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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조건

by B급 인생

매년 최소한 한 번은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돈 많이 드는 취미가 없어서 여윳돈을 아껴 여행경비로 쓸 수 있었지만 맞벌이하는 아내와 휴가일정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의 일정도 중요한 변수였다.

어릴 땐 성수기인 방학 때만 갈 수 있었고, 다 자란 다음에는 다른 이유로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새로운 가족, 반려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각자의 일상이 생겨 가족여행은 점차 사라졌고, 따로 여행 계획을 잡을 때도 가족 누군가 한 사람은 최소한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반려견을 돌봐주어야 했기에 나머지 가족과 스케줄 조정이 중요했다.

물론 직장에서 위아래 사람들과 휴가날을 조율하기도 쉽지 않아 다른 사람과 내가 가고 싶은 날이 겹칠 땐 난감했다.

여행을 결정하는 핵심 3 요소가 돈, 시간, 체력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제일 문제였다.


일반 직장인이면 이런 사정이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퇴직 후엔 마음 놓고 여행이나 다녀볼 기대에 기대어 고달픈 직장생활을 견뎠다.

버킷리스트처럼 어디를 가볼까 마음속에 정해둔 곳도 많았고, 여유롭게 장기간 자유여행이나 한달살이를 꿈꾸기도 했다.

한동안 온갖 여행안내서를 사모으고 여행경험담을 적은 책이 독서의 주를 이루었다.

여행 관련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 심심할 때면 다양한 여행정보와 경험담을 읽어보기도 했다.

직장생활 마지막 1년 차엔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정년퇴직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퇴직을 하니 여행할 시간은 많이 늘었지만, 돈과 체력 문제가 점차 부각되었다.

퇴직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현실적 걱정거리와 장애물도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돈에 문제가 발생했다.

재취업을 했지만 수입이 전 직장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여행비용으로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치솟은 물가에 이런저런 생활비로 보태다 보면 아내에게 여행을 가자고 호기를 부릴 용기가 당최 생기질 않았다.

누군가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에 퇴직금이 있을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집 장만에 퇴직금 중간 정산금을 보탰고, 애들 학비며 이런저런 집안 대소사에 쓴 경비를 제하니 폼나게 여행할 만큼의 경제력이 없다는 사실을 퇴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체력도 자신이 없어졌다.

꾸준한 운동으로 몸에 특별한 이상이 발생하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신체적 노화는 병원과 의원 출입이 잦아졌다.

벌써 백내장 수술을 했고 전립선 비대증은 수술을 할까 말까 고민 중이다.

언제부턴가 허리도 심상치 않아 정형외과를 다니기도 했고, 치아상태도 예전 같지 않아 앞으로 무슨 일로 큰돈이 들지 짐작할 수가 없다.

나만 그러면 다행이지만, 함께 늙어가는 아내도 이미 이런저런 몸의 고장으로 병원출입이 많다.

다행히 실손보험을 일찌감치 들어놓아 일상의 소소한 의료비 지출은 부담이 없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어느 정도 비상금은 챙겨두어야 하기에 여행에 함부로 돈을 쓸 처지가 아님을 자각했다.




돈, 시간, 체력이 적절히 갖추어지는 정년퇴직 후 10년 정도의 60대가 인생에서 여행을 즐길 황금시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몸이 점점 시원찮아지니 일주일 이상의 장기여행은 고사하고 이박삼일 정도의 단기 여행도 마음뿐 썩 당기지 않는다.


더 늙기 전에 시간, 돈, 체력이 많이 드는 유럽이나 미주 쪽 장거리 여행부터 부지런히 다녀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선 이코노미 클래스의 좌석에서 열두어 시간을 쭈그려 앉아있을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게다가 자유여행을 하려면 항공편에다 숙소와 현지 여행 루트를 미리 챙겨야 하는데, 최소한 한 달 이상 입시공부하듯 이것저것 알아보고 비교분석하기엔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도 버텨 낼 자신이 없다.

어떻게든 여행을 떠났다 하더라도 식사 때마다 어디에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방황하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손사래가 쳐진다.


해서 패키지여행이 딱이다 싶은데 막상 낯선 사람들과 함께 가이드를 따라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도 보통 체력으론 감당이 안될 나이란 걸 몇 차례 경험했다.

더구나 무릎이 시원찮고, 화장실을 자주 찾는 아내를 동반하려면 이동동선이 최소화되어 느긋하게 다니는 상품이어야 한다.

아무리 여기저기 여행사 홈페이지를 기웃거려 봐도 딱 맞는 상품은 비즈니스 항공편에 5성급 호텔과 각종 선택관광이 모두 포함된 고가의 패키지 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여행경비가 못해도 지금 받는 월급의 두어 배라는 팩트를 확인하는 순간 포기하고 만다.




무엇보다 여행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예기치 못했던 노부모님의 상황이다.


나만 나이 들어가는 줄만 알고 신세한탄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부모님은 90 전후가 되시어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곤란한 처지가 되시고 큰 수술을 받으실 때에야 아차 싶었다.

건강하게 버텨주실 줄 알았던 부모님이 언제부턴가 병원 출입이 잦았지만 노인들은 다 그러려니 했다.

급기야 두 분 모두 요양시설에 모시면서 경비도 경비지만 마음이 편치 못하기 시작했다.


처가 쪽 사정도 비슷하여 그쪽 가족들이 돌봐드리고는 있으나 아내의 마음도 나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양가의 어른들이 이런 처지인데 여윳돈이 있다고 한들 시간이 남아돈다고 한들 여행 한번 다녀오자고 아내를 부추기기가 마땅치 않다.

양가 어른들께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몇 박 며칠을 연락도 쉽지 않고 금방 돌아올 수도 없는 곳으로 나돌아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행을 떠날 수는 있지만 집안 어른들의 상황을 나 몰라라 하고 고가의 경비를 들여 유람이나 다니는 자식의 마음이 편할리 있겠는가?


이러니 여행을 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여행사 홈페이지를 열심히 들여다보다가도 현실을 따져보면 결론은 벌써 다 정해져 있다.

다음에 좀 더 형편이 편할 때 가자고.




특별한 취미가 없는 나나 아내나 여행을 좋아한다.

다른 건 몰라도 여행을 주제로 말을 트면 대화가 잘 풀리고 합이 제법 잘 맞아떨어진다.

두 사람 모두 퇴직 후에는 원 없이 여행을 다니기로 초점이 모아진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랫동안 살림과 자녀 교육을 병행하며 직장생활을 해온 아내를 생각하면, 퇴직 후엔 여행을 즐기면서 늙어가자는 말이 여행을 자주 하고 싶은 내 입장에서도 둘러대기 좋은 핑곗거리다.


올해 들어 아내도 여행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한 적이 없다.

모임에서 수시로 어디를 가자고 부추기는 모양인데도 에둘러 사양했다며 씁쓸한 심정만 슬쩍 비출 뿐이다.

가끔 그동안 다녀왔던 여행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은근히 의향을 타진해 보아도 추억만 되새김질할 뿐, '그래 한번 질러 보자'라고 흥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아내도 꼬불쳐 둔 여윳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하고, 나 못지않게 이런저런 집안 사정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돈, 시간, 체력은 퇴직전이나 지금이나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다.


옷은 살까 말까 하다 사지 말아야 하고 여행은 갈까 말까 하다 가야만 나중에 후회 없다고 한다.

여행은 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든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돈, 시간, 체력을 만들어 감행하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요즘은 여행을 생각하면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떠올리기보다는 여행에 따른 고달픈 일들을 먼저 상상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딱 하나, 시들어가는 의욕이 여행을 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돈, 시간, 체력이라는 물리적 조건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여행에 대한 갈망과 의욕이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뿐만 아니다.

언제부턴가 이런저런 이유로 만사가 귀찮아졌다.

무슨 일을 해보고 싶다가도 '그걸 해서 뭘 해?' 하는 마음이 연이어서 맞선다.

사는 형편이 마땅찮아서인지 아니면 세상만사 부질없음을 깨우쳐서인지 도무지 실행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러다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나이만 잔뜩 먹어 후회할지 모른다는 또 다른 걱정이 아른거린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딱히 이거다라고 확정할 수가 없다.

퇴직 후뿐 아니라 좀 더 늙어서도 생기발랄하게 살아가고자 했건만 나도 몰래 점점 불꽃이 사위어가고 있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늙어가면서 어쩌면 체력의 노화보다 마음의 노화가 더 큰 병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걱정과 나태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 마침 메모장에서 오래전에 필사해 두었던 문장이 나의 뒤통수를 때린다.

뭐든 일단 저질러 봐야겠다는 욕망이 슬며시 올라온다.

아내에게 여행 한번 가보자고 말을 붙여봐야겠다.

내가 안달복달하면서 재촉해도 세상은 언제나 자기 속도대로 흘러간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있듯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꾸려가는 것은 누가 이래라저래라 가르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낄 때 망설이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쉬면서 다시 인생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워만 하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2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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