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옛말이 있다. 알이 부화할 때 병아리와 어미가 껍질 안팎에서 함께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에서 '줄(啐)'은 병아리가 알속에서 껍질을 쪼는 행위이고, '탁(啄)'은 반대로 어미가 껍질 바깥에서 쪼는 행위이다. 과거 삼김(三金) 시대의 한 축이었던 분이 신년휘호로 자주 사용해서 유명해지기도 한 말이다. 국민들에게 화합의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의도하는 바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더 깊게 들여다보면, 어미는 절대 먼저 껍질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진실이 숨어있다. 병아리가 껍질 속에서 톡톡 소리를 내면 어미는 그쪽에 가볍게 맞장구를 쳐줄 뿐이라고 한다. 어미가 내는 소리를 따라 병아리는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고 나와야 하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어미는 오직 깨뜨리고자 하는 의지를 부추길 뿐 알을 깨뜨리는 마지막 순간은 병아리의 몫이다. 병아리의 부화과정에 이런 경이로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가 숨어있을 줄이야...
이쯤에서 제나라 환공과 윤편의 고사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 제환공이 햇살 좋은 마루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당 저편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던 윤편이 넌지시 여쭈었다.
“책에는 무엇이 쓰여 있습니까?”
“성인의 말씀이 쓰여 있다.”
“성인들이 살아 있습니까?
“죽었다.”
“그럼 읽고 있는 책은 성인이 남긴 똥이 아닙니까?”
하찮은 수레바퀴 공의 건방진 말에 환공은 순간 화가 벌컥 났다.
“그 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리라.”
“저는 수레바퀴 깎는 일만 평생 해왔습니다. 수레바퀴 축의 구멍은 조금만 느슨하게 깎으면 헐렁해지고, 조금 덜 깎으면 축이 아예 들어가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제대로 깎는 일은 말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제 손에 배어있는 감각이기에 누구에게도 전수할 수가 없습니다. 아들에게도 이것은 전수해주지 못해 제가 이 나이가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장자> 중에서 발췌하여 각색)
배움은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는 과정이다. 스승은 단지 곁에서 계기만을 만들어 줄 뿐이다. 배우는 자는 그 과정에서 그만두고 싶은 온갖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우리는 뭔가를 하다가 힘들면 제일 먼저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한다. 스승을 잘못 만났다고 의심도 한다. 또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닌가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유혹하는 번민들이다. 번민 없는 배움은 없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배우던 때로 돌아가 보자. 두 바퀴를 굴려서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이 넘어져야 했던가? 얼마나 불안했던가? 그만두고 싶었던 유혹이 얼마나 많이 찾아왔던가? 무릎 한번 깨지지 않고 배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러다 느닷없이 ‘감을 잡고’, ‘느낌이 온’ 어느 순간, 우리는 표현할 길이 없는 희열을 맛보았다. 삶은 배움의 연속이다. 그 배움은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다. 그것을 통해 마침내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새로운 세계다.
“새는 알에서 나와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상을 깨뜨려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오른다. 이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이다.” (<데미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