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무게에 대하여

by B급 인생

산책을 나갔더니 어느새 개나리가 피어있었다.

개나리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뜬금없지만,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개나리라는 이름이 없다면 개나리를 어떻게 개나리로 인식할 수 있을까?


들과 산에 꽃들이 만발할 것이다.

산책 길에 한 번쯤 봄직한 꽃을 검색해 봤다.


출처 : 네이버 (첫 줄 : 애기똥풀, 여뀌, 둘째 줄 :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셋째 줄 : 별꽃, 벗풀, 며느리밥풀꽃, 넷째 줄 : 사마귀풀, 꽃마리)


이 앙증맞고 어여쁜 꽃들의 이름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뭉뚱그려 들꽃이라거나 야생화라 부르기 십상이다.

논밭에 나타난다면 농부들은 아마 잡초라고 부르지 싶다.

이름을 모르니 생김새도 색깔도 모양도 저마다의 개성이 있건만, 그저 들꽃이나 야생화, 혹은 잡초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가두어 취급한다.


애기똥풀, 여뀌,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별꽃, 벗풀, 며느리밥풀꽃, 사마귀풀, 꽃마리.

이름을 한번 불러보니 그제야 제각각의 생명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제 나는 이 녀석들을 일괄해서 들꽃이나 야생화나 잡초라 부르지 않는다.


김춘수 시인의 한 마디가 진실로 와닿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은 고유한 존재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열쇠이다.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서 나를 정의하는 그 무엇이다.




전각(篆刻) 강좌의 첫 수업에 갔더니 호를 지어보라고 한다.

전각돌에 새겨 두고두고 쓰게 할 모양이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호는 많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가 쓸 호를 지으려니 막연하다.

지금껏 타인이 불러주는 이름으로만 살아왔을 뿐, 스스로 나를 정의해 본 적이 없으니 금방 떠오를 리 만무하다.

율곡처럼 살던 지역을 떠올릴 수도 없고, 여유당 같은 당호도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백범이나 추사 같은 인생철학도 분명하지 않다.

도무지 호를 삼을만한 구실을 찾을 수가 없다.




학창 시절 국어책에 나오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소개할 때 첫머리에 꼭 나오는 것이 있었다.

본명은 아무개인데 자(字)는 무엇이고 호(號)는 무엇이라고 한다라고.

모두 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는 건 알겠는데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명, 자, 호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는 동양문화권의 전통이었다.

본명은 부모나 조부모가 지으신 공식 이름으로, 부모나 스승 외에는 직접 부르면 결례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본명 대신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자와 호를 따로 지었다고 한다.


자는 관례(성인식)를 치를 때 스승이나 어른이 지은 호칭으로, 본명의 뜻을 보완하거나 확장하는 의미를 담는다.

호는 본명이나 자 외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스스로 짓거나 스승이나 친구가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자신의 거처, 취향, 신념, 혹은 삶의 태도를 자유롭게 담는다.


최근에는 부르기 편한 한글 이름이나 국제적 감각의 서양식 이름을 선호하고 자나 호를 따로 짓는 경우도 드물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부르는 이름을 따로 두고 격식을 차리던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요즘보다 이름에 각별한 의미와 무게를 둔 것은 분명하다.




이름의 무게로 치면 트로이아 전쟁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만큼 무거운 이름도 드물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 여신은 아들의 운명을 다 알고 있었다.

전쟁에 참여할지 길목에 선 아들을 두고 테티스는 말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게는 두 가지 운명이 놓여 있단다.

네가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한다면, 너는 전쟁터에서 일찍 죽을 운명이다.

그 대신 너는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반대로 네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너는 건강하게 오래 편안히 살 것이다.

하지만 너는 불멸의 명성을 얻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다."(김헌의 그리스 로마신화 472쪽)


잘 알다시피,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쏜 화살에 뒤꿈치를 맞아 죽는다.

그래서인지 몇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신체의 일부를 지칭하며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름만을 위해 소중한 삶을 지불한 그의 선택이, 나 같은 범부의 눈에는 안타까운 비극으로 비칠 뿐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우스 역의 브래드 피트)




느닷없이 코믹 사극영화 <황산벌>이 떠오른다.

백제 계백장군(박중훈 분)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치욕을 당하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가족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모두 모아 칼을 들고 한 마디 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여!"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이에 그의 부인(김선아 분)은 두 팔로 자식 앞을 가로막으며 단호하게 소리친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며.


호랭이는 거죽 땀시 디져불고 사람은 이름 땀시 디져부는 것이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말장난으로 들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온 것도 잠시, 곧 가슴엔 먹먹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통찰을 남긴다.


출처 : 네이버


과연 사람에게 이름이란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말해 주는가?

아킬레우스는 불멸의 이름을 위해 목숨을 던졌고, 계백은 이름의 무게를 지키려 자신의 손으로 가족의 생을 거두었다.

이름이란 남이 부르는 껍데기일 뿐인가, 아니면 한 존재의 정수인가?




도덕경에서도 이름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있다.

첫 번째 구절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사람에 따라 해석이 미묘하게 다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최진석, 나 홀로 읽는 도덕경, 187쪽)


도덕경의 대가 최진석 교수의 풀이를 토대로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화한 것이다.

이름 붙인 사람이 대상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담아서 이름을 만들 순 없다.

독특한 모습이나 주요한 특징만을 표현해 낼 뿐이다.

이름만 보고 그 대상의 실체는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이름이 존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면, 역설적으로 이름은 가벼워져야 마땅하다.

때로는 이름의 무게를 덜어냄으로써 더 깊고 본질적인 삶을 산 이도 있다




다시 그리스로마 신화로 돌아가 보자.


트로이아 전쟁 후 귀향하던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어쩌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가 사는 동굴에 들어간다.

한참 후 거인이 돌아와 동굴 입구를 바위로 막아버리고 병사들을 한 명씩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꾀돌이 오디세우스는 살 길을 모색했다.

거인을 꼬셔 포도주를 마셔 취하게 만든 뒤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


“내 이름은 Nobody(아무도 아니)다.”


거인이 술에 취해 잠들자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불에 달군 쇠말뚝으로 거인의 외눈을 찔러 버린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거인이 고통 속에서 소리를 지르자 다른 거인들이 몰려와 누가 그랬냐고 묻는다.

폴리페모스는 이렇게 외친다.


“Nobody(아무도 아니)다!”


그러자 거인들은 그냥 돌아가 버린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과 함께 동굴을 탈출한다.

생존을 위해 이름에서 무게를 덜어낸 극한의 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하면 장예모 감독의 영화 <영웅>도 떠오른다.


전국시대 말기, 한 검객(이연결 분)이 진나라 왕(진도명 분) 앞에 나타나며 영화는 시작된다.

검객은 왕을 위협하던 세 명의 전설적인 자객, 장천(견자단 분), 파검(양조위 분), 비설(장만옥 분)을 모두 처단했다며 그들의 무기를 증거로 내놓는다.

진왕은 자신의 앞 10보(암살 사정권)까지 검객을 다가오게 한다.


검객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세 자객이 서로 사랑과 질투 때문에 분열했고, 그 틈을 타 자신이 그들을 하나씩 베었다고 한다.

진왕은 믿지 않는다.

검객을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세 자객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검객은 진실을 고백한다.

세 자객 중 파검은 한 때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포기했다고 말한다.

파검은, 진왕이 죽으면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지지만, 그가 살아남아 천하를 통일하면 비로소 전쟁이 끝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검객에게 암살을 포기하라 했다는 것이다.


검객은 왕의 바로 앞까지 다가설 수 있었지만 파검의 뜻대로 암살을 포기한다.

이에 진왕은 그를 살려주고 싶어 하지만, 엄격한 법을 지키기 위해 결국 처형 명령을 내린다.

수만 발의 화살 속에서 검객은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고, 진 왕은 훗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한 시황제가 된다.


영화 속에서 장예모 감독은 그 검객을 무명(無名)이라 칭한다.

이름 없는 일개 검객이지만, 전쟁을 일삼는 전제군주를 암살하는 협객보다는 훗날의 천하 평화를 바라보는 영웅으로 그리고자 하는 뜻이다.


이름보다 그의 정신, 그의 기개가 더 숭고하다는 의도이다.


출처 : 네이버




60년 넘게 불린 이름을 두고 전각에 쓸 이름을 따로 지으라니 황망하다.

그래도 숙제라고 하니 호 하나 그럴듯하게 지어가야겠다.

그날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도종환의 시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라는 시를 즐겨 읽는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이런 정취가 물씬 나는 호를 짓고 싶다.

시인의 말처럼, 나 또한 인생의 해가 기울어가는 시간대에서 찬란한 노을 한 자락을 기다리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러니 두목의 시구도 번쩍 떠오른다.


停車坐愛楓林晩 (정차좌애풍림만)
霜葉紅於二月花 (상엽홍어이월화)
수레 멈추고 앉아 늦저녁의 단풍 숲을 즐기노니,
서리 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구나.


그렇다.

상엽, 서리 맞은 잎이 맘에 든다.

한문보다 우리말이 더 운치 있어 보이니 음운을 고려해 '서리잎'이라 부르고 싶다.

하지만 좁은 전각돌 위에 세 글자를 균형 있게 안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리가 내리는 계절인 가을을 줄여 '갈'이라 하고 '갈잎'으로 바꿔보니 갈대도 연상된다.

내친김에 좀 더 깊고 진중한 의미를 담으려고 '갈숲'으로 고쳐본다.

내가 즐기는 신경림 시인의 노래도 은근히 떠올려주어 맘에 든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언제 읊어도 깊고 그윽하다.

매혹의 저음가수 박일남이 부른 <갈대의 순정>이 떠오르는 시이기도 하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여자 마음은 갈대라고 하는데 왜 사나이 우는 마음과 갈대를 엮었는지는 길이 없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의 가사가 슬그머니 연결된다.

남자라는 이름 뒤에 묻어두었던 눈물과 해묵은 사연들도 그 숲에선 바람이 되어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갈숲'을 호로 정하려고 한다.


전각은 돌 위에 마음을 새기는 일이다.

화려한 '상엽(霜葉)'의 자태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눈물을 모두 아우르니 이만하면 제격이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적당한 무게로 나를 대변할 듯하다.

가을의 저녁노을 아래 조용히 흔들리지만 결국 제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내가 돌 위에 새기고 싶은 나의 초상이다.


* 사족 : 저승에서 아킬레우스가 계백장군의 부인과 조우한다면,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꾸할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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