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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Jul 05. 2024

딸에게 운전 가르치기

 면허증 운전을 해야 할 동기가 없으니 그야말로 장롱 속에 묻어둔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했다.

올초에 직장을 구해 한 달여를 다니더니 갑자기 운전연수를 받다고 했다.

사무실은 시내에 있지만 시외에 있는 물류창고로도 자주 출퇴근을 해야 하는 사정 때문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통근 시간이 오래 걸릴뿐더러 배차 간격도 길어 불편했다.

직장 선배의 차를 얻어 타기도 했지만 번 그러기엔 염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알아봤는지 한동안 개인 운전강사에게 주말마다 연수용 차량으로 연습을 했다.

달 가까이 지나서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우리 자동차로 연습하겠다고 했다.

첫날 걱정이 되어 주차장으로 내려가 보았다.

강사가 긴급한 상황에 대비해 여러 가지 안전 보조장비를 설치하였다.

마음이 놓였다.


한 달 정도 후엔 강사 없이 해보겠다며 조수석에 엄마가 앉아 있어 달라 했다.

엄마 역시 장롱면허 소지자라 아빠가 낫지 않겠냐고 했더니, 잔소리가 심할 듯해서 오히려 더 정신없을 거라고 했다.




마침 주말에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처가에 갈 일이 생겼다.

강변북로나 올림픽도로를 거쳐야 하는 코스로 딸이 운전연습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딸아이가 운전하도록 권했다.

뒷좌석에 앉은 아내 불안해하는 눈치였지만 딸은 오히려 덤덤했다.

조수석에 앉은 나도 좌불안석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딸이 덩달아 불안해할까 봐 내색하지 않았다.


딸은 목적지를 입력한 스마트폰을 장착하고 좌석을 조정한 후 핸드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주행모드로 바꾼 후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딸의 공식적인 첫 운전이 시작되었다.

강사 없이 혼자 하는 운전은 처음이라 더듬댔지만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에 나서자마자 좌회전하기 위해 차선을 두 개나 바꿔야 했는데도 별 어려움은 없었다.

아마 뒤창에 대문짝만 하게 붙인 두 개의 '초보운전' 스티커가 도움이 된 듯했다.

어쨌거나 몇 번의 좌우회전과 차선변경 후에 올림픽도로로 진입했다.


차량속도가 빠른 자동차 전용도로여서인 지 딸은 흔들리 기색이 역력했다.

주행은 느렸지만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초보자가 모두 그렇듯이 차선 변경이 불안했다.

주변 차들의 속도감과 간격에 대한 감각이 부족해 차선변경 시기를 놓치곤 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기본기는 잘 배운 듯했다.

뒷좌석의 아내는 도착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해 안절부절못했지만, 나는 처음보다 걱정 누그러졌다.

큰 실수 없이 무사히 도착해 딸아이 자신이나 우리 부부 모두 뿌듯했다.

어릴 적 손수 키워주신 외할머니는 누구보다 대견스러워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딸은 앞으로 교외 물류창고에 갈 땐 직접 운전해서 가겠다고 했다.

당분간 아빠가 조수석에 앉아서 코치를 해달라고 했다.

아직 누군가 옆에 있어주어야 긴장을 덜 수 있다고 했다.


주말에 미리 운전경로와 조심할 구간을 알아두기 위해 물류창고까지 갔다 왔다.

여전히 차선 변경이 매끄럽지 못했다.

보자 누구에게나 가장 큰 난제인 주차 문제였다.

목적지까지 갈 순 있지만 도착한 후 제대로 주차하지 못하면 그 또한 난감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후진 주차는 딸의 방향감각을 흩트려 놓았다.

의도와는 달리 반대방향으로 차가 움직이기 일쑤였다.

진행방향에만 정신이 쏠려 주변의 지형지물을 피지도 못했다.

익숙해지려면 한참이나 걸릴 듯했다.


이후로 서너 번 물류창고까지 딸이 운전해서 출퇴근했다.

매번 동일한 코스로 왕복 익숙해지니 딸의 긴장감도 덜 하였다.

차가 드문 코스에선 제법 속도까지 높였다.

하지만 차선을 변경할 땐 여전히 우왕좌왕했다.

방향지시등을 켜자마자 옆차선의 차를 아랑곳하지 않고 진입하는 바람에 나는 몇 번이나 기겁을 했다.

특히 번잡한 시내교차로에서는 딸도 정신이 없었지만 나도 덩달아 혼비백산했다.

심지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지르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바로 후회했다.

딸이 나 때문에 더 놀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딸이 차를 찌그러뜨렸다.

오른쪽 뒷문 아래가 푹 들어갔다.

언뜻 보기엔 심하진 않지만, 멀쩡하던 차에 생채기가 났으니 보기 좋을 리 없다.

구입한 지 10년이 다 됐지만 나 외엔 거의 사용하지 않던 차라 주행거리도 2만 킬로가 채 안되고 새 차처럼 말끔한 상태였다.

소형차에 구형모델이었지만 딸은 몰라도 나는 마음이 살짝 상했다.

딸의 마음이 동요될까 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주말에 드라이브 겸 딸의 운전연습을 위해 양수리 근처 '물의 정원'으로 가던 이었다.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먹지 않은 딸에게 시장기가 찾아와, 카페가 보이면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한강 뷰가 좋은 카페가 보였다.

주차장에 들어섰는 데 바로 옆 스타벅스다.

거기에 딸이 먹고 싶은 메뉴가 있다고 했다.

두 카페의 주차장은 나란히 있었는 데 둘 사이에는 펜스가 쳐져있었다.

스타벅스 쪽으로 차를 옮기려면 차들이 달리는 차선으로 차머리를 들여 밀었다가 주차장 쪽으로 들어와야 했다.


딸의 운전실력으로 통과하기엔 여유공간이 듯했다.

딸은 차선 쪽을 의식해인지 주차장을 구분하는 펜스의 기둥 쪽으로 너무 붙는 것 아닌가 싶었다.

반쯤 통과하는데 우지직하는 소리가 오른쪽 에서 들렸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옆차선에 차들이 달리고 있어 위험했기에 차를 왼쪽으로 빼지 말고 그대로 직진하라 말했다.

 우지끈하고 더 큰 소리를 내뱉후에 스타벅스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딸에게 차 우게 하고 내가 운전석으로 가서 주차했다.

뒷문 쪽을 보니 핏 멀쩡한 듯했다.

하지만 딸이 한번 보니니 '헐~'하고 놀라워했다.

상심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신기하다는 눈치였다.

오히려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생각보다 얼마 안 찌그러졌네'하며 나도 웃고 말았다.

사소한 실수로 운전에 정나미가 떨어지면 더 이상 연습하기 싫다고 할까 봐 저어하였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가서도 딸은 태연하게 자신이 먹을 메뉴를 주문하고 왔다.

겉보기엔 마음의 동요가 없어 보였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에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딸이 어떤 점에서 실수했는지 설명했다.

실제 체험했으니 몸에 또렷이 각인시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랐다.


혹시나 해서 넌지시 물었다.

"'물의 정원'까지 갔다 올 수 있겠어?"

다행히 평상심을 유지하는 듯 다시 운전하겠다고 했다.

물의 정원에 도착했을 땐 마침 들판에 양귀비가 가득 피어있었다.

사진도 찍고 한강변을 거닐며 혹시 모를 딸의 상심을 누그러뜨리길 바랐다.

딸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했다.

오히려 내 마음속엔 여전히 찌그러진 차의 잔상이 떠돌아다녔.

돌아오는 길은 주말인데도 붐비지 않았고 딸도 담담하게 운전을 했다.


"운전이 많이 는 것 같네."


자신이 생각할 때도 운전이 는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점심을 맛있게 먹으면서 차에 대해선 일절 말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아내나 누구에게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 생각이 났다.

딸보다 내가 더 민감한 모양이다.




불쑥 이런 생각을 했다.

딸이 아니라 아내였다면 운전연습 중에 나는 얼마나 험한 말을 많이 했을까?

아마 부부싸움도 적잖이 하지 않았을까?

오죽하면 아내 운전연습시키다 이혼까지 했다는 부부도 있다고 할까?

이래서 마누라 운전과 자식 공부는 아빠가 가르치면 안 된다는 시쳇말이 생겼나 보다.


그래도 딸이니까 다행이지 싶다.

기겁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을 높이고 질책은 했지만, 험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딸이 침울해질까 봐 걱정되어 토닥거려 주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잘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딸은 힘들긴 하지만 운전하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고도 했다.

출퇴근이 힘들어서였는지,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태 운전이 싫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대견하다.


더 뿌듯한 것은, 평소에 자주 대화도 못했는데 운전연습하는 시간만이라도 도란 수다도 떨면서 부대꼈다.

부녀지간에 정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성인이 된 딸은 꼰대가 된 아빠와 멀어지기 십상이다.

가끔 함께 붙어서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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