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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곡할 노릇

전격 Z작전 키트은 귀신의 장난이었을까

by 박은실

돋보기까지 끼고 의자에 앉아서 TV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할아버지는 한참을 중얼거렸다.

“그것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일세. 서양 놈들이 조선말을 어찌 저리도 잘하느냐 말이야.” 성우가 더빙한 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할아버지는 내 말을 도통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여고생 때였을 게다. 그때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외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전격 Z 작전’이었다. 악당에게 살해당할 뻔한 전직 형사가 성형수술을 받은 뒤 마이클이라는 새 이름과 최첨단 자동차를 얻고 공공 집행기관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드라마였다. 주인공 마이클이 위험에 처했을 때 손목시계에 대고 부르기만 하면 언제 어디라도 달려오던 멋진 자동차 이름은 ‘키트’였다. 마이클이 “가자, 키트!”라고 하면 키트는 주인이 가야 하는 곳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데려다주었다. 할아버지는 서양 배우들이 우리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모습이 신기했나 보다. 내 눈에는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는 인공지능 자동차 키트가 귀신이 곡을 할 만큼 신기했건만.

운전대만 잡으면 머리와 눈과 손발이 따로 놀게 되는 나는 언제나 키트 같은 자동차를 원했다. ‘아니 자동차自動車라며? 자동차는 스스로 알아서 움직여야 하는 거 아냐? 내 손이나 발을 도구로 사용하면 그게 무슨 자동차냐고?’ 사고를 내고 차를 팔아버린 나로서는 자동차라는 이름이 이만저만 불만스러운 게 아니었다. 끼어들기도 잘하고 주차도 단번에 멋있게 하며 속도 조절도 알아서 척척 해주는 자동차라면 억만금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로 키트 같은 놈이 내게로 왔다. 아니 우리에게로 왔다. 20년을 애지중지하며 타던 차를 처분하고 새것을 사게 된 것이다. 새 차는 주차장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남편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저녁 늦게야 돌아온 자동차 몸에서는 파리가 낙상하리만치 번쩍번쩍 광이 났다. 새까만 어둠을 ‘사악’ 가를 수 있을 만큼 날렵하게 빠진 외관은 영락없는 키트였다. 남편은 싱글벙글했다. 그 모습은 마치 구름을 타고 어화둥둥 하늘을 떠다니는 사람 같았다.

“우리 차는 저공해 차량입니다. 환경을 생각한 자동차죠. 연비가 훌륭해요. 게다가 똑똑하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차 간 간격 조절은 물론이고 핸들 조작, 속도 조절에 끼어들기 방지까지 해주니 모든 게 완벽해요. 심지어 엄청 조용합니다. 그리고 또….” 남편의 자랑은 끝이 없었다. 한마디로 키트와 거의 흡사한 반자율 자동차라고 했다. 조수석에 앉아서 “가자, 키트!” 하며 운전석에 앉은 남편 팔을 툭툭 치면 키트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콧바람을 날리며 데려다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영혼이 모두 빠져나간 표정으로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차에 귀신이 살고 있다.”라며 남편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내게 남편은 주차장에 가보라며 모기만 한 목소리를 간신히 읊어낼 뿐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주차되어 있는 우리 키트의 왼쪽 궁둥이가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예리한 마이클의 눈동자 같았던 라이트는 박살이 났고 악당의 총질도 무사히 버텨냈던 트렁크는 우그러졌으며 아래 범퍼는 놀라 자빠진 주인의 가슴속처럼 덜렁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수습한 남편에게 물어보니 전진 버튼을 누른 후 가속 페달을 밟았는데 후진이 됐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 키트는 주차장 기둥을 사정없이 받아버렸단다.

“급발진도 운전자의 실수라며? 당신 손가락 실수였겠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믿지!” 평소 급발진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운전자를 비난했던 남편을 거세게 윽박질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니까. 아니, 매일 주차하는 집 주차장에서 이게 말이 되느냐고. 분명 전진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니까.” 그날 남편의 귀신 타령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만약에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어림 반쪽도 없는 손주 사위의 귀신이 곡할 노릇에 맞장구를 쳤을지 모른다. 그랬더라면 남편은 자신의 손가락 실수를 무마시켜 준 할아버지께 다디단 젤리 사탕 한 봉지를 아무도 모르게 사다 드렸을지도 모른다. 서양 사람들 입에 붙어있던 귀신이 남편 손에 가서 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을 거라고 믿어는 주겠다. 귀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가 이 시대에 걸맞게 「전격 Z작전」의 ‘키트’보다 더한 인공지능의 소유자라면, 해마다 내는 자동차 할증 보험료 고지서를 받아 든 남편의 후들거리는 속마음까지도 마땅히 달래주어야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세상천지 어디에 귀신이 곡할 노릇이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얼토당토않은 실수나 확신이 서지 않는 일에 대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로 핑계를 대는 것 같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야 어쩔 수 없지만, 남편이 본인의 손가락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는 날이 오면 맛있는 밥집에서 밥이나 한 끼 사줘야겠다. 쓰린 속을 달래는 소주 한잔을 곁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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