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네프레소 Feb 24. 2023

"찢어지게 가난한데 아들이 예체능 하겠다네요"

영화 '빌리 엘리어트' 리뷰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성경에선 천국을 보화가 감춰진 밭으로 비유한다. 어느 날 밭에 보석이 묻혀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가산(家産)을 전부 팔아 그 땅을 산다. 토지 밑에 대대로 물려주고도 남을 만큼 많은 재물이 숨겨져 있단 사실을 홀로 알게 되면 누구라도 전 재산을 걸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밭에 감춰진 보석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감식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인생을 건 베팅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발레를 비롯한 몇몇 예체능 교육은 원래 부유했던 집도 가난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이 든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빌리 엘리어트’(2000)는 ‘보화가 묻힌 밭의 비유’처럼 읽히는 영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광부가 어느 날 아들이 발레에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된다. 탄광 파업 중이라 그 어느 때보다 가정의 경제적 상황이 불안정한 시기에 아들이 무용수가 되겠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고민이 커진다. ‘각 티슈 뽑아 쓰듯 돈 쓸 능력이 없다면 시키지 말라’는 예체능 전공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히는 발레를 아들에게 시키는 순간, 두루마리 휴지 한 칸도 쪼개 써야 할 형편인 그의 집이 더욱 곤궁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배경은 영국에서 광부 대파업이 일어난 1980년대다. 빌리가 등지고 서 있는 포스터엔 파업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광부로 근근이 살아가는데 … 철없는 아들이 발레 배우겠다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영국에서 광부 대파업이 일어난 1980년대 중반이다. 대처 정부가 20개 탄광을 폐쇄하고 인력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전국 광부 노동조합이 총파업으로 맞선다. 빌리(제이미 벨)의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게리 루이스)는 동료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운 남자로 투쟁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파업 전선에서 늘 앞장서는 그는 연대를 포기하고 현장으로 돌아가는 동료에겐 ‘배신자’라는 비난을 쏟아낸다.

빌리의 아버지는 쪼들리는 형편에도 아들에게 복싱을 가르쳤다. 강인한 남자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리는 복싱에 영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세상이 얼마나 거친지 알기 때문에 그는 쪼들리는 형편에도 빌리에게 복싱을 가르친다. 그러나 복싱엔 별 관심이 없는 빌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같은 체육관 한쪽 구석에서 진행되는 발레 수업이다. 아빠가 복싱을 배우라고 준 돈을 몰래 발레 교사에게 주며 그는 수업의 유일한 남자 수강생이 된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빌리의 끼는 독보적으로 빛나고, 먼발치에서 수업을 곁눈질하던 그는 교습의 중심에 선다.

빌리는 체육관 구석에서 발레를 배운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빌리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못마땅하다. 평생을 광부로 살아온 그에게 발레는 남자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빌리는 “발레 무용수는 운동선수만큼 단단하다. 웨인 슬립(영국의 유명 무용수)도 단단하다”고 반박하지만, 아빠는 “매를 번다”는 한 마디로 묵살한다. 그러나 빌리가 로열 발레 학교에 들어갈 만큼 특출나다고 생각하는 발레 선생은 그에게 기꺼이 무상으로 일대일 수업을 제공한다. 출구가 하나씩 봉쇄되는 탄광촌의 상황과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빌리의 의지가 부딪히며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춤을 배우고 돌아가는 빌리의 몸짓에 희열이 넘친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아빠는 비통에 빠졌다


죽은 엄마의 피아노를 때려 부숴 난롯불을 피웠던 쓸쓸한 크리스마스날. 동료들과 거나하게 술을 걸친 빌리의 아빠는 체육관에서 춤을 추는 빌리를 발견하고 잔소리를 하러 들어간다. 빌리는 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동안 갈고닦은 춤을 뽐내고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슬픈 표정이 돼 도망치듯 체육관을 빠져나간다. 다짜고짜 발레 선생의 집으로 들어간 아빠는 인사도 생략한 채 물어본다. “얼마나 들어요?”

자신을 혼내려는 아빠의 앞에서 빌리는 아무 말 없이 춤을 춘다. 아버지는 아들의 압도적 재능을 눈앞에서 보고 슬픔에 빠진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아빠는 아들의 압도적 재능을 눈앞에서 보고 비통(悲痛)에 빠진다. 세상엔 자식의 부족함을 보며 느끼는 안쓰러움도 있지만, 자식이 너무 뛰어난 것을 보며 느끼는 안타까움도 있는 것이다. 아들의 뛰어난 재능을 살려줄 능력과 자신이 없기에 아빠는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 미안한 마음을 들켜선 안 되기에 등을 돌린 채 달린다. 출근하는 동료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던 아빠는 이제 파업 동지들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일터로 돌아간다.  

일터로 향하는 동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던 아버지는 노조 조합원들에게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현장으로 돌아간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삶의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를 발견하면 … 다른 모든 것보다 위에 둬야 한다


앞서 인용한 보화가 숨겨진 밭 비유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이도 마음에 새길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를 발견하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순위에 둠이 마땅하다는 이야기다. 빌리의 아빠는 아들에게 반짝이는 보화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이토록 가난한 집에 왜 이렇게 재능 있는 아이가 태어나서”라며 운명을 원망하는 대신, 밭에서 보화를 캐내는 데 인생을 걸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은 미추를 논할 여유조차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반짝이는 재능을 가진 빌리만큼은 오직 아름다움을 위해 도약하게 해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아내와의 기억이 담긴 예물도, 신의 있는 모습으로 동료들에게 쌓은 평판도 그 목표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빌리의 재능이 꽃필 수 있도록 이웃들이 십시일반으로 지원한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빌리는 런던에서 무용수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영화에선 그가 그렇게 부를 일궈 가족이 투자한 것 이상으로 돌려줬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담기지 않는다. 영화는 매튜 본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로 분한 빌리가 힘차게 비상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아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구질구질한 땅의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고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아빠의 모든 투자는 그 비상 한 번으로 모두 회수되고도 남는다. 그것이 바로 빌리 아빠에겐 인생 전부를 걸어서라도 보고 싶은 천국이었던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 포스터.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평가 및 OTT 정보는 2023년 2월 24일 기준.


매거진의 이전글 '내일이 없는 듯' 사는 삶의 맹점 .. '언컷 젬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