 보일지라도, 집에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내 필요에 따라 꺼내 쓸 수 있다. 사람은 자기 방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한다. 아마도 집이란 나의 인격과 취향, 기억을 그대로 펼쳐놓은 곳, 다시 말해 나의 뇌와 마음이 외부로 확장된 공간이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우리가 집으로 초대하는 건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다. 내 머릿속을 어느 정도 보여줘도 괜찮은 친구와 가족, 동료다. 또한 사전에 조율된 시간에 자신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황에서 손님을 맞이하길 원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나를 아무런 꾸밈없이 드러내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가족이 아무런 연락 없이 집으로 찾아온단 사실에 많은 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양가 어른에 대한 존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과장을 섞어 얘기해보자면 누군가가 내 머릿속을 불쑥 열어보는 상황이 싫어서일 것이다.
가족과 친구가 약속 없이 방문하는 것도 불편할 수 있는데, 완전히 낯선 사람이 자꾸 집에 찾아오는 상황은 어떨까. '마더!'(2017)는 시인 남편(하비에르 바르뎀)이 모르는 이를 집으로 들이며 아내(제니퍼 로런스)의 삶이 무너지는 과정을 그렸다. 남편은 시를 쓰고, 아내는 가정일을 돌보면서 평화롭게 지내는 두 부부의 집에 어느 밤, 한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는 자신을 정형외과 의사라고 소개하고, 남편은 그를 거리낌 없이 집으로 들인다. 아내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지만 남편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불청객에게 차를 대접한다.
낯선 이의 방문은 차 한잔 대접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집이 민박인 줄 알고 노크했다는 남자에게 남편이 방 한 칸을 내주기로 결정하면서다. 남자는 집에 있는 물건을 허락도 없이 만지지만, 남편은 자신의 시를 좋아한다는 남자가 마음에 든 눈치다. 이어 낯선 남자의 아내, 아들들까지 차례대로 이 집을 찾아와서 집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공간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점점 수위를 높여가는 방문객의 무례에 이를 수습하는 주인공 여자의 사생활은 황폐해지지만, 시인 남편은 자신의 호의에 남들이 감동받는 모습을 즐긴다. 심지어 불청객들은 집에서 다투다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호의를 권리로 여기던 낯선 이들은 집주인 여자를 하인처럼 부리기에 이른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아내는 손님들을 모두 내쫓고, 집주인 부부는 관계를 재건하기 위해 잠자리에 든다. 이 과정에서 부부에겐 아이가 생기고,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두 사람의 큰 기쁨이 된다.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하던 남편은 아이의 잉태를 통해 영감을 받고, 그때부터 집필에 매진해 인생의 걸작을 내놓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기 좀 전에 완성된 그 작품은 시인을 대문호 반열에 올리게 되고, 두 사람의 집 앞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붐비게 된다.
일단 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영화는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작품이다. 모르는 이들을 자꾸 집에 들이고, 그 사람들이 집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고도 내버려두며, 심지어 집에서 장례까지 치르도록 지원해주는 부부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의 적극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이 영화를 연출한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다른 작품들('레퀴엠'(2000), '블랙스완'(2010) 등)이 그렇듯이 말이다.
'마더!'도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혹자는 이 안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읽고, 시인과 뮤즈 또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발견하는 이도 있다. 기독교와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영화로 봐도 재밌다. 이번 칼럼에서는 예술가와 작품, 그리고 주변인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마더!'는 자신의 삶을 파먹고 살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숙명을 그린 듯하다. "모든 자전(自傳)이 어쩔 수 없이 소설적이듯이 모든 소설 또한 어쩔 수 없이 자전적이다"(이문열 '변경' 中)라는 문장을 굳이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예술 작품이 어느 정도 자전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은 좋은 예술품에는 필연적으로 창작자의 삶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마더!'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시인은 보다 탐욕스러운 예술가에 속한다. 그는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부지불식간에 작품에 반영하는 예술가를 넘어선다. 그는 작품이 될 수 있다면 자기 삶에 있는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가져다 쓸 준비가 된 사람이다. 집에 있던 불청객을 다 쫓아낸 아내는 이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이건(외부 사람을 자꾸 집에 불러들이는 건) 그들이 아닌 당신의 문제야. 당신은 자신과 작품밖엔 관심이 없잖아. 그런 일로 영감을 얻겠다는 건 착각이야. 내가 이 집을 새로 지을 동안 당신은 한 글자도 못 썼어."
즉, 남자는 자기 삶에서 더 이상 가져다 쓸 소재가 없자, 사적인 공간에 낯선 이를 들이면서까지 글감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남자 역시 이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 "알아. 그런데 글이 안 써져. 안 떠올라. 그래서 이 집에 생명을 불어넣고 싶어. 숨이 막혀? 나야말로 질식할 것 같아. 모든 게 완벽한 척하는 당신의 쇼에."
아내가 임신하자 남편은 시적 영감을 얻었고, 이를 통해 걸작을 완성했다. 그러나 팬들은 걸작을 감상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아내가 출산하자 남편의 추종자들은 걸작의 영감이 된 아이를 봐야겠다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아이를 한 번만 보여주자는 남편의 요구를 아내는 거절한다. 삶에 있는 모든 것을 찢고 태워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남편이 아이를 어떻게 할지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남편 또한 그의 과격한 팬들이 아이를 어떻게 할지 알고 있다. 그것이 자신에게 큰 슬픔을 안겨줄 것도 안다. 그러나 그는 추종자들을 위해 기꺼이 아이를 내주는데, 그에게 두려운 것은 슬픔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슬픔과 고통의 부재를 두려워한다. 그의 걱정은 삶이 잠잠한 것이고, 자신의 영감을 살아 숨쉬게 하기 위해서 그는 비통과 절망을 삶으로 끌어들인다.
남편은 아내가 잠든 틈을 타서 아이를 훔친다. 그리고 아이를 세상에 내주고, 그 어느 때보다 큰 찬사를 받는다. 남편의 추종자들은 아이를 찢고, 뜯고, 맛을 본 뒤, 그것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옳다며 싸운다. 이렇게 봤을 때, 영화에서 '아이'가 상징하는 바는 시의 영감이 아닌 '시'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아이'가 상징하는 바를 '시'로 놓고 본다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시인은 처음부터 부인 쪽이었고, 남편이 하는 일이란 그녀의 생각을 빼앗아 발표하는 것뿐이었단 이야기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은 "영화에서 예술가는 누구였는가"에 대한 답변이 될 것이다. 그건 시를 가로채서 발표한 '파더'가 아니라, 바로 시를 낳은 '마더!'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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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는 어쩌면 '뮤즈'라는 이름에 가려져 남성 예술가들에게 자기 인생을, 그것을 넘어 자기 작품을 도둑질 당한 여성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이것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마더!'는 다양한 상징을 담은 작품이기에 관객 각각은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장르: 스릴러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제니퍼 로렌스, 하비에르 바르뎀, 에드 해리스, 미셸 파이퍼
평점: 왓챠피디아(3.4/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68%), 팝콘지수(51%)
※2022년 11월 12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OTT): 티빙, U+모바일tv
OTT 영화와 드라마를 리뷰하는 '씨네프레소'는 다음과 네이버 등 포털 뉴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