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것과 잃은 것

모든 일에는 수명이 있다

by 이도시

일도 생명체라면 일은 언제 "죽은 일"이 될까?

실적이 나오지 않을 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을 때?


대기업에서의 일은 마치 별똥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빛나기를 멈추면 수명이 다 했다고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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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는 나는 다른 의미로 죽은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 내부 임직원을 위한 작은 프로덕트들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몇 년을 보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서비스의 오너를 자칭하며 여러 국가 롤아웃을 혼자 돌리던 시절.

그때 항상 마음속에 있던 건 하나였다.


언제쯤 큰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까...

오류가 나거나 실수를 하면 큰일이 나는,

피가 팔팔 도는 "살아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별 큰 일 없이 굴러가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순간 나의 존재 이유도 없어진 것만 같았다.



새 팀에 합류하던 날, 나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 팀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새로 만들어진 팀이었다.

수십 개 국가, 여러 브랜드, 하나의 앱. 회사 역사상 처음 시도되는 글로벌 앱 통합 프로젝트.

팀 인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는 그 팀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좋았다

.

당연히 나는 앱을 기획하고 PM 역할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웬걸. 팀장님이 나를 전략 포지션으로 넣으셨다.

이해가 안 갔다. 손에 꼽을 인원의 팀에 전략이 왜 필요한지.


무엇보다 내 오랜 신념에 어긋났다.

경험 없이는 전략도 없다.


구축을 담당하는 그룹이 버젓이 있는데 거기 밖에서 나오는 인사이트가 과연 먹힐까.

처음엔 그래도 했다.

회사에서도 처음 하는 일이니까 누군가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했고 누군가는 장표를 그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 그룹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내가 구축 업무를 병행한다면 전략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 투잡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구축에 가담하게 해달라고.

1인시위였다. 결국 됐다.


구축 그룹에 들어갔을 때, 나는 제일 작은 영역을 맡았다.

앱의 한 탭. 전체가 아니라 딱 하나.

이미 몇 년째 대고객 앱을 구축하고 운영해 온 숙련자들이 주요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내 탭 하나를 맡았다.


근데 하다 보니 이상한 일이 생겼다.

회의에서 아무도 정리를 안 하면 내가 했다.

개발팀이랑 권역 사이에서 협의가 안 풀리면 내가 중간에 들어갔다.

문서화가 안 된 정책이 있으면 내가 썼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었다.

그냥 안 하면 프로젝트가 안 돌아가니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이상한 일이 또 생겼다.

앱 전체를 관통하는 상위 정책, 메뉴 구조, 각 국가별 예외 케이스

— 이걸 손바닥 보듯 훤하게 보고 있는 사람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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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책을 법인들이랑 강도 높은 회의로 만들어야 할 때도 어느새 내가 리딩을 하고 있었다.

협업 구조의 한계가 보이면 거버넌스가 됐고, R&R이 애매하면 프로세스가 됐다.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하기 싫었던 일들이, 구축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략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칼 들고 협박하며 하라고 한 건 아니지만 일을 사서 했고

그렇게 프로젝트는 출시됐다.


런칭 후 회사에서는 포상까지 받았는데 공적서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프로젝트를 기획 단계부터 최종 런칭까지 전 과정을 주도했다."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 과정. 기획부터 런칭까지.


맞는 말이었다. 근데 그게 처음부터 내 역할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탭 하나 담당하러 들어갔다가, 안 하면 안 되니까 했다가, 어느새 전부 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누군가 PM을 시켜서 PM이 된 게 아니었다. 하다 보니 PM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모두가 나를 PM이라고 불렀다.


짜릿했다.


근데 그 짜릿함과 동시에 다른 일도 일어나고 있었다.



프로젝트가 잘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직속 상사는 점점 할 일이 없어졌다.

내가 리딩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구조였다.


나는 그냥 일이 잘 됐으면 했던 것뿐이었다. 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근데 결과적으로는 직속 상사를 밀어낸 꼴이 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내가 앉게 됐다.


난 원체 받은 만큼 일도 하고 책임도 진다는 철학이 있었고

이건 분명 내 페이그레이드에 어울리지 않는 책임이라

팀장님께도 다른 사람을 구해서 앉히라고 거듭 제안드렸지만

지금 보니 애초에 그 철학을 지키지 못한 것도 나였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써가며 만들어가는 프로젝트가 제대로 돌아가길 바랐던 건데.

그 마음이 밖에서는 다르게 읽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프로젝트가 끝난 후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근데 받는 쪽에서 안 했다. 아무것도.

질문 한 번 안 했고, 할당한 일은 그냥 방치됐다.


이유를 들어보니 내가 했던 일이 투머치라고 생각하고

굳이 내가? 그렇게까지?라는 심리였다.


응당 "담당자"라는 이름을 가질 거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겐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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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적당히를 외칠 때 혼자 100%를 하면 받게 되는 시선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알았다.

본의 아니게 적을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때 나를 가장 괴롭고, 챌린지하고, 즐겁게 만들었던 그 일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일에는 수명이 있다. 내가 이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이 조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


별똥별이 빛나기를 멈추는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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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그 한계가 어떻게 왔는지 씁니다.

진급도 했고 앱도 출시 했는데, 왜 정신과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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