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바리스타 공부를 하고 있다.
회사에서 정년퇴직 예정자에게 재취업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얼마간 교육비를 지원해 주어 부담은 적었다.
요리 강습이나 전문 자격증 강좌를 등록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내려먹는 커피도 뭘 좀 알면 폼이 나지 않을까 하는 로망 같은 게 작용했었다.
커피를 갈아 뜨거운 물로 내려 마시면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고상하지 않은가.
아침마다 아내나 딸들에게 직접 커피를 내려 주는 중년 가장의 일상도 품위 있다 싶었다.
강좌는 두 달 동안 일주일에 3일, 저녁에 3시간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어서 60대에 들어선 내가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저러한 낭만적인 모습과 더불어 저녁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생각에 큰 고민 없이 등록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은 커피 공부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또래를 만나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중년의 허한 마음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으리란 기대가 더 컸다.
첫날 강의실에 들어서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딸아이 또래 수강생 몇몇과 40세 남짓 조카뻘 강사와 조우했다.
조금 있으면 중년 수강생도 한 명쯤은 오겠거니 했으나, 수업이 시작되고 한참을 지나도 중년은 나 혼자 뿐이었다.
강사의 첫인사 후 수강생 각자의 자기소개로 이어졌다.
나와는 달리 나중에 직접 카페를 창업하거나 자격증 취득을 목적으로 온 수강생들이었다.
첫 시간이어서인지 다들 눈빛은 비장했고 목소리는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나는 분위기가 서먹하고 어색해 3시간 내내 이질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강사의 가벼운 언행이 거슬렸다.
그게 요즘 MZ세대의 보편적인 행태인가 싶었지만 뭔가 턱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듯 유머러스한 멘트를 자주 했지만 내 감성엔 맞지 않았다.
하긴 다른 수강생도 반응이 시원치 않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고졸이라고도 밝혔는데 그게 무슨 자랑인양 했다.
요즘 웬만하면 대졸 정도가 보통인데, 학력이 그에 못 미침에도 여러분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으니 대단하지 않느냐는 투로 들렸다.
나름대로 충실하고 친절하게 가르치려 했고 사례를 위주로 쉽게 설명하려 애썼다.
나는 그 사례로 말미암아 더 혼란스러워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었다.
노화현상에 따른 이해력의 감퇴로 받아들였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내색도 못하고 덩달아 열성적인 척했다.
특이한 수강생이 있었다.
중국 연길에서 왔다는 한 여성 수강생은 취미 생활도 아니고 취업 준비생도 아니었다.
아직 한국인과 친분이 없는지 사교를 목적으로 온 듯했다.
강의보다는 다른 수강생과 수다를 즐기거나 수업 후 뒤풀이만 기다렸다.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주변에 강의내용과 관련 없는 말을 걸거나 강사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사람에겐 무례한 언행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강사가 한참이나 설명을 하는 중에 딴짓을 하더니 느닷없이.
"강사님 지금 제대로 가르치고 있긴 하나욧?"
모두 아연실색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입술도 파르르 떨리던 강사의 모습을 나만 본 건 아니었다.
1분여 침묵이 흘렀고 강사가 틀어놓은 최신가요만 요란하게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살아온 문화 배경의 차이 때문이겠거니 다들 모른 척 지나갔다.
하지만 수업일수가 지날수록 무례하고 엉뚱한 행동에 차츰 눈살을 찌푸리고 불쾌한 반응을 나타냈다.
그 수강생과 대화를 기피하였고 의도치 않았는데도 따돌리는 형국이었다.
딸 같은 아이가 객지에서 맘고생이 심할 듯하여 나만 종종 말상대가 되어 주었지만, 나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어느 날은 다른 수강생과 말다툼을 하고 다시는 강의에 오지 않을 듯 휙 하고 나가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음날 다툰 수강생 사이에 화해를 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수업 분위기는 내가 고대하던 바와는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러니 나는 강의가 있는 날이면 출석을 할까 말까 혼자서 속을 끓여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 흘러갔는지 종강까지 이제 딱 한 주가 남았다.
커피머쉰을 다루는 요령, 에스프레소 추출과 맛의 감별, 핸드드립 커피 내리기, 라테아트 등 카페 창업을 위한 다양한 기술을 배웠다.
뭐 별거 있겠나 싶었지만 배울수록 흥미가 생겨났다.
그중 수업 시작 때마다 강사가 내린 커피를 맛보고 평가하는 훈련은 커피의 세계로 한발 더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커피 맛은 쓰기만 할 뿐 거기서 거기이겠거니 했었는데, 원두 원산지나 브렌딩 비율, 도징량, 추출시간이나 방법 등에 따라 변화무쌍한 맛의 세계가 펼쳐졌다.
특히 똑같은 재료인데도 수강생의 손맛에 따라 전혀 다른 풍미의 커피로 탈바꿈하여 놀라웠다.
이젠 일상에서 커피를 홀짝일 때마다 신맛, 쓴맛, 고소한 맛, 단맛, 바디감, 마우스필을 감별하려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알게 모르게 수업 분위기에도 익숙해졌다.
마뜩잖은 분위기를 참으며 두 달간을 어떻게 다닐까 갈등했던 초기의 마음이 무색할 정도다.
함께 부대끼다 보니 강사와 수강생들 간에 스스럼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실습을 할 때도 수강생끼리 조언을 구하다 보니 사소한 대화를 자주 했다.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느라 시간이 흘러가는 줄 몰랐다.
수강생들은 부모뻘인 내게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자연스레 다가왔다.
나도 이제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격의 없이 실없는 대화에도 끼여 들곤 했다.
커피를 매개로 대화하면서 어울리다 보니 나도 몰래 나이를 잊고 중년의 무게도 내려놓게 되었다.
껄끄럽던 강사의 강의도 들을만했고, 어린애 같기만 하던 수강생들도 이제 다 친구가 되었다.
수업이 며칠 더 연장되었으면 하는 욕심이 났다.
앞으로 퇴직을 하게 되면 어딜 가더라도 나보다 어린 사람과 부대끼지 않을 수 없다.
재취업을 한들 그곳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을 순 없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나이를 잊고 상황에 맞춰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예의는 지키겠지만 나이가 많다고 우대해 줄 리 없다.
오히려 나이대접을 받으려다 꼰대로 취급받고 소외되기 십상이다.
바리스타 강의를 들으면서 커피 내리는 공부만 한 게 아니었다.
자식뻘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그들에게 다가가는 용기, 나를 내려놓는 대화,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이제 5개월 후면 정년퇴직을 한다.
참 이상하다.
올 상반기만 하더라도 어떻게 되겠지 하며 덤덤했는데 불안이 안개처럼 다가온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하다.
퇴직 후를 대비해 전문자격증도 여러 개 따두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느낌이다.
현업에선 경력과 실적이 중요한데, 자격증이 있다고 나이 든 사람을 흔쾌히 받아줄 리 만무하다.
받아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받을 대우에 걸맞는 처신이 뒤따라야 한다.
전문분야 종사자 몇몇을 만나 실상을 들어보니 자격증으로 재취업은 하겠지만 기대만큼의 대접은 내려놓아야 한다는 귀띔이 공통적이다.
제2의 인생에서는 지금처럼 똑같은 대접은 버려야 할 것 같다.
나의 기대와 닥쳐올 현실은 차이가 클 것이다.
이제 그 기대를 조금씩 내려놓고 현실에 맞추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금강경에서 세상만사가 허상이니 상을 내려놓으라는 말씀 하신다.
그게 잘 안되니 불안하고 두려운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