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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프레소 Aug 12. 2023

보육원 개원식에서, 원장의 아들이 사라졌다

영화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리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몇몇 소설은 주인공과 독자의 마음을 함께 무너뜨리는데,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그렇다. 죄의식에 관한 단편들을 수록한 이 책은 등장인물이 결코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자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자기 인생의 어두운 측면을 밝히는 방식으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읽는 과정 자체가 꽤나 괴롭다고 할 만한 이런 책에 독자가 빠져드는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에게조차 숨기려 했던 삶의 이면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나마 나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다는 건 소설의 순기능 중 하나다. 

주인공 로라는 아동 보호소 개소식에서 자기 아이(사진)를 잃는 아픔을 겪는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죄의식에 관한 소설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오늘 소개할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2007)이 바로 이런 종류의 영화여서다. 주인공 로라(벨렌 루에다)는 자신이 입양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육원 자리로 이사한다. 그곳에 장애 아동 보호소를 열기 위해서다. 그러나 약한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었던 로라에게 운명은 장난을 친다. 보호소 개소 축하 파티를 연 날, 자기 자식이 실종된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찾는 데 삶을 오롯이 바치게 된다.  

죄의식에 관한 단편들이 수록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사진 제공=문학동네

난치병 아이 정성껏 돌봤는데, 아동 보호소 개소식에서 실종됐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로라는 아들 시몬(로저 프린셉), 의사 남편 카를로스(페르난도 카요)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뤄 살아가고 있다. 시몬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시몬은 부부가 입양한 아이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안고 태어난 시몬을 부부는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성심성의껏 돌봤다. 부부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아이는 구김살 없이 밝은 아이로 자라났다.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데려갔다. 아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 건 아동 보호소 개소식이 있던 단 하루뿐이었고, 그날 아이가 없어졌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장애 아동 보호소를 열기 위한 집으로 이사한 뒤부터 아이는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옆에 있던 당시에는 상상 속 친구려니 하며 가볍게 넘어갔으나, 실종된 후부터는 이야기의 디테일 하나하나가 신경 쓰인다. 특히, 경찰 조사 결과 복면을 쓴 토마스라는 아이가 실제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녀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반성하게 된다. 토마스는 어린 시절 로라가 지내던 보육원에 함께 있던 아이였다. 안면 기형 때문에 복면을 쓰고 다니던 그 아이는 동굴에서 실종된 후 시체로 발견됐다.  

아이가 이야기한 토마스를 로라도 실제로 본다. 하지만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 토마스를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며 그녀가 헛것을 본 것처럼 된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먼저 ‘선택’된 로라는, 보육원 친구들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로라가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던 토마스는, 사실 그녀 무의식에 아련한 죄책감을 남겼는지 모른다. 그녀가 보육원 친구들보다 먼저 ‘선택’돼 양부모네 집으로 간 동안, 토마스라는 친구는 보육원에서조차 제대로 보호받지 못해 사망한 것이다. 아마 그녀가 장애 아동 보호소를 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일련의 사건이 만든 죄의식 때문일 수 있다. 장애가 있는 아동을 환영하는 시설을 엶으로써 적어도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아동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경험을 하게끔 하려 한다.  

로라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했던 술래잡기 놀이를 하면서 친구들의 영혼과 소통하려 한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일생일대 과업 수행하느라, 아이 목소리에 소홀했네


로라는 보호소 개소를 준비하던 도중 아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소홀해진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부모 역시 자기 인생이 있는 만큼 아이의 상상 속 친구 이야기를 종일 듣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로라가 간과한 것은 아들이 지나고 있던 시기는 어쩌면 그에겐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단 사실이다. 아들은 어느 경로에서인지 자신이 입양됐다는 것과 HIV를 타고났다는 비밀을 알게 됐다. 아이의 다른 시간보다 조금 더 비중 있게 다뤄졌어야 할 그 시기에, 엄마는 자기 일생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아이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는 아이러니에서 모든 비극이 싹튼 것이다.

그녀는 집에 심령술사들을 불러들이고, 남편은 그것을 비이성적인 일이라고 비판한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그녀는 실종된 아들을 찾으러 다니는 동안 인생의 몇 가지 감춰진 진실을 발견한다. 자신이 떠난 뒤 보육원 친구들은 학대당하다가 사망했으며, 그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아들의 실종에 관한 진실이다. 옛 친구들의 영혼이 안내해 주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녀는 아이가 창고 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보호소 개소식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짐을 아무렇게나 치우던 도중, 철 기둥이 지하 창고로 통하는 문 앞을 가로막았고, 그곳을 비밀 아지트 삼아 놀던 아이는 올라오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사실 자기 실수임을 인정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가장 어두운 곳을 들여다봤을 때 전해지는 위로


물론 이 영화는 다소 가혹한 측면이 있다. 과연 그녀가 아이에게 잠깐 소홀했던 것은 이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할 만큼 심각한 죄였을까. 그녀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장애 아동 보호소를 열고, 단 하루 개소 파티에 집중했던 것이 아이를 잃어야 할 만큼 끔찍한 아동 방치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육아와 사회생활의 병행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녀 앞에 나타난 토마스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하다. /이미지 제공=팝엔터테인먼트

다만, 아이에게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특정한 시기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보호자가 친부모가 아님을 부모 외의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 아이는 평소보다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난치병이 있어 평생 다스리며 살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된 아이도 더욱 다정한 스킨십이 필요하다. 그것이 상상 친구나 망상에 불과하더라도 로라는 조금 더 아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주인공이 고통의 원인을 찾아가던 도중 자신의 책임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여러 작품과도 닮았다. 사진은 ‘달콤한 인생’의 한 장면. /사진 제공=CJ ENM

이 작품은 관객에게 공포는 물론 비애감을 맛보게 한다. 내가 겪는 인생의 많은 고통이 스스로의 잘못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일은 때론 무섭기도 하고, 슬플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삶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 뒤 평온함을 느낀다. 그건 두려움을 극복하고 실상을 직시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위안이다. 창문 너머로 비어져 나와 그녀를 감싸는 등대 불빛처럼, 우리가 가장 어두운 곳을 기꺼이 들여다봤을 때 어떤 위로의 손길이 나와 비로소 우리를 보듬을지 모른다.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포스터. /사진 제공=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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