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컷 젬스' 리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이라는 주제는 동기 부여를 목적으로 삼는 책과 강연에서 인기 있게 반복돼 왔다. ‘만약 오늘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저자와 강사의 질문은 ‘당신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에 전부를 걸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특정 영역에 국한되는 메시지가 아니다. 커리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라는 독려, 사랑하는 사람과 지금 당장 시간을 보내라는 권고 등 화자가 강조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든 입맛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
‘언컷 젬스’(Uncut Gems·2019)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라’는 말을 체화한 듯한 주인공 하워드 래트너(아담 샌들러)의 이야기다. 하워드는 ‘지금 이 순간’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자신이 꽂힌 대상에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그가 뛰어드는 도박은 단 한 번의 어긋남으로도 가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만큼 파괴적이지만, 성공하면 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줄 것이다.
스토리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48세 보석상인 하워드는 빚쟁이에게 쫓기고 있다. 채권자는 그의 동서다. 하워드에게 총 10만달러(1억3055만원)를 받아야 하는데, 폭력배까지 쓸 정도로 그에게 분노해 있는 상태다. 하워드는 공공장소에서 뺨을 맞고 옷이 벗겨지는 등 온갖 수치를 당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동서가 그를 죽일 듯 달려든다는 데에서 하워드의 평소 행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다다라 있는 하워드에겐 믿는 구석이 하나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세공되지 않은 보석을 사들인 것이다. 그는 이 보석이 100만달러(13억원)를 안겨주리라 기대한다. 빚더미에서 벗어나고 부의 수준도 한 계단 올려줄 동아줄이다.
그러나 그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꼬여간다. 때마침 가게를 찾은 NBA 스타 케빈 가넷이 원석의 영롱함에 혼이 팔려 하루만 빌려 달라고 부탁하면서다. 가넷은 원석을 갖고 경기장에 들어간 날 기록적인 성적으로 팀을 승리로 이끈 뒤 하워드의 연락을 피한다. 원석의 신묘한 힘이 본인이 선전한 이유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원석을 경매에 올려야 하는 상황인 하워드는 궁지에 몰려 버린다.
이 영화는 절정에 절정으로 치닫는 전개로 관객을 숨 막히게 만든다. 세상에는 너무 느슨하게 풀어져서 관객을 졸리게 하는 영화도 있지만, 한편으론 ‘언컷 젬스’처럼 주인공을 계속 코너로 몰아붙이며 보는 이를 지쳐 떨어지게 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영화의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진맥진하게 하는 플롯을 좋아해서, 또는 이미 시작했으니 끝까지 보자는 심정으로 영화를 다 본 관객은 하워드의 불행한 운명에 대해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를 자꾸 벼랑 끝으로 모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란 것이다. 하워드는 조금이라도 손에 잡히는 게 생기면 이를 어떻게든 2배, 3배로 불릴 생각밖에 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 의사 결정에는 조금의 고민도 없다. 돈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 곧장 그것을 도박판에 심어 키워 보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이를테면 가넷에게 원석을 빌려준 하워드의 결정부터 일반적이지 않다. 하워드는 이 원석이 자기 인생을 바꿔줄 만한 큰 기회라고 여기는데, 그런 물건을 작은 담보물 하나 받고 빌려준 것이다. 간을 배밖에 내놓고 다니는 하워드가 단지 거구의 스타를 무서워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그는 보석을 빌려줌으로써 가넷의 물욕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천문학적 재산을 지닌 슈퍼스타를 단골로 만들 계산을 본능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역시 일종의 도박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망쳐가는 하워드에게 구원의 손길이 하나둘 내밀어진다. 먼저, 내연녀와의 관계 때문에 완전히 파탄 났던 가정생활에서 그는 아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부여받는다. 가넷은 하워드에게 원석을 되돌려줌으로써 경매에 내놓을 수 있게 해 주고, 자신도 해당 입찰에 참여한다. 그는 하워드가 이 경매에서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 들었다는 걸 알아챘음에도 16만5000달러(2억1540만원)에 원석을 사준다.
애초 하워드가 원석에 100만달러 가치가 있다고 떠들고 다녔던 것도 블러핑(bluffing)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 간 매매가 종료된 뒤 원가를 물어본 가넷에게 10만달러였다고 답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자신이 사 온 가격 그대로 말하면 가넷이 ‘바가지 썼다’고 생각할 것이고, 너무 높여서 얘기하면 ‘말이 안 된다’고 불신할 것이니 적당한 선에서 임기응변으로 대답한 것이다. 이제 그는 16만여달러가 생겼고, 채무를 변제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돈이 손에 들어오면 그걸 들고 도박판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불나방일 뿐이다. 그날 밤 케빈 가넷이 경기에서 최고의 기록을 세울 것에 전부를 걸고야 만다. 하워드는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치는 채권자와 폭력배들을 가게에 가둬버린다. 함께 경기를 관람하며 자신의 베팅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게임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하워드가 판돈을 건 방향으로 풀리며 그는 122만달러(16억원)의 주인공이 된다. 그렇게 승리감에 젖어 의기양양하게 채권자를 풀어준 순간, 폭력배가 그의 머리에 총을 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는 아담 샌들러의 원맨쇼다. 남을 정신없이 웃기는 코미디와 진지한 연기를 두루 소화해 온 그답게 우스꽝스럽지만 심각한 주인공의 상황을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연출을 맡은 조시 사프디, 베니 사프디 형제는 극을 현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썼다. 이를테면, 농구선수 케빈 가넷과 가수 위켄드를 본인 역할로 출연시키며 현실과 극을 섞는 것이다. 영화에는 감독의 자전적 요소도 포함돼 있다. 두 형제 감독의 아버지는 보석상이었으며, 어머니와는 이혼했다고 한다.
서두에 언급한 삶의 태도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 보자. 하워드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을 넘어 ‘지금 이 찰나가 마지막인 것처럼’ 사는 사람이다. 현재만을 사는 자세가 어떤 맹점을 갖는지 보여주기에 적합한 인간형이다. 대다수 인간은 매일매일이 인생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 수가 없다. 오늘이 삶의 끝이라는 것을 안다면 대부분은 가족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거나, 가장 충족시키고 싶었던 욕망을 채우는 등의 일상과 동떨어진 일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로 하루하루가 채워진다면 우리는 평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아마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과 ‘만약 영생할 수 있다면’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본인의 위험 선호 성향에 따라 좀 더 왼쪽에 있을지 오른쪽에 있을지가 달라질 뿐이다.
이런 보통의 사람들 속에 섞여 사는 하워드는 존재 그 자체로 민폐다. 적절한 수준에서 자신을 통제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워드처럼 욕망을 초 단위로 극대화하는 인간과 엉키면 삶의 리듬이 깨져 버린다. 케빈 가넷은 “당신을 만난 뒤로 전부 뒤죽박죽이 됐다. 감정이 미쳐 날뛴다”고 토로한다. 아마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이 그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였을 것이다.
16억원을 손에 쥐었다고 한들 그는 다시 더 큰 판을 찾아가 자신과 주변 사람의 인생을 베팅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폭력배가 하워드에게 쏜 총알은 그의 주변인 모두를 구원하는 한 방임과 동시에 하워드 자신을 구원하는 한 방이기도 하다. 매 순간 모든 욕망이 번갈아 지나치던 그의 얼굴은 최고의 순간에 웃는 표정으로 박제된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던 그에게 실제로 내일을 빼앗아 버림으로써 비로소 하워드가 견지해 온 삶의 태도가 완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