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께 차마 보내지 못한 시무 28조

by 이도시

생애 주기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과를 찾을 계기는 많다. 학창 시절 교우관계, 성적 스트레스, 입시, 취업, 사회 초년생 시절 적응기.

나는 그게 이제는 모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8년 차에 처음으로 찾아왔다는 사실도 다소 신기했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번아웃에 대한 인식은 매일 같은 야근, 숨도 못 쉬고 일하는 그런 상황에서만 오는 줄 알았다. 남들 입장에서 난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돈도 잘 벌고 운동도 꾸준히 하는 지극히 functioning한 인간이었다.


번아웃의 본질은 바쁨의 강도가 아니었다.

WHO는 번아웃을 과로나 스트레스보다 무기력, 무의미, cynicism에 초점을 맞춰 정의한다.

활활 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타오를 것이 없어진 상태.



25년의 내가 너무 많은 부담감으로 인한 우울이 문제였다면, 그 이후에 남은 것은 내가 무엇을 해도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한 무기력함이었다.

허망함, 고갈, 무의미, 소진됨과의 싸움.


어느 순간부터는 아침에 딱히 회의가 없다면 유연출근제를 이용해서 회사를 늦게 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회사를 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못 찾는 게 아니라, 찾고 싶지 않았다.


가면 또 나만 열심히 일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봐야 하고,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들부터 나의 일을 무력화하려는 협업 부서까지 — 나를 소진시키는 환경에 시간이라도 더 늦게 닿고 싶었다.


세상과 남에게 적어도 해가 되는 서비스나 일 따윈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일을 선택해 왔는데 모든 의사결정이나 가치판단에 있어서 유저나 고객보다는

어떤 높으신 분을 위한 목표달성이나 보고 일정에 따라 일이 진행되는 걸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대기업 8년 차라 이런 일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나도 어느 정도 관료주의적 업무처리에 익숙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유난히 더 심했다.

그러면서 동료에 대한 존경심이나 존중도 서서히 없어졌다.



잘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근데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한테 책임이 몰리고, 일이 몰린 사람이 구조적인 문제를 혼자 감당하다가, 결국 그 사람이 가장 먼저 닳는다.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진리다.


그러면서 가끔 후배들에게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조언도 하지만,

그런 조언을 들어야 덜 열심히 할 사람이라면 이미 그 후배는 덜 열심히 할 생각 따윈 없을 것이다.


메일을 몇 번 쓰다가 지웠다.


“최근 몇 차례의 R&R 논의와 런칭 의사결정 회의, 그리고 프로젝트 전반을 진행하며

저 개인적으로도 한계가 있음을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라고 시작하는 메일이다.


팀장이 하소연하라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리스크 관리와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기능을 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싶은 일들은 많았지만 말을 삼가게 됐다.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최대한 감정이 안 섞이도록 메일을 쓰다 지웠다 몇 번이 고를 반복했다. 3개월 동안 티켓 하나 처리하지 않은 사람이 "떠넘김을 당하는 것 같다"라고 했을 때의 그 허탈함. 인수인계 문서를 세 번 만들었는데 아무도 읽지 않고, 앞에서 프로덕트에 대한 기본 정책을 설명하는데 이런 건 필요 없다고 그냥 넘어가자고 뻔뻔하게 말하던 얼굴. 임원이 한가득인 방에서 혼자 우리 조직을 대변하고 공격받을 때 입 꾹 닫고 있거나 그 자리에 있지도 않던 리더들. 그렇게 혼자 대응하고 돌아와서 눈물을 참았던 것들.


다 쓰자고 하면 너무 길었고, 누구한테 말한들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문제제기를 해도 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 그사이에 희생해야 하는 것들.

달라지지 않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그냥 모르고 있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래서 자초지종은 보내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손해라는 말이 있다.

월급은 같은데 일만 더 몰린다고. 나도 이제 그 말이 맞다는 걸 안다.

근데 나는 여전히 하루의 30%를 보내는 곳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수많은 부서 이동 끝에 여기까지 왔다.

그 믿음이 나를 살게도 하고, 나를 갉아먹기도 했다.


프로젝트가 끝났을 때 짜릿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고 생각했다. 그때 주위를 돌아봤더니 제대로 일하는 사람이 없었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아군이 더 힘들었다. 그게 제일 힘들었다.


번아웃의 원인은 다시 말하지만 활활 타는 것에 있지 않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다. 네가 열심히 해서, 네가 유별나서, 네가 눈치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제대로 된 장작이 없어서 더 이상 새롭게 태울 게 없고, 있는 나무들만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시원한 물을 끼얹건, 아니면 새로운 장작을 구하건. 방향만 다를 뿐 어느 하나가 정답은 아니다.

부디 불이 꺼지지 않고 샘이 마르지 않는 회사생활을 다들 가꿔나가길 바랍니다.



예고.

개발? 데이터분석? PMP 자격증?

6화부터는 PM으로 일하고 타협하며 배운 점을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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