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읽는 고양이>

by 이지은

“네가 알아서 해.”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파운데이션 뭉침 하나 없이 말끔한 피부와 발렌티노 뮬에 태블릿을 제 몸처럼 들고 다니는 전문직으로 보이는 여성. 이런 여자라면 남의 조언 따윈 필요 없이 모든 걸 척척 혼자 알아서 해낼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런 선입견을 유지하기엔 우린 꽤 만난 사이인데. 물론 그가 솔로몬의 해답을 줄 거라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이런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알아서 다 해 줄게.”

이 말을 언젠가 그의 입에서 들은 것도 같은데. 나는 어느 토요일 저녁 7시 반, 500광년 먼 우주에서 지구라는 외딴 별에, 그것도 정이 넘치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로 분주한 대형마트에, 난데없이 뚝 떨어진 미아 같다.

‘네가 알아서 해’란 말은 생각보다 상당한 괴력을 가진 말이라 그와 나의 50cm 거리 안엔 이미 거대한 만리장성이 쌓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벅저벅 스테이크 코너로 걸어가 혼자 결정한 저녁 메뉴거리를 고르는 그의 뒤통수를 후려 치고 싶다.


“스테이크에 어울리는 와인은… 고르셨나옹?”

과도한 스트레스가 환청을 불러왔나? 사방을 둘러봐도 친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거는 남자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지은, 정신 좀 차리자.


“말하는 고양이가 장화 신은 고양이만큼 흔하지는 않지옹.”

확장된 내 동공 앞에 보이는 건 대체 뭐지? 모포에 쌓인 아기 마냥 유모차 안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치즈 빛 고양이, 다시 눈을 비비고 봐도 영락없는 고양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나를 그 녀석은 딱하다는 듯 쳐다본다.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에서라면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텐데옹. 그렇게 토끼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면 아무리 시선에 익숙한 미묘라도 좀 민망하다옹.”

“아, 미안. 근데 이런 일은 난생 첨이라…”

“나도 웬만해선 인간에게 말을 거는 골치 아픈 행동은 안 하는데… 집사도 쇼핑에 정신 팔려 나를 잠깐 잊은 듯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에 벙쪄 있는 당신이 딱하기도 하공.”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내가 아무리 냉정한 애인에게 거지 같은 말을 들었기로 한낱 고양이에게 딱한 취급을 받다니.


“내 걱정 따윈 그만하고 너의 집사나 찾아보는 건 어때? 너를 아예 잊어버린 것 같은데.”

녀석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심드렁하게 앞발을 몇 번 핥는다.

“내 집사가 나를 잊었는지 당신 애인이 당신을 잊었는지, A+한우 스테이크를 걸고 내기해도 좋다옹.”

빠직!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왜 이따위 고양이와 실랑이를 하고 있담.

“워워~ 진정하라옹. 난 싸움을 걸려던 게 아니라 단지 맛있는 스테이크감에 어울리는 와인을 권해주려 한 것뿐이라옹. 알다시피 고양이는 신선한 고기감을 고르는 데 일가견이 있다옹. 게다가 나란 고양이는 술을 좋아하는 하루키의 마니아로서 좋은 와인을 고르는 안목도 인간 못지 않다옹.”


하.루.키.를 읽는 고양이라니! 기막힌 이 상황에도 나의 망할 호기심은 이 녀석이 골라주는 와인은 어떤 맛일까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와인을 권해줄 건데?”

고양이는 느긋하게 눈을 끔뻑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가보셨나옹? 하루키의 ‘먼 북소리’란 책엔 토스카나 키안티 지방에서 맛있는 적포도주를 고르는 얘기가 나온다옹. 맛있는 와인이란 말하자면 이런 거라옹. 한 모금 입에 물고 좀 떫은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향긋한 맛이 배어 나오는, 그렇지만 부드럽다기보단 강렬한 느낌의 독한 맛이 나는. 마치 부다페스트 현악 4중 주단이 연주하는 콰르테토 같다고나 할까옹. 그런 레드 와인이 오늘 같이 누군가를 단칼에 정리해야 하는 저녁엔 어울린다옹.”

“이탈리아 키안티 지방의 레드 와인이란 말이지?”

저 앞에서 고양이 주인인 듯 보이는 여자가 ‘뮤즈’라는 이름을 부르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나 더! 사족 같겠지만, 좋은 와인엔 어울리는 스테이크감도 중요하다는 걸 잊지마세옹. 내 생각엔… ‘네가 알아서 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고깃덩이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만…”


유모차 앞에 도착한 집사는 소중한 아기를 달래 듯 고양이에게 우쭈쭈를 한다. 고양이는 사람의 말이란 ‘ㄱ’ 자 하나 모르는 것처럼 사랑스러운 소리로 ‘야옹’ 거린다. 집사는 나에게 둘만의 비밀을 나눈 사람처럼 눈인사를 하고 와인코너를 빠져나갔다. 집사는 고양이를 잊지 않았고, 내기는 하지 않았지만… 고양이가 나를 이겼다. 분명 애인은 이 얘기를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쯤으로 흘려듣겠지만. 주방 어딘 가에 오늘 밤 스테이크를 썰 만한 날이 잘 선 칼이 있겠지.




*문학동네와 yes24 주관 '하루키에세이쓰기대회 1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