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을 읽고 나서
요양원에 모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 같은 행태를 보이실 때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짜증이 나기도 했다.
심신이 성치 않으시니 예민해지셔서 부리는 투정이라고만 여기면 그만이지만, 괜한 고집을 부리시면 나뿐만 아니라 형님, 누님들도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응석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참아 넘겼다.
자신의 의지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실 수 없으시니 일방적으로 베푸는 간병과 돌봄의 수동적 대상자로만 대해드린 것이다.
그게 최소한의 자식 된 도리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라 믿었다.
스웨덴 작가 리사 리드센의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은 이런 생각을 뒤흔들었고 나를 가만히 돌아보게 했다.
소설은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노인의 마지막 5개월의 일상에 대해 그리고 있다.
치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고 중년 아들과 요양보호사의 돌봄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노인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오랫동안 함께한 반려견(식스텐)을 돌보는 일을 두고 아들(한스)과 벌이는 갈등과 화해과정, 아내의 스카프를 항아리에 담아두고 희미한 체취를 맡으며 달래는 그리움, 자신을 홀대했던 아버지를 노인이라고만 칭하며 원망을 드러내는 평생의 회한, 언제나 이해하고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노후의 고독을 함께 나누었던 절친을 불과 며칠 앞서 보낸 슬픔과 공허함, 삶의 희망이며 사랑의 결정체였던 손녀와의 추억.
우리 주변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사연들이라 생의 막바지에 선 주인공의 마음이 더 생생하게 전해졌다.
스토리의 전개가 노인의 시점인 1인칭 소설이어서 더 절절했다.
요양보호사의 짧은 간병일지를 사이사이에 삽입하여 현실상황과 제삼자의 객관적 판단을 확인해 볼 수 있지만, 노인이 직접 표현하는 불편, 불만, 욕구, 분노, 허탈과 같은 심리상태가 더 가슴에 와닿았고 안타까웠다.
몸이 마음대로 안되고 정신도 가끔 가물가물한 말년의 노인은 하루하루를 별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는 줄만 알았다.
부모님이 투정을 부리시고 짜증을 내실 때마다 늙고 병들면 누구나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노년의 현상으로만 치부했었다.
그래서 당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식의 입장에서 편하실 거라 여겨지는 대로 모든 일을 결정하였다.
그게 자식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생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보내도록 해드리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자식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시고 거부하고 고집을 부리실 땐 답답하고 때론 화도 났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돌봄을 받는 노인에겐 지나친 강요와 간섭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식 입장에서 걱정과 우려가 오히려 부모님에겐 불편하고 불만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게 더 좋을 수가 있지?"
목소리가 갈라져서 다시 침을 뱉었지만 목에 이런 덩어리를 없앨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이 좋은지 간섭해 오는 일에 너무 지쳐 버렸다.
"이 침대는 일어나서 나오기가 훨씬 쉬워요. 이걸 보세요."
한스는 새 침대에 직접 누워 난간의 머리 쪽에 붙어 있는 알루미늄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 손잡이를 들고 그의 두개골을 내려치는 상상을 하며, 나의 야윈 허벅지에 올려놓은 식스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젠장, 이건 내 집이란 말이야. 나는 마음먹고 힘을 주어 기침을 했다. 그러자 가래가 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부엌 소파에서라면 잠을 푹 잘 수 있는 것을 아는데도 어떻게 이 침대가 더 좋을 수 있지?"
한스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 이젠 이 일이 아버지 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좀 알아주세요."
내 집의 내 침대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이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소리치고 싶었지만 가래 덩어리가 목을 막는 바람에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246쪽)
나는 황망한 상황에 처한 부모님의 심리를 보살피지 않고 단지 육체적 불편함만 해소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부모님의 입장보다 자식과 간병인의 편리와 욕구대로만 돌봐드린 것은 아닐까?
육신마저 맘대로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너져 가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욕구가 투정과 응석으로 비친 건 아니었을까?
번역자의 말대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며, 자식들의 손길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침범하는 것처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종의 순간에 먼저 화해의 말을 건네며 그동안 갈등했던 아들을 위로한다.
그게 부모님의 마음인 모양이다.
"너도 알다시피 난 네가 자랑스럽단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겨우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한스는 내가 잊고 있던 그만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년 시절의 눈빛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을 때의 눈빛. 마치 이 세상에는 그와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 그가 눈을 깜박였다. 그가 허리를 굽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449~450쪽)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임종의 순간을 읽을 땐 나도 몰래 목이 칼칼해지고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제목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마치 내 부모님의 마지막을 대하는 듯했다.
곧 부모님을 뵈러 가야겠다.
주변이 너무나 어두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식스텐의 털 냄새는 내 코끝에서 어른거렸고, 동시에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무언가가 방향을 바꾸는 듯한 느낌. 식스텐의 축축한 코가 내 손 안으로 들어왔고, 동시에 내게 기대어 오는 식스텐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맑아졌다.
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남쪽으로 날아가기 위해 두루미들이 모여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451~452쪽)
* 이 글을 쓰고 나서 며칠 후에 읽은 이석원의 산문집 <슬픔의 모양>은 부모님을 돌보고 간병하는 자식의 입장에서 일상의 갈등과 요동치는 애증의 감정을 토로한다. 내 경우와 어쩌면 이토록 꼭 닮았을까 놀랐다. 노부모님과 자식 간에 벌어지는 일상은 어느 집이나 비슷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