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프레소] 영화 ‘크로니클’ 리뷰
*주의: 영화 ‘크로니클’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마블, DC코믹스 등 히어로물에서 영웅과 악당은 모두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쪽을 히어로로, 다른 쪽을 빌런으로 만드는 것은 선한 의지의 유무다. 일반적으로 자기 능력을 활용해 세상을 선하게 만들려는 쪽이 영웅이 된다면, 악당이 되는 건 이런 의지나 공동체에 대한 올바른 비전 없이 힘을 남용하는 쪽이다.
그러나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에선 막강한 힘을 갖고 모두의 칭송까지 받는 히어로를 찾기 힘들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일단 집권 세력이 되면 국가 권력 오남용 문제로 지적받는 것이다. 지난 정권의 과오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이겠다던 그들의 영웅적 선언이 허언으로 판명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것은 히어로물식 이분법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선한 권력’과 ‘악한 권력’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한 속성을 갖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크로니클’(2012)은 히어로물의 요소를 빌려와 히어로물의 한계를 묻는 작품이다.
영화는 괴로운 10대를 보내고 있는 청소년 앤드류(데인 드한)의 이야기다. 그는 학원 폭력 피해자이자 가정 폭력 피해자다. 학우와 아버지는 그를 때리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붙이겠지만, 사실 폭력의 이유는 한 가지다. 그가 약하다는 것이다.
앤드류는 자기 인생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투병 중인 어머니가 그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앤드류를 보살피기보다는 그에게 돌봄을 받는 쪽에 가깝다. 어느 날 앤드류가 카메라를 들고 자기 일상을 촬영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응시하지 않아 의미 없이 흩어지는 자신의 인생에 인위적으로라도 관찰자를 만들어 의미를 부여해 보려는 시도다.
어느 날 그의 카메라엔 경이로운 광경이 포착된다. 사촌이지만 별로 친하지는 않은 맷, 맷의 친구인 스티브와 함께 들어간 구덩이에서 발광체를 발견한 것이다. 기이한 소리를 내는 그 물체를 만진 뒤 세 사람은 염력을 갖게 된다. 염력을 이용해 세 사람은 사물을 이동시키고 하늘을 날면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앤드류는 셋 중 초능력을 가장 잘 쓰면서도 늘 자신감이 부족하다. 스티브는 그런 친구를 안쓰럽게 여겨 장기자랑 무대에 세운다. 학창 생활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이다. 무대에서 염력을 활용해 마술쇼를 보여준 앤드류는 순식간에 교내 슈퍼스타가 된다. 그를 무시했던 친구들이 환호하고, 여학생들은 그에게 말 붙일 기회를 찾는다.
초능력자가 된 주인공이 환대를 즐기며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공동체에 기여한다면 히어로물이 될 것이다. ‘크로니클’은 그렇지 않다. 그는 학교에서 환영받음과 동시에 불안감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며 실제론 약한 인간이란 사실을 들켰을 때 모두 외면하게 되리라 걱정한다.
그는 한 사건을 통해 본인의 생각이 기우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여학생과 스킨십 도중 지나친 긴장으로 구토한 것이다. 스킨십도 제대로 못 하는 남자라는 소문이 난 그는 학교에서 놀림거리가 된다.
앤드류의 불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과 절친한 사이가 된 맷과 스티브마저 불신한다. 두 사람 역시 자신이 초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친구가 될 리 없었으리라 의심하는 것이다.
그의 걱정은 반쯤 맞고 반쯤 틀리다. 두 사람은 앤드류가 초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그만큼 시간을 오래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친해질 계기가 없었을지 모른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두 사람은 앤드류와 함께 초능력을 쓰며 노는 동안 그의 인간적 매력을 발견한 것이지 오로지 초능력 때문에 의도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잦은 폭력을 행사하며 그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온 아버지가 “걔들은 네 진짜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로 결정타를 날린다. 앤드류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 말을 믿게 된다.
이후 앤드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정글 법칙의 신봉자가 된다. 완벽히 소외돼 있었던 자기 인생이 주목받게 된 원인이 오로지 초능력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초능력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의도치 않게 남을 크게 다치게 하는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이를 제치고 생존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강자가 약자를 다치게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건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긴다.
과거에 그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약육강식 논리의 피해자였다. 이제 정글의 법칙이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이 없으니 자기 인생의 진리로 적극 체화한다. 그는 자신을 괴롭힌 아버지와 학우에게 고통을 주거나 동네 건달의 돈을 뺏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은 주유소 사장에게도 강도질한다. 초능력을 이용해 악한 사람을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제압할 뿐이다.
영화는 권력의 아이러니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앤드류가 힘이 세질수록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더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묘사한 부분이 그렇다. 지역사회를 초토화하던 앤드류는 자신의 권력 남용을 막는 사람들에게 “날 무시하지 말라”며 폭력을 행사한다. 자신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니 강자에 걸맞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다. “먹이사슬은 내가 지배한다”고 외치는 그는 자신에게 이견을 내는 것을 불손하다고 느낀다.
각종 갑질 사건에서 자주 나오는 “내가 누구인 줄 알고”라는 말과 그의 발언은 닮았다. 사람은 자기 권력으로 타인에게 얼마나 큰 불이익을 줄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때, 자신이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감사해하길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사자’로 인식하는 앤드류가 자신을 감히 만류하는 ‘사슴’들에게 불쾌감을 느끼듯 말이다.
맷은 존재 자체로 재난이 돼버린 앤드류를 죽이고 먼 곳으로 떠난다. 앤드류가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라 악해진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보다는 약하지만 맷 역시 초능력자다. 자신도 공동체에 남아 있으면 언제든 앤드류처럼 악당이 될 수 있음을 알기에 그는 가능한 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한다. 거대 권력을 사회적으로 선하게 활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체하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권력이 커질수록 선해지기 어렵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도 접목해서 생각해 볼 만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민이 새로운 집권 세력의 권력 남용에 실망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특정 정치인의 선악을 탓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지금의 승자독식 정치 구조는 소수에게 힘을 과도하게 집중시키며 누가 집권해도 권력을 오남용하기 쉬운 상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건 히어로가 아니라 어떤 히어로도 힘을 독점할 수 없는 권력 분산과 통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