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우지정
"자, 이번에는 교배례(交配禮)입니다. 여기 적힌대로 따라 진행합시다."
먼저 세희공주가 청년에게 두 번 절하고 나자 청년도 공주에게 절을 하였다. 서로에게 절을 하며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주는 울고 있었다. 부모형제와 왕실 친인척의 축복을 받으며 화려하게 혼례식을 치러야 할 신분에서 폐서인 되어 갑작스럽게 혼례를 올려야하는 처지가 가슴 아팠다.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맞절하는 낭군이 가엾고 안타까웠다. 청년도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족과 친인척 모두가 대역 죄인으로 몰려 참수당하거나 뿔뿔이 흩어진 마당에 근본도 모르는 여인과 혼례를 올리는 자신이 비정상인 것 같아 우울했다.
"이번에는 합근례(合巹禮) 순서입니다. "
공주가 공손히 술을 잔에 따라 청년에게 건넸다.
"서방님, 술잔 받으세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의미의 술잔이었다. 청년은 세희공주가 따라준 술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청년도 세희공주에게 술을 따라 건넸다. 술잔을 받는 공주의 손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공주가 표주박에 술을 가득 따라 청년에게 건넸다. 부부의 백년해로를 의미하는 술이었다. 청년이 단숨에 표주박에 담긴 술을 비우고 표주박에 술을 채워 공주에게 건넸다.
"우리는 오늘 밤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비록 각자가 사고무친의 홀몸으로 혼례를 치렀으나,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또는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대를 버리지 않고 은애하고 또 은애하리다."
흑-.
세희공주는 청년의 말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통곡하는 신부의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행랑채에 들었다가 살며시 밖으로 나온 유모가 공주의 울음 소리가 흘러나오자 가슴이 미어졌다.
"오늘 같이 기쁘고 좋은 날 울면 어떻게 하오. 울지마세요."
청년이 공주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공주는 청년의 품에 안겨 한참동안 눈물을 쏟았다.
"자, 이제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합환주를 듭시다. 우리는 오늘 천지신명의 명에 따라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이오. 이제는 절대로 그대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청년이 공주를 다독여 주안상 앞에 앉게 했다.청년이 공주에게 먼저 술을 따랐다.
"자, 먼저 드시고 한잔 주세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공주가 잔을 비우고 청년에게 술을 따랐다.
"고맙소. 우리가 진정으로 부부가 되었구려. 평생 그대만을 은애하고 해로동혈하도록 정성을 쏟겠습니다. 나를 믿고 따라 주시겠소?"
"고맙습니다. 서방님, 바늘이 가는 데 당연히 실이 가야지요. 앞으로 저는 서방님의 뜻이라면 어떤 일이든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고맙구려. 정말 고맙구려."
은근히 오고가는 술 잔속에 두 젊은 청춘의 정이 진하게 녹아있었다. 청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있었다. 공주 역시 생전 처음 마셔보는 술에 취기가 올라 현기증이 일기도 했다. 신랑이 손수 신부에게 술 한 잔 따라 주었다. 신부는 처음 마시는 술이지만 술이 꿀물 같았다.
"서방님, 밤이 이슥합니다. 자정이 넘기 전에……."
"그렇지. 자정이 넘기 전에……."
‘이럴 때 어머님이 가까이 계시다면 어떻게 초야를 치러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 주시련만…….’
공주는 초야를 어떻게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사내와 한 이불을 덮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부담되었다. 공주가 주저하자 청년은 신부를 살며시 안아 비단금침이 깔려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촛불이 너울거리며 제 마음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마다 신랑 신부의 모습이 벽에 그림자로 그려져 흔들렸다.
"이제 잠자리에 듭시다. 밤이 꽤 깊은 듯 합니다."
신랑이 신부의 족두리를 내리고 당의를 벗겨주었다. 신부가 일어나 스스로 치마와 저고리를 벗었다. 얇은 속옷 사이로 백설보다 하얀 신부의 속살이 비쳤다. 신랑은 신부의 눈부신 모습에 잠시 동안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신부가 이불 속으로 자리를 잡고 눕자 신랑도 의관을 벗어 곱게 정리하고 황촛불을 껐다.
이미 여인을 알고 있는 신랑은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신부의 입술을 더듬었다. 사내를 생전 처음 받아들이는 신부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다. 여인의 가냘픈 신음이 긴 여운을 남기며 문 밖으로 새어나왔다. 밖에서 방안의 기척을 숨죽이며 가늠하던 유모가 몸을 뒤틀며 살며시 빠져나와 행랑채로 향했다.
신랑 신부의 심신이 합일(合一)되었을 때 북두칠성의 제1성인 탐랑성이 밝게 빛나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북극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탐랑성이 강한 빛을 내자 제7성인 파군성이 정기를 잃으면서 하얗게 변색되다 시피했다. 파군성 급살(急煞)의 기가 쇠해져서 암기(暗氣)를 불러내지 못했다. 탐랑성이 쇠하고 나머지 여섯개의 별들이 보랏빛 상서로운 기운을 발산하자 주변의 뭇별들은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화기(和氣)를 뿜어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서방님, 생시입니다. 이건 분명히 생시에요.”
“그런 것 같군요. 이승에서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내 그대를 한시라도 잊지 않고 은애하리다. 고맙소.”
“서방니임 -.”
길고 끈적한 신부의 비음(鼻音)이 길게 이어졌다. 달이 부끄러운 듯 구름 속으로 숨더니 숲속에서 이름 모를 산새들이 일제히 울어댔다. 수백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 모두 하늘로 치솟더니 신방(新房)이 있는 지붕 위로 올라 원을 그리며 거대한 군무를 추었다.
신랑 신부의 첫날밤은 길면서도 달콤했다. 신부는 태어나서 처음 맞는 사내지만 마치 수십 년을 산 부부처럼 두 사람은 화기애애했다. 신랑이 불덩이를 토해내자 북극 하늘이 번쩍하더니 지상으로 번개를 내리쳤다. 구름 속에 있던 달이 나타나 뽀얀 은빛 가루를 뿌리며 신방의 창문을 하얗게 물들였다.
"아기씨, 저기서 좀 쉬었다 가면 안돼요? 쇤네 다리아파 죽겠어요.”
동이 트기 전에 청년은 세희공주와 유모를 깨워 무작정 동쪽을 향해 걸었다. 쉬지 않고 앞서서 걷던 두 사람은 뒤쳐진 유모의 투정을 들어야 했다. 청년은 행여 누가 자신들의 뒤를 밟지나 않나 자주 뒤를 돌아보았지만 희뿌연 안개 속의 산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멀리 계룡산 봉우리들이 안개 속에 어렴풋하게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치러진 초야의 긴장과 황홀함에 세희공주는 아직도 자신이 비단 금침 위에 누워있는 듯 한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간밤에 길고 긴 운우(雲雨)에 숙면을 취하지 못해 걷는 동안에도 비몽사몽 간이었다. 공주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된 채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희공주는 꿈결처럼 지나간 간밤의 일이 자꾸 뇌리에서 맴돌았다. 생전 처음 맞은 사내였지만 공주는 생각보다 청년의 몸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받았다. 초야에 대한 두려움은 잠시였다.
공주는 간밤의 일이 자꾸 생각나 얼굴이 자꾸만 화끈거렸다. 한양에 있는 부모형제들이 몰래 치른 초야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체에서 이따금 전해지는 뻐근함과 미약한 통증이 자신이 진정한 여자로 새롭게 태어났음 증명해주는 듯 했다.
“서방님,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가요.”
세희공주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초막처럼 보이는 허술한 집을 가리켰다.
“힘들죠?”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맺힌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공주를 바라보았다. 간밤에 힘든 일을 치르고도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공주가 가여웠다. 세 사람은 지친 팔다리를 주무르며 휴식을 취했다. 동시에 시장기를 느꼈다. 그들이 조금 더 걷자 허술한 초막이 나타났다.
-계속-