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영화 현장
다시 2017년. 고시원의 안락함을 느끼며 이제 모든 게 괜찮겠지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촬영이 가까워오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이 개판이라는 걸.
보통의 상업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모든 일이 분업화되어 있다. 소품팀, 미술팀, 의상팀, 분장팀, 촬영팀, 조명팀, 녹음팀, 연출팀, 제작팀 등. 하지만 작은 제작비로 운영되는 독립영화에서는 각 팀의 경계가 흐릿하다. 때로는 연출팀이 소품도 준비하고 의상도 준비한다. 소수정예 외인구단 같은 방식이기에 개개인의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숙련된 사람들이 원팀이 되어 움직여야 무사히 제작을 마칠 수 있다. 그런데 숙련된 사람들을 구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숙련된 사람들의 페이가 저렴하겠는가? 일 잘하는 사람과 친분이 있거나, 대본이 어마어마하게 재밌어서 모두가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일잘러들이 독립영화의 오는 경우는 드물다.
나의 첫 영화 현장도 그랬다. 인원 구성은 연출팀 3명(나를 포함해서), 제작팀 2명(촬영 직전 제작실장 한 명 합류), 촬영팀과 조명팀(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두 팀 합쳐서 6~7명은 되었던 것 같다), 녹음기사님 1명, 분장실장님 1명. 보다시피 소품팀과 의상팀이 없으니 연출팀이 소품과 의상을 준비해야 했다. 인원은 적고 준비할 건 많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촬영 전 두 달이라는 준비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하면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팀엔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경험의 부재였다.
조감독님은 장편영화 조감독을 해본 경험이 없었고, 연출팀 누나는 연출팀을 해본 적이 없었고, PD님은 이전에 조감독을 해봤지만 PD는 처음이었다. 이제 갓 군대를 제대한 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상황이다 보니 모두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촬영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준비된 소품이 없었다. 당연하다. 아무도 준비를 안 하니까. 이래도 되는 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감독님께 소품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냐 물으면 지금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럼 대체 언제 하는 건가? 궁금했지만 나보다 경험이 많을 테니 생각이 있겠지 싶었다. 그러다 촬영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부랴부랴 소품 준비를 시작했다. 벼락치기로 준비를 하니 당연히 정신이 없었고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나와 연출팀 누나는 로케이션 헌팅까지 했다. 그땐 몰랐다. 로케이션 헌팅은 보통 제작팀이 한다는 걸. 연출, 제작팀 중에서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나와 연출팀 누나는 따릉이(서울시 공공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으로 촬영장소를 물색했다. 이것만 해도 힘든데 무려 촬영 장소를 공짜로 빌려야 했다. ‘I’m possible’이 점점 ‘Impossible’로 바뀌어갔다. 제작비가 부족하니 장소대여료로 낼 돈이 없는 거다. 결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하게 해달라고 굽신거려야 했다.
그렇게 내가 섭외한 술집에서 촬영을 진행하는데 사전에 협의한 것과 달리 사장님이 오만 원을 달라고 했다. 분명 장소대여료로 드릴 수 있는 돈이 없다고 말했는데 사장님은 내가 오만 원을 주겠다고 얘기했단다. 아마 사장님은 캠코더 하나 놓고 대여섯 명 모여서 촬영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촬영 장비도 많고 조명도 설치하고 붐마이크도 들고 있으니 돈을 안 받기 억울했던 거다. 결국 PD님이 사장님에게 오만 원을 줬다. 그리고 나는 감독님과 스탭들에게 눈총을 받았다. 나 때문에 오만 원이 지출되었으니까. 너무한 거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촬영장소를 오만 원에 빌렸다 해도 무척 저렴하게 빌린 거다. 근데 공짜로 빌리지 못했다고 주눅이 들어야 하나?
위에서 언급한 일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내 업무가 아니다. 나는 스크립터(스크립터라는 용어는 잘못된 표현이다. 과거 80~90년대 한국영화 크레딧에서 사용됐던 것처럼 ‘기록’이라고 표기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를 맡고 있었다. 스크립터란 대본을 체크하며 촬영한 내용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혹시 배우가 대사를 빼먹지 않는지, 이전 씬과 연결이 틀리지 않는지 체크하는 거다. 영화를 찍을 때는 스케줄에 따라 여러 장면을 뒤죽박죽 찍는다. 이야기 순서대로 1-2-3-4-5 찍는 게 아니라 3-5-2-4-1 이런 식으로 순서를 뒤집어서 찍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체크하지 않으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과 후에 배우가 입은 옷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촬영분량 중 어떤 클립이 OK이고 NG인지 기록해서 편집실에 전달하는 것 역시 스크립터의 일이다. 정리하자면 스크립터는 촬영이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촬영장과 편집실 사이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크립터는 촬영 전후로 할 일이 많다. 촬영 전엔 내일 찍을 분량 중 신경 써야 할 게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며, 촬영 후엔 촬영 내용을 기입한 문서를 보기 좋게 정리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겐 이런 일을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촬영 전엔 소품을 준비해야 했고, 현장에선 문서를 작성할 시간도 없이 소품 세팅을 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이렇다 보니 급하게 문서를 작성해야 했고 글씨는 괴발개발이었다. 촬영 후엔 또 소품 준비를 했으니 문서를 정리하고 나면 눈 붙일 시간이 없었다. 잠이 너무 부족해서 가끔 촬영 중에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던 촬영이 결국엔 끝이 났다. 제대를 하던 그날처럼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촬영이 끝난 기념으로 조촐하게 스탭들과 회식을 했다. 회식할 돈은 있고 장소대여료로 줄 오만 원은 없었던 걸까? 의문이 생겼지만 잠자코 고기나 먹었다. 그리고 노래방에 갔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냥 구석에 박혀 있으려고 했는데 다른 스탭들이 나를 앞으로 끌고 갔다. 막내 노래나 들어보자는 거다. 순간 화가 났다. 언제 날 막내라고 챙겨준 적은 있었나? 잘 모르는 게 있다고 알려준 적은? 당신들 때문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내가 왜 당신들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 하는 거지? 테이블에 마이크를 내려놓고 노래방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촬영 현장에서 일하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