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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Feb 11. 2024

타이베이 여행 1

첫날 - 세아들과 함께 떠났다

두 달 넘는 긴 방학 동안 꼼짝없이 집에서 누워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아빠로서 청소년기와 유년기 기억에 남을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했다. 이제 2월 말이면 상경하여 대학에 진학하는 큰아이, 중학교와 초등학교 생활 중인 둘째와 막내 아이에게 겨울방학 이벤트를 만들어 줘야 했다.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여행이 딱 맞는 일이었다. 바쁘고 골치 아픈 회사 일만 아니라면. 아니, 어쩌면 쳐다보기도 싫은 회사 일에서 도피하려고 여행을 택했을 수도 있겠다. 눈 감고 저지르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결정이었으니까.     

미루다 이제는 벽에 부닥친 회사 일을 어설프게 봉합하고 급히 비행기 표와 숙소를 물색했다. 이게 될까 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덧 여권과 항공권, 숙박권이 내 손에 쥐여 있었다.     


그렇게 대만에 왔다. 대만이라는 작은 섬나라를 선택한 이유라면, 우리 집 제주에서 직항편이 있는 곳, 항공권이 싼 곳, 그리고 십 년 전 회사 일로 왔었던 타이베이에서 남은 괜찮은 추억 때문일 것이다.     

준비성 철저한 남들은 빡빡한 일정과 먹거리, 쇼핑 리스트를 빼곡하게 정리한 후 여행을 떠난다는 데, 계획 세우기 서툴고 즉흥적이기만 한 나는 지금 투숙한 호텔이 타이베이 시멘딩(서문) 외곽쯤이라는 것밖에 모르니, 세 아이를 인솔하고 여행을 떠난 보호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지만, 그래도 좋다. 여행을 시작했으니까. 타이베이에 왔으니까. 전화가 되지 않으니까.     


어젯밤, 퇴근 후 부리나케 짐을 챙겨 아이들과 함께 공항에 갔다. 4명의 여행자의 손과 어깨에 캐리어 3개와 배낭 2개가 들리고 매여 있었다. 그리고 은행가는 직원에게 부탁해 급히 환전한 대만 달러 14,000원이 우리가 가진 여비 전부였다. 경제적 여력이 없었기에 여행하기에 빠듯한 경비만을 준비하였는데, 은근히 신경이 써졌다. 며칠간 홀로 남을 아내의 환송을 뒤로 한 채, 입국장에 들어섰다. 비행기가 연착되었다는 안내 방송은 심야의 여정이 엉덩이를 쑥 뒤로 뺀 채 우리를 반겨주지 않는 것 같아 야속했다.     


깊은 밤의 공항 플랫폼. 대만과 마카오로 향하는 대만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뒤섞여 모호한 대화가 소음처럼 흐르는 대합실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다 빗금을 그리며 흐르는 통창 넘어 펼쳐진 활주로를 내다본다. 반사되어 언뜻 보이는 내 얼굴은 푸석한 피곤이 더께처럼 쌓여 밤의 어둠처럼 어둑어둑 내렸나 보다. 공항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상기된 웃음을 머금고 있어, 여행하지 않아도 공항에만 오면 항상 기분이 좋아지는 나도, 여행을 앞둔 순간임에도 기대감에 부풀기보다는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동행하는 아이들에게 좋은 것, 맛있는 것을 물어 다 주어야 한다는 어미새가 된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짧은 비행일 줄 알았는데, 발권하고 수속을 밟고, 대기하고, 연착되고, 하늘을 날며 내는 굉음이 요동치고, 기압 변화에 놀란 아기들이 우는 시끌벅적하고 불편하고 좁은 의자에 앉아 밀폐된 비행기 기체 안에 두 시간을 앉아 있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우리 시간으로 새벽 1시.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했고, 입국 게이트로 들어서기 전, 대만 관광청의 여행지원금 이벤트에 참가했다. 여행 오기 전부터 벼르던 일이라 가족 4명이 차례대로 도전했는데, 둘째 아이만 당첨의 행운을 거머쥐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쥐어진 대만 돈 오천원의 이지카드. 대형마트나 편의점, 교통카드로 쓸 수 있는 우리 돈 이십만원 정도 되는 거금이다. 내심 전원당첨을 기대하며 추첨 버튼을 누르는 꿀팁까지 공부했던 우리는 실망했지만, 새벽 시간 호텔 체크인을 하고 편의점을 찾아, 이것저것 양손 가득, ‘편의점 털이’를 하니, 한 명 당첨이라도 이게 어디냐 하는 감사한 마음이다.     


하루전 급히 예약한 택시 같은 승용차를 타고 타이베이 시먼딩의 [호텔 리버뷰 타이베이]에 투숙했다. 4명이 쓰는 더블 침대 2개가 놓인 룸은 하루 14만원 정도 되는 저렴한 가격이라 큰 기대가 없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라 실망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빌딩 12층까지 객실이 있는 큰 호텔이지만, 오래된 건물, 퀴퀴한 냄새, 낡은 시설은 여행장의 기대감을 허물어뜨리는 아픈 손가락이다. 회삿일을 할 때, 단합대회 같은 여행 행사를 진행해야 할 때가 있는데, 선배에게 배운 철칙은 ‘좋은 곳에 재우고,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면 욕은 안 먹는다’는 것이고, 이 단순한 법칙이 여행에서 지켜야 할 금과옥조라는 것을 수차례 경험해 알고 있다. 이런 까닭에, 나이를 먹고부터는 웬만하면 좋은 곳에서 자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큰아이 대학 등록금과 반년 치의 기숙사비를 내야 하는 이번 달은, 빈한한 우리 집 형편상 이런 여행도 감지덕지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불편하지만 이 호텔에서 이틀을 보내고 나면, 다음 이틀은 방값이 두배인 [저스트 슬립 시먼딩]에서 묵기로 예약을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호텔에서 새벽, 우리나라와 사우디가 용호상박으로 물고 얽은 축구 아시안컵 16강전을 접속 잘 안 되는 외국 스트리밍 사이트를 새로고침 해가면서 봤다. 전술도 없고 늘 밖으로만 돌며 셀럽 놀이에만 진심인, 그런데도 30억원의 연봉을 받는 클린스만 감독에게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어 내심 우리나라가 탈락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동점으로 연장전 후에 승부차기까지 하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며, 고요한 밤 괴성을 지르며 응원하는 내 모습을 보자니, 난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 축구팬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홈팀과 다름없는 응원을 받던 사우디를 승부차기로 이기고 8강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부웅’ 떠오를 수밖에 없던 새벽이었다.     


설핏 잠을 자고 아침, 홀로 일어나 잠깐 묵상을 했다. 그리고 늦은 아침, 아이들과 함께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갔다. 12층, 타이베이를 관통하는 단수이강이 120도 펼쳐 보이는 전망 좋은 뷔페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데, 괜찮은 전망과는 달리 낡은 호텔 시설처럼 음식은 부실하고 맛이 없었다. 이것저것 건들고 포크로 찍어 맛보다가 토스트 한 조각과 수박 몇 개 집어먹고 커피 한 잔 마셨다. 커피도 밍밍하니 맛이 없어, 내일은 나가서 현지식을 먹어야지 하는 발칙한 생각을 한다.     



오늘 계획은 ‘뭐......’ 별로 없다. 준비하고 계획한 게 없으니 조급하기도 한데, 이번 여행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느영나영 보내려고 한다. 그래도 나름 보호자 겸 인솔자인데, 일말의 책임은 있지 않냐며, 잠깐 구글맵과 인터넷의 힘을 빌려, 대략적인 일정을 그려보았다.     

호텔을 나와 시먼딩, 중정기념관까지 걷고, 융캉제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시간이 허락되면 타이완 국립대학교를 방문한다. 그 뒤, 랴오허제 야시장에서 요기하고 용산사를 다녀와야겠다는 계획이 섰다. 계획이 틀어지면 안하면 되고......      


나도 쉬어야 하니 부담을 갖기보다는 편안하고 느긋하게 보내려 한다. 오늘만 날일까? 못 보고 못 먹으면, 다음에 하지 뭐! 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좋아해서 여행지에 가면 강박적으로 여행지 모든 것을 담으려 하던 내 욕심도 기꺼이 포기하련다. 그냥 마음을 흡인하는 장면이 있다면 그 정도만 남겨야지 하는 마음이다. 모든 걸 느슨하게 풀어놓는 것. 이번 여행의 내용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오전 10시. 한국 시간으로는 아침 11시다. 아이들과 차례차례 씻고 여행길을 나서보련다. 기온도 포근하고, 햇빛도 좋은, 여행하기 딱 좋은 20~25도의 날씨 속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타이베이에서의 하루를 느긋나긋 밟고 걷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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