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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한가지 May 15. 2020

고대 동아시아의 도시미적 규범성

도시미적 규범성은 어디서 어떻게 처음 탄생했는가?


 

 지난 글에서는 비교적 현실적이고 단상적인 내용을 담았다면, 이번에는 도시미(가로, 보도, 거리, 건물의 군집을 통해 느끼는 도시의 아름다움)적 규범성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도시 공간에서는 종종 규범적인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아파트 공화국'의 저자로 유명한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서울의 아파트 숲은 규범적이고 획일화 된 양식이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아파트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며 어떤 주거양식보다 그 지지가 강력하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욱 자세히 다루겠다.)

서울의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어디든 아파트 숲이 있다.

 이렇듯 혹자는 아파트를 우리나라의 보편적, 규범적 양식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경험하는 삶과 도시 공간 전체를 규범의 영역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도시의 형질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미적 측면이 있으며, 각각의 도시가 공통적 양식을 바탕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현대와 과거를 아우르는 도시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오늘 소개할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도 그 증거가 발견된다.

 

  '도시'라는 것 또한 규범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특정한 전통과 문화의 시작이 우연적일지라도 현존하는 것들은 과거의 전통과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것을 보존하거나 파괴하면서 발전해왔다. 현재의 복잡한 종교 규범이 원시 부족의 토테미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제 도시, 도시미적 규범성이 처음 탄생한 배경과 보편적 도시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도시미의 규범성은 7C 당나라와 신라의 삼국 통일에서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당나라 장안성의 모습은 고대 계획도시의 특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다만, 이것을 '도시미의 규범성'이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규범'이라는 말에는 '널리 통용됨'을 내포하기 때문에 당나라 장안성 그 자체에는 도시미의 시대보여줄 뿐이다. 즉, 한 국가에서만 존재하는 특정한 도시 구조는 그것을 '규범'이라고 말하기에 다소 무리한 감이 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도시미의 규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 금성의 도시 구조
신라 금성과 더불에 당시 동아시아 도시 구조의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7C 동아시아 국제전쟁 이후, 중원에는 당나라가 만주-한반도 지역에는 발해와 신라 그리고 일본이 중앙 집권화된 율령국가로 자리 잡았다. 또한 당나라 중심 국제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당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당나라의 도시 구조를 함께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의 확실한 '도시미의 규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당나라의 지배적인 세계관에 따라 도시 구조도 이에 종속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당시 동아시아 사회는 당의 율령과 도시구조에 종속되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수도에 걸맞은 메트로폴리스급 이상의 도시 전체를 계획하고 구성할 만한 능력은 역사상 국가 외에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7C~10C의 고대 사회의 도시라도 저 정도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드넓은 중원의 지배자인 당나라 정도의 경제 규모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중원을 통일하고 수나라의 운하를 이용해 동아시아 사회의 패권국으로 자리 잡은 당나라는 그 막강한 힘을 이용해 행정적으로 편리하고 귀족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계획도시 장안성을 탄생시킨다. 장안성은 격자형 계획도시로 귀족들이 마차를 이용하기가 편리하고 가옥의 관리나 치안 유지에 있어서도 아주 탁월했다.


영화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한 장면. 마차들이 헤이안쿄의 대로를 따라 줄지어 가고 있다.
영화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한 장면. 당시 귀족 중심의 수도는 이렇지 않았을까?

수도는 그 사회의 발달 수준과 핵심 계층의 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저개발국과 선진국의 수도는 사진만 봐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지 않는가? 전란과 기근에 시달리던 중원의 혼란한 시기, 삼국이 치열하게 항쟁하던 시기, 중앙의 권력이 약하고 발달이 미약했던 야마토 시대 이전의 왜(일본이라는 호칭은 놀랍게도 당의 도시구조를 받아들인 이후 시작된 나라시대부터 사용된다.). 동아시아의 주요 3국은 힘든 시기를 벗어나 정치와 국방과 경제와 제도가 안정되고 성숙한 시기가 도래한다. 그 시작점은 가장 경제력이 있던 당나라로 그들은 결국 새로운 시대에 맞는 멋진 고대 계획도시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당의 규범적인 도시미적 양식은 한반도로, 일본으로 널리 퍼져나가 한동안 동아시아 사회의 도시미적 규범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 중심의 규범적 도시, 그 이후에는...


하지만, 이런 당나라 스타일의 도시 구조가 영원이 지속된 것은 아니다. 원래 문화는 변하고 전통은 파괴되는 것이 아닌가? 전근대 농본 국가로서의 토대를 잡은 이후, 동아시아의 각 국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당이 완성한 고대 농업 율령국가를 기반으로 서로 다양하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역 간 문화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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