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평소와 같이 점심시간에 책 한 권을 넣은 토트백을 들고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 나의 첫 사수이자 주재를 나갔다가 얼마 전 본사로 다시 돌아온 선배가 보여 인사를 드렸는데,
점심 뭐 먹냐고 물으셔서 그냥 혼자 샌드위치나 먹고 책이나 읽으려고 했다고 하니까
오 혼자가? 그럼 나도 껴도 되냐? 해서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렇다. 혼자 점심 먹으러 나왔다가 누가 곰탕 먹는다고 하면 책과 샐러드를 던져놓고 곰탕파티에 합류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혼자 착석했는데 옆 테이블에서 혼자 온 동료를 만나 뜬금없이 같이 먹게 되기도 한다.)
아무튼 보통 구내식당을 가신다는데 처음 와보시는 샌드위치집에서 샌드위치를 씹으며 물으신다
"지금은 멘탈 좀 강해졌어? 너 그때 왜 울었더라?"
"아 멘탈 대박이죠"
주재 나가시기 전에도 물어보시더니 까먹으셨는지 아니면
그때 부들부들 떨며 울던 내가 인상에 깊었는지 또 물으신다;;
때는 6년 전.
그때는 고정좌석제였기 때문에 팀장석이 창가에 있었고
그 앞에 팀원들이 쪼르르르 다 앉아있었는데
참 센스도 없지
인사평가 시즌 때 내가 작성한 보고서에 대한 피드백을 줄 겸
면담 아닌 면담이 시작되었다.
"너는 참 사원답지 않게 일도 잘하고 보고서도 잘 쓰는데
일을 시키기 쉬운 사람은 아니다.
사실 직장 생활하다 보면 사원은 사원답게,
대리는 대리답게, 과장은 과장답게 하는 게 제일 좋다.
예를 들면 ㅇㅇ이를 보면 걘 참 사원답고 편하게 대할 수 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버렸다.
회사에서 왜 우냐고 회사에서 울면 오줌 싸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그 말이 다 맞다고 쳐도 그땐 눈물이 주르륵 났으니까
그런 생각은 일단 속으로만 하시길 바란다.
아무래도 오픈된 공간에서 그랬으니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다 봐버렸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생각이 참 많았었다.
신입시절부터 팀 업무 자체가 불분명해서 겪었던 혼란스러움,
커리어에 대한 불안감, 예전부터 알았지만 조직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성격까지
모든 게 다 불안하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잘하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뭐가 문제인지,
그럼 난 다른 사람처럼 살 수 있는지
그런 혼란이 매일같이 있었고
그 와중에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고질병...)
신입들은 계속 들어오고, 그들은 너무 잘 적응하면서 주변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어색하고 불편할까 자책도 했다.
상사들이 가끔 입사한 지 2년도 더 지난 나에게 이젠 좀 적응했냐는 말을 하면
아 이게 남들 보기에도 티가 나는구나 싶어서 더 수치스러웠다.
오히려 그래서 더 일을 열심히 했고 좋은 고과를 받으며 위안을 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에 대한 건설적인 피드백도 아닌
노력해도 고쳐지지가 않는 성격에 대해
넌 좀 이럴 필요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으니
그동안 남들과 비교해 오며 삭혀왔던 열등감과 함께
모든 게 부정당하는 느낌이었고 너무 화가 났었다.
(사실 지금 보면 면담은 그런 얘기도 하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당시에는 그래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해봤자 그냥
"당신은 내가 마음에 안 드는구나"
그렇게 방어적으로 들렸다.
물론 그 팀장님은 좋은 뜻으로 한 말인 건 알겠다.
그리고 6년 동안 그가 전례 없던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을 보면
그래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짐작도 간다.
그 면담 이후로 나는 더 많은 고민에 빠졌고
아 어차피 내가 여기서 일을 잘해봤자 사원인데 얼마나 잘하겠냐며
내가 고칠 수 없는 것 때문에 이곳에서의 나에 대한 평가가
"적응 못하는 걔"로 끝난다면
부족한 붙임성은 성과로 만회 가능한 환경을 찾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었던 전략팀은 특성상 KPI라는 건 애매했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증명할 수 있는 정량적 지표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주니어에겐 특히 저 사람이 얼마나 조직에 잘 어울리는지,
즉 likeable 한 지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도 없지 않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조직을 옮기기로 마음먹었고 기준은 단순했다.
내가 직접 실무를 하면서 배우고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 (성과가 숫자로 나온다면 가산점)
구성원의 배경이 좀 더 다양한 조직
(다른 문화와 전문성을 쌓은 경력직, 또는 그 당시엔 희귀했던 여성 책임/리더가 있으면 가산점)
그렇게 그 면담이 있고 나서 머지않아 첫 팀을 떠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6년 전 이야기다.
아무튼 그때 그 말 듣고 나는 뭐 나름 열심히 사회생활 한다고 했는데
다른 애랑 비교하면서 성격 갖고 뭐라 하니까 화가 나서 울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드랍더비트
"아 근데 저 똑같은 소리 지난주 면담 때 또 들었어요 ^^"
선배가 박장대소하며
야 이거 무슨 팀장들 교육자료에 사례로 써도 되겠다
면담 다 소용없고 사람 안 바뀐다고라고 말하며 한참을 웃으셨다.
"그렇죠 아무래도 사람이 그래도 거의 삼십 년 가까이 살고 입사를 하는데
뭐 팀장이 몇 마디 한다고 사람이 바뀌나요 ^^"
지난주에는 내가 이 조직에 조인하고 거의 처음으로 리더와 면담을 했다.
진급평가 시즌이기도 하고 내가 대상자이기도 해서 뭐라도 준비해야만 할 것 같았지만
Overthinking 해서 내뱉는 말보다는 그냥 대가리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더 힘이 있다는 걸 믿는 나는
(사실 무언가를 준비하기 그냥 귀찮았을 수도...)
노트북을 가져갈까 아니면 노트와 펜을 가져갈까 정도의 고민만 하다가
2025년 11월이 되어서야 처음 펼쳐보는 사내 다이어리를 들고 면담에 들어갔다.
뭐 이런저런 사회 중년생에게 있을법한 고민들을 같이 나눠보기도 하고
보스의 날아다니던 시절의 썰도 듣다 보니 시간이 후딱 지나갔는데
절반쯤 지났으려나 고민하면서 보스가 말을 꺼낸다.
"내가 이런 말을 많은 사람들에게 하진 않지만
본인이 이제 앞으로 더 멀리 나가기 위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물론 지금 본인이 이걸 못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쿠션 감사합니다)
본인처럼 일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게 필요해서 말해주는 거야.
나도 그렇지만 본인 같은 사람은 윗사람이나 동료나 아랫사람이나
가만히 있어도 거리감을 느끼게 돼.
특히 못된 윗사람이라면 시기질투를 하면서 못살게 굴수도 있지.
그래서 사람들을 대할 때 좀 더 가벼워 보이고 허물이 없어 보일 필요가 있어.
이미 하고 있어도 남들은 80%만 해도 되는걸
본인 같은 스타일은 120%를 해야 남들이 다가설 수 있게 돼.
결국에는 그런 편안함이 일을 성공시키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나도 그래서 화가 나면 날수록 더 많이 웃어 ^^ "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신도 화나면 표정 안 좋으세요,,,)
이번엔 나는 울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미 오래전 그냥 그렇게 나를 받아들였다.
맞아 내가 좀 거시기해서 높게 멀리는 못갈인재긴 혀~
그냥 지금처럼 재밌어 보이는 일 찾아서 하면 그럼 됐지 뭐 ㅎ
이런 생각이다.
놀랍게도 중간에 시계를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고 나왔을 땐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듣다 보니 본인도 대충 사회생활 힘들고 어렵다는 얘길 많이 하신 것 같아서
"하 그냥 머리 깎고 절 들어가고 싶네요"
"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라는
이상한, 뇌를 거치지 않은 대화로 면담이 끝났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음에 없던 말은 하지도 못하고
그런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도 않는 사람인 나이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싶다.
결국 나를 나인채로 지켜낸 덕분에
그간 내가 이 회사에서 재미도 찾고
할 수 있는 일도 찾으며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다닐 수 있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