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가경제가 도약 단계를 지나 안정화 단계에 진입한 지 꽤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도시계획도 이제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보다는 기존 도시를 재정비하거나 리모델링에 더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 도시문제 논의에서 도시 재생이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서 1960년대 활약한 제인 제이콥스 여사(1916 ~ 2006)와 이 분의 책,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 1961)>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책은 도시계획 분야에서 손꼽히는 명저로 이 분야 전문가라면 누구나 추천하는 필독서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도시의 쇠퇴와 재생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도시계획학도이던 1980년대만 해도 번역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불가피 원서로 읽어야 했는데, 책의 두께가 엄청나다 보니 감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다 지워질 무렵, 지인이 추천해서 번역서가 나온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에 자신이 없던 저는 뒤늦게 이 명저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제이콥스 여사의 삶의 행적을 보면 도시계획가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옳을 듯합니다. 이 분의 직업처럼 책의 내용도 본인이 직접 관여한 사례를 중심으로 현실적인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취재하듯 써 내려간 글에 현장감이 넘쳐, 책이 나온 지 70년이 되었는데도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게다가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조근조근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책은 나오자 말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무척 파격적인데 당시의 전문가들에겐 얼마나 발칙하고 충격적이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서문에는 도시계획의 비조로 불리는 에베네저 하워드의 <전원 도시론>을 비롯해, 르 꼬르뷔제의 <빛나는 도시>, 그리고 도시계획사의 한 획을 그었던 <도시미화 운동>까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 이론들은 지금까지도 도시계획의 정신을 받치고 있는 기본 논리나 원리인데 말입니다.
어느 분야나 한번 정당화된 이론은 보수화되어 전통으로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은 현장과 현실은 외면한 채 전통의 시각으로만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성이 있나 봅니다.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지요. 제이콥스 여사는 당시 도시계획 분야의 이런 현상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전통 도시계획의 관행이 당시 미국 대도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사람을 떠나게 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마 제이콥스 여사가 도시계획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객관적이고 대담한 주장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 이 분이 살고 있는 마을의 문제에 직접 참여해 체험했기에 가능했으리라 보입니다. 이 분의 주장을 따라 책을 읽다 보면, '책상머리 전문가들은 왜 탁상공론이나 하고 있을까'하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전문가들이 움켜쥐고 있는 전통 이론이 도시의 다양성을 없애고 도시의 활력을 저해한다는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이에 대한 처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도시가 다시 활력을 띠기 위해서는 다양한 도시활동과 사람의 흐름이 발생하도록 도시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 지구 내 다양한 용도의 혼합, 2) 모퉁이가 많도록 작은 블록의 획정, 3) 건축시기가 다양한 신구 건축물의 혼재, 4) 충분한 인구의 집중이라는 네 가지 처방을 제시합니다.
전통 이론과는 달리 토지를 용도나 기능별로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고 다양한 용도와 기능들이 자연스럽게 섞이도록 하자는 게 핵심입니다. 또 가급적 작은 블록을 구획함으로써 다양한 필요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마주칠 기회를 만들어 주어 활력 있는 도시로 거듭나도록 하자는 겁니다. 처방의 구체적인 내용 하나하나를 읽다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도시재생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도시계획의 조류와 거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고전에서 읽은 옛말이 떠올랐습니다. ‘말만 앞서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공허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면 무모하다.’ 이 말을 전문분야에 적용하면 이렇지 않을까요? ‘이론만 알고 실무경험이 없으면 공허하고, 이론은 모르고 실무경험만 있으면 무모하다’ 제가 읽어본 도시계획 관련 저술 중에서 이 책이 단연 돋보입니다. 이론에 치우친 공허함과 현장 감각에만 의지하는 무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으로 도시를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한참 업무에 몰두하던 시절에 읽어 보았더라면, 참여했던 많은 프로젝트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추진되지 않았을까 회한이 듭니다.
이 책은 한번 읽고 책장에만 꽂아 둘 책이 아닙니다. 일하다가 혹은 공부를 하다가 문득 다시 들춰 보고 싶은 책입니다. 미국에서 도시재생의 개념이 형성되는데 이 책이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요즘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도시재생이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때, 제이콥스 여사의 혜안을 담은 불후의 명저를 읽어 볼 수 있어서 큰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