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콘텐츠 해비 유저에게 '안소라 컵'이란?
갑작스럽게 인생 첫 번째 뉴욕 여행을 결심했다. 정말 느닷 없이 벌인 일이었다. 모든 기회와 타이밍이 척척 맞아떨어져서 가능했던 일. 워낙 고물가로 유명한 뉴욕인 데다가, 고환율 상황까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건만, 내가 기를 쓰고 뉴욕으로 가게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필이면 약 2주간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시간이 났다. 둘째, 놀랍게도 마일리지 티켓이 남아 있었다.(필요할 때마다 매번 없었으면서!) 셋째, 마침 뉴욕에 나를 재워 줄 수 있는 친구가 셋이나 있었다. 상대적으로 이보다 더 여행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뉴욕 여행은 아마 인생 내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뉴욕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부터 정확히 4일 후,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게 됐다. 뉴욕 시내를 거닐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나 벼르고 벼르던 뉴욕 여행을 이렇게 얼레벌레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루게 될 줄이야!
나에겐 뉴욕에서 보고 싶었던 아이코닉한 장면들이 몇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기가 막힌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나 화려한 야경 같은 게 아니라 아주 소소하고, 어떻게 보면 살짝 이상한(?)것들이다. 이건 아마 어릴 때부터 줄곧 봐 오던 미국 시리즈물이나 미국 영화를 통해 각인된 장면들 탓일 거다. 모든 순간을 나열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이를테면 <브루클린 나인나인>처럼 NYPD가 범인과 대치하는 장면이랄지(놀랍게도 실제 경찰이 어떤 이에게 수갑을 채우는 찰나를 목격했다는 사실), <섹스앤더시티> 시리즈처럼 브라운스톤 건물의 계단 난간에 기대서서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 그리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뉴욕 고유의 테이크아웃 컵, ‘안소라 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바삐 오가는 뉴요커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그려왔던 대부분의 장면을 보게 되었지만, 단 하나 안소라 컵을 든 뉴요커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 검색을 해보니 그 흔하디 흔하던 안소라 컵을 사용하는 곳이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안소라 컵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이들을 위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종이컵은 한때 뉴욕 커피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푸른색 바탕에 이국적인 문양과 더불어 독특한 폰트로 ‘WE ARE HAPPY TO SERVE YOU’라는 문장이 적혀 있는 것이 특징인 테이크아웃, 현지식으로 하자면 투고(To-Go)용 종이컵. 이 종이컵의 역사는 오래전 그리스 이민자들이 뉴욕에 도착하며 그들이 가져 온 커피 문화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민자들로 인해 도시 곳곳에 그리스 식당과 이동식 상점들이 생겨났고, 1963년에 셰리 컵 컴퍼니(Sherri Cup Company)라는 곳에서 늘어난 그리스 상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스타일의 종이컵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컵 디자인에는 그리스 국기의 파란색과 흰 색을 포함한 그리스식 문양과 글자 스타일을 반영했고,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하던 암포라(Amphora) 항아리 그림까지 함께 담기게 되었다. 이 '암포라'라는 단어를 잘못 발음하며 '안소라(Anthora)'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다소 엉뚱한 사연까지, 사소한 디테일을 사랑하는 나에겐 가히 완벽한 서사라 할 수 있겠다.
우연을 빌려서는 도통 찾을수가 없으니 오기가 발동하여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끝에 안소라 컵을 사용한다는 카페 하나를 발견해 내 찾아갔다. 그리고 당당하게 라테 한 잔을 ‘투 고(To Go)’로 주문 하니 바리스타가 안소라 컵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한 번 커피가 담기면 카페 안에서는 마실 수가 없는데, 정말 괜찮으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그 컵이 바로 내가 지금 라테를 주문 하는 이유라고 답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다면 이해가 되네!’라는 말과 함께 거품 쫀쫀한 라테를 완성해 건네주었다. 그렇게나 고대하던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니 괜히 더 맛있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커피 컵을 들고 이스트 빌리지 거리를 걸으며 모든 감각으로 커피를, 뉴욕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컵이, 그리고 이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신다는 건 내겐 그런 의미였다. 오죽하면 다 마신 커피 컵을 쓰레기 통에 버리기가 아쉬울 지경이었을까.
안소라 컵에 대한 나의 집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컵의 디자인을 고스란히 세라믹 버전으로 완성한 제품을 만날 수 있는 ‘모마(MoMA) 스토어’에도 들렀다. 물론, 모마 스토어의 많은 상품은 한국에서도 해외 직구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컵도 마찬가지. 하지만 나는 꼭 뉴욕 모마 스토어에 진열된 컵을 사고 싶었다. 정말 이상한 고집이지만 내 마음이 그랬다. 그래야만 의미가 있었다. 상자 째로 옷에 둘둘만 후 캐리어에 고이 품어 집 까지 무사히 데려온 나의 안소라 컵. 아까워서 커피를 담아 마실 수나 있을까 싶다.
PS. 롱아일랜드 시티 어딘가를 걷다가 발에 밟혀 납작해진 안소라 컵을 우연히 마주쳤다. 오리지널 버전과는 조금 다르긴 한데, 여하튼 발자국이 남은 길가의 안소라 컵 역시 내가 생각하던 '어센틱 뉴욕 장면' 중 하나이기에 사진으로나마 남겼다. 뉴욕에서 만난 디자이너인 친구는 내게 말했다. "에디터들은 참 이상한 거에 꽂히곤 해, 남들이 좋다는 거 말고 다른 걸 보고 그렇게 좋아해. 신기하단 말이지." 나도 가끔은 이런 내 집착을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