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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프레소 Nov 14. 2022

사람을 바꾸는 데는 직언과 충격 요법만으론 부족하다

[씨네프레소]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리뷰

매주 토요일 연재하는 '씨네프레소'를 브런치에 옮겨 담는 작업을 합니다. 이번엔 2022년 10월 29일에 게재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리뷰입니다.

*주의: 이 글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배우자의 외도는 오랜 기간 영화의 주요 소재였다. 이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관객이 진짜라고 믿길 바라는 영화인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이야기 속 세상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캐릭터에 감정이 이입돼야 하는데, 반려자의 불륜이 일으키는 울분은 이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즉각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선 사람의 살의를 예지해 살인을 예방하는 미래 치안 시스템을 소개하기 위해, 한 남성이 아내의 외도를 직접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예지'될 수 있을 만큼 큰 살의가 존재한다는 점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데 배우자 불륜을 목격한 인간의 분노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을 것이다.

팻(오른쪽)은 외도한 아내를 잊지 못한다. 이웃집에 사는 티파니(왼쪽)는 팻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끼지만, 팻은 자꾸 그녀를 밀어낸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은 아내가 직장 동료와 샤워하는 모습을 목도한 남자 팻(브래들리 쿠퍼)의 이야기다. 그는 현장을 보고 정신이 나가 남자를 죽도록 팬다. 후유증 격으로 공황장애가 생긴 데다 근무하던 학교에선 쫓겨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배우자의 외도로 팻의 삶은 완전히 무너진다. 그러나 팻은 아내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음에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타 영화에서 남자들의 반응과 다소 다른 면을 보인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아내를 오매불망하지만, 정작 아내는 팻을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이웃집 여성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그런 팻에게 다소간 연민과 호감을 느끼지만, 아내와의 재결합이 지상 목표인 그는 티파니를 밀어낸다.

티파니는 첫 만남부터 팻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팻은 그녀가 자신에게 그토록 빨리 빠졌다는 사실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호감 드러내는 여자에게 "헤프다"며 상처 주는 남자


팻이 티파니의 접근을 거부하며 사용하는 언어는 '난잡하다' '지저분하다'와 같이 도를 넘어서는 말이 대부분이다. 그는 티파니가 자신을 처음 만난 날 호감을 표현하며 잠자리를 제안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헤프다'고 느낀다. 또 그녀는 팻과 둘이 만나 식사를 하며 자신이 회사에서 해고된 사유를 말해주는데, 그것 역시 팻이 그녀를 정죄(定罪)하는 근거가 된다. 남편과 사별한 후 생긴 우울감을 해소하고 싶었던 그녀는 사무실에 있는 모든 남녀와 잠자리를 했는데, 사장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쫓겨났던 것이다.

팻은 티파니가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밀어낸다. 자신이 다른 여성과 친하다는 소문이 나면, 부인과 재결합하는 데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티파니는 강인한 여성으로 그려지는데, 그의 폭언을 듣고도 계속 옆에 머문다는 점에서다. 그녀는 팻을 떠나는 대신,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의 곁을 맴돈다. "당신에게 마음을 열어서 털어놓은 말인데, 어떻게 나를 함부로 판단할 수 있냐"는 질문에 팻은 할 말이 없어진다. 팻이 그녀를 '슬럿'(slut·여성이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모욕할 때 쓰는 말)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실수로 드러냈을 때에도, 티파니는 "난 슬럿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신은 나처럼 스스로를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냐"고 당당하게 되묻는다.

티파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정신적 어려움을 겪었다. 자꾸 과거의 상처에서 맴도는 팻에 비해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아내에게 편지를 좀 전해줘" … "댄스 대회에 함께 나간다면 전달하지"


시간이 흐르며 팻도 서서히 티파니에게 마음을 연다. 이따금씩 팻의 아내와 만나는 티파니가 부부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도 있다. 자신의 편지를 아내에게 전해달라는 팻의 부탁에 티파니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바로 댄스 경연에 자신과 조를 이뤄 출전해 달라는 것이다. 아마추어 댄서인 티파니는 매년 열리는 춤 대회에 나가고 싶었으나 그녀와 사별한 전남편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팻은 댄스 대회에 나가자는 티파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티파니가 그 대가로 자신의 편지를 아내에게 전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팻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춤을 연습하는 동안 티파니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티파니 또한 팻에게 더욱 애정을 갖게 됨은 물론이다. 이것은 커플 댄스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함께 멋진 춤을 추기 위해선 파트너를 배려하는 가운데, 나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조율해야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 과정을 통해 서로의 배려심을 알게 되고, 상대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 팻은 이것이 자칫 티파니를 향한 애정으로 변할까 스스로를 경계한다. 춤을 추는 목적은 오로지 아내와의 재결합이라는 점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말이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팻은 쓰레기 봉지를 뒤집어쓰고 조깅을 했다. 정서가 불안정한 상태임을 누구든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구렁텅이에 빠진 남자 재활시켜 줬더니, 아내에게 돌아가네


팻의 상태는 점점 호전된다. 분노 조절을 못하는 모습으로 주변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 일쑤였던 그는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댄스 대회 출전이라는 목표에 집중하는 동안 사소한 것에 얽매이던 집착증이 줄어든 것이다. 무엇보다 옆에서 끈기 있게 그를 바라봐준 티파니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그의 상태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아내와 남자가 샤워하던 도중 틀어놨던 노래를 팻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듣고 패닉에 빠지자 그녀는 도닥여준다. 정신과 의사가 그의 증상이 나아졌는지 보기 위해 일부러 그 노래를 들려주며 자극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스티비 원더의 'My Cherie Amour'만 들으면 고장 난 시계처럼 반응하는 그의 상처는 그녀에겐 비웃음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영화엔 별난 성격의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한탕주의자인 팻의 아버지(오른쪽)는 가정을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는 큰 내기를 한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아내와의 재결합을 포기하지 못하는 팻의 주의가 산만해지자, 티파니는 팻의 아내가 썼다는 편지를 건넨다. 거기엔 그가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아내의 고백이 담겨 있다. 팻은 다시 대회에 집중하지만, 티파니는 불안감을 느낀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완성한 춤을 온 세상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가, 둘의 이별 무대가 될 것 같아서다. 게다가 그토록 냉랭하게 굴던 팻의 아내가 실제로 대회를 관람하러 오면서 그녀는 절망한다. 대회가 끝나고 아내에게 다가서는 팻을 보며 티파니는 대회장 밖으로 뛰쳐나간다.

두 사람은 겨우 5.0점의 평점을 받고 마치 우승한 듯 기뻐한다. 낮은 점수를 받은 이들을 위로하려던 옆의 참가자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팻은 전력 질주하며 티파니를 쫓아가 고백한다. 이것은 영화 초반에 그가 달아나고, 그녀가 따라오던 구도와 대조된다. "그 편지 사실 당신이 썼단 걸 알고 있어요. 내 미친 꼴을 보려고, 당신이 미친 짓을 했죠. 사랑해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오래 걸려 미안해요. 갇혀 있었어요."

이 영화엔 달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초반부엔 문제를 회피하고 달아나려는 팻을 티파니가 쫓아 달렸다면, 마지막엔 반대로 팻이 티파니를 쫓아간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직언과 충격 요법만으론 사람을 바꿀 수 없다


이 영화는 세상에 조화하지 못하는 다양한 캐릭터의 상호 작용에서 드라마를 빚어내는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장기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정신병원에서 온갖 약을 먹고 쓴소리를 들어도 고쳐지지 않던 팻의 조울증은 티파니를 만나 조금씩 누그러진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는 직언과 충격 요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티파니는 팻과 싸울 때 싸우더라도, 팻의 트라우마는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외도한 아내를 계속 기다리는 팻을 한심하게 느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상처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시도 대신, 그의 아픔을 인정하며 한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준 것이다.

티파니도 관계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사람을 좀처럼 믿지 못하던 그녀는 팻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다시 갖게 된다.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전문가의 맞춤형 솔루션이 각광받는 시대에 이 영화가 내놓는 해법은 다소 투박하지만 인간적이다. 우리 내면의 문제는 나를 단 한 번만 만나고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전문가의 직언으로 고쳐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외려 내 주변의 문제 있는 연인, 부모, 친구와 상처를 주고받고, 부대끼는 와중에 서서히 치유될 수도 있단 것이다. 우중충한 날에도 우리가 실버라이닝(silver lining·구름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가장자리)을 보며 화창한 하늘을 예감하듯, 상처투성이인 내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찰나의 밝은 모습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포스터. [사진 제공=나이너스 엔터테인먼트]

장르: 코미디·로맨스·드라마

관람가: 청소년관람불가

감독: 데이비드 러셀

출연: 제니퍼 로렌스, 브래들리 쿠퍼, 로버트 드니로

평점: 왓챠피디아(3.7/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2%) 팝콘지수(86%)

※2022년 11월 14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OTT): 넷플릭스


OTT 영화와 드라마를 리뷰하는 '씨네프레소'는 다음, 네이버 등 포털 뉴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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